35p.
..어느 연배의 남자는 나에게 집을 짓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마당에 나무를 심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그 나무가 성장하는 것을 매일 보면서 그곳이 틀림없이 자신의 땅이고 집이라는 자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61p.
..."문학 그 자체가 아니라 문학 주변에 감도는 놀이 분위기나 축제 분위기가 좋아서, 혹은 수입이 안정된 직장에 다닌다는 생각에 안주하면서 나부랭이 글과 함께 문학 놀이에 빠지고 싶어 하는 그런 녀석하고는 일하고 싶지 않아." 그 말은 오랫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기 때문에 하고 나서도 후회는 없고, 내 마음의 소각로가 갑자기 확 타오르는 것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밤은 평소와 달리 푹 잤다.

69p.
...가장 큰 수확은 끊기 힘든 것을 끊었다는 자신감이 아닐까 한다. 의존할 것이 한 가지 줄어, 그 몫만큼 얽매이지 않는 쪽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71p.
...나는 "응. 분명히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먹거나 마시거나 피우거나 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어. 그런 건 달리 할 일이 없는 사람이나 하는 말이야"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비꼬는 투로 "고집이 세네요"라고 했다. "세진 거지." 나는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업을 몇 십 년에 걸쳐 계속할 수가 없어."
..그로부터 2년 반이 지났다. 흡연자를 볼 때 나는 득의의 웃음을 짓고, 마구 먹어대는 사람을 볼 때 또 한 번 빙긋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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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p.
...알리시아는 섬세한 후각을 누구에게 물려받았는지 알지 못했다. 엄마나 아빠는 아니다. 어쨌거나 그 순간 셀리아에게서는 금방 껍질을 벗긴 감자 냄새가 났다. 식물이라기보다는 식품에 가까운 냄새였다.

47~48p.
...그날 오후를 생각할 때마다 새록새록 생겨나는 느낌, 자기들 같은 여자아이들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풍요로운 삶을 목격한 일에 대해 회상하는 메일이었다. 학기 내내 알리시아가 셀리아에게 불러일으킨 부러움의 감정, 후드티에 바지를 맞춰 입는 거로 만족해야 했던 자기들에 비해 값비싼 상·하의 운동복을 입었던 아이. 그리고 또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왔을 때 느낀 안도감. 집에 돌아와 소파에 앉아있는 엄마와 이모, 숙제를 막 끝마친 동생과 사촌들, 한밤중처럼 블라인드를 내린 채 흔들의자에 앉아있던 할머니를 보았을 때 느낀 그 편안함, 그리고 이모와 사촌들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문을 닫는 소리를 들었을 때, 좀 더 후에 문이 열리면서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 카센터에서 일을 마치고 기름 얼룩투성이로 돌아온 아버지에게로 달려가 끌어안은 바람에 셔츠가 더러워졌던 일. 처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셀리아가 보낸 그 메일의 제목은 <불가사의Wonders>. 겉보기에 그 상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말이었다.

150p.
...아빠가 보고 싶긴 해요 하지만 내가 그리워하는 건 결코 살아보지 못한 그 무언가, 내 것이 될 수도 있었던 어떤 삶이죠. 일할 필요도 없고, 냉장고는 가득 차 있고,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감당하지 못할 그런 곳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 아마도 내가 그리워하는 건 아빠도 아니고, 아빠와 함께하던 삶도 아니고, 아빠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그 이미지, 그리고 아빠의 죽음으로 인해 내가 가질 수 없었던 그 모든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158p.
...영화에 흥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를 마주하고 있으면 금세 이어붙인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개연성 없는 행동, 현실에서 절대 일어날 법하지 않은 방향으로 줄거리가 흘러가는 걸 발견하곤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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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p. «심심풀이로 앨버트로스»
..플라스틱 상자에 들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큼지막한 도시락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86p. «왼»
.."아니. 기록하지 말고 그냥 관찰만 해. 기록하면 기록이 사실처럼 보이게 되고, 사실이 아닌 것도 기록 때문에 진실인 것처럼 보이게 되거든. 일단 머릿속에 어떤 단어도 떠올리지 말고, 어떤 결론도 짓지 말고 바라보기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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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p.
...안 하는 것은 하는 것보다 훨씬, 훠얼~씬 간단하다. 충동은 유행성 감기 같은 것이어서 지나고 나면 어느새 아무래도 상관없어져 버린다.

111p.
..메리가 나를 싫어하게 된 것도 당연할지 몰라. 여기에서 태어나고 자란 메리에게는 유코의 그런 허세가 다 보였는지도 모른다. 시오리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들떠 있는 건, 아직 젊고 미래가 있어서였다. 반면 유코가 현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건, 발아래가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113p.
...이 도시가 차갑다고 말하는 사람의 기분이 처음으로 공감되었다. 이 거리에서 환영받는 대상은 자신감을 가진 사람들뿐이다. 돈 있는 사람들, 재능 있는 사람들, 아름다운 사람들, 젊은 사람들, 당장 가진 게 없어도 희망을 품은 사람들. 아무것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젊음도 희망도 잃어가는 인간에게 이 거리는 돌연 싸늘해진다.

158p.
...가격 협상을 마친 후 캐리어를 손에 넣은 그녀는, 기쁘지만 어딘가 생각이 많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살 생각은 없었지만, 엄청 갖고 싶은 것이 눈앞에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충동구매해버렸을 때의 얼굴이었다. 캐리어가 필요하거나 단순히 싸서 산 게 아니라, 그녀와 가나코의 캐리어가 운명처럼 만난 듯 여겨졌다. 아마도 유미가 앞으로의 인생에서 사랑에 빠질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그렇게 무언가와 만날 일은 생길 것이다.

169p.
..매일 함께 있는 거라면 굳이 얼굴 마주하고 이야기할 시간을 따로 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산다면 상황은 다르다. 아이가 돌아왔을 때, 얼굴을 마주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라도 의자 두 개는 꼭 필요하니까.

225p.
..자신이 낯가린다고 혹은 무뚝뚝하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서 카즈시는 약간 거만한 냄새를 맡았다. 그들은 타인들에게 사랑받지 못해도 생존을 위협받지 않는 인간들이다. 카즈시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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