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p. ...안 하는 것은 하는 것보다 훨씬, 훠얼~씬 간단하다. 충동은 유행성 감기 같은 것이어서 지나고 나면 어느새 아무래도 상관없어져 버린다.
111p. ..메리가 나를 싫어하게 된 것도 당연할지 몰라. 여기에서 태어나고 자란 메리에게는 유코의 그런 허세가 다 보였는지도 모른다. 시오리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들떠 있는 건, 아직 젊고 미래가 있어서였다. 반면 유코가 현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건, 발아래가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113p. ...이 도시가 차갑다고 말하는 사람의 기분이 처음으로 공감되었다. 이 거리에서 환영받는 대상은 자신감을 가진 사람들뿐이다. 돈 있는 사람들, 재능 있는 사람들, 아름다운 사람들, 젊은 사람들, 당장 가진 게 없어도 희망을 품은 사람들. 아무것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젊음도 희망도 잃어가는 인간에게 이 거리는 돌연 싸늘해진다.
158p. ...가격 협상을 마친 후 캐리어를 손에 넣은 그녀는, 기쁘지만 어딘가 생각이 많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살 생각은 없었지만, 엄청 갖고 싶은 것이 눈앞에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충동구매해버렸을 때의 얼굴이었다. 캐리어가 필요하거나 단순히 싸서 산 게 아니라, 그녀와 가나코의 캐리어가 운명처럼 만난 듯 여겨졌다. 아마도 유미가 앞으로의 인생에서 사랑에 빠질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그렇게 무언가와 만날 일은 생길 것이다.
169p. ..매일 함께 있는 거라면 굳이 얼굴 마주하고 이야기할 시간을 따로 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산다면 상황은 다르다. 아이가 돌아왔을 때, 얼굴을 마주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라도 의자 두 개는 꼭 필요하니까.
225p. ..자신이 낯가린다고 혹은 무뚝뚝하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서 카즈시는 약간 거만한 냄새를 맡았다. 그들은 타인들에게 사랑받지 못해도 생존을 위협받지 않는 인간들이다. 카즈시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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