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p.
..나는 태어났다.
..처음엔 이런 식의 문장은 완전하다고, 전부 다 갖추고 있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이 문장으로 시작할수 있는 글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반면에 정확한 날짜를 적게 되면 우리는 그만 써도 된다.
..나는 1936년 3월 7일에 태어났다. 끝. 몇 달째 이 문장을 쓰고 있다. 34년 6개월 전부터, 지금까지도!
..대개, 사람들은 이어서 쓴다. 이 문장은 상세한 설명을, 더욱더 상세한 설명을, 온전한 이야기를 요구하는 그럴싸한 시작이다.

39p.
..그리고 그는 하얀 종이를 앞에 두고 오랫동안 떨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하얀 종이를 앞에 두고 오랫동안 떨고 있었다.)

46p.
..바로 그 순간 선택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정확하게 삶 전체에 대한 질문입니다. 제게는 거의 낯선 것들을 신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바로 그때 알게 됩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내 상황을 완전하게 책임져야만 하는 순간임을 알게 되지요....

85p.
..그렇다면 나는 정말 특별하게 말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던가? 그런데 나는 무엇을 말했나? 무엇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가? 내 상태를 말하는 것이? 내가 쓴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내가 작가임을 말하는 것이? 무엇을 알리고 싶은 욕구인가? 내가 알릴 필요가 있음을 알리고 싶은 욕구인가? 우리는 지금 무엇을 알리고 있는가? 글쓰기는 그냥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얼음 궁전 속에 있다. 그 안에서 말들은 서로서로 참조하고, 자기 그림자 말고 다른 것은 결코 만나지도 못하면서 끝도 없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

109p.
..누구든 『나는 기억한다』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누구도 그 책 속에 455개의 ‘나는 기억한다‘를 쓸 수 없으며, 누구도 똑같은 기억들을 쓸 수 없겠지요. 이것은 마치 집합론 같아요. 나는 X와 추억들을 공유하지만, Y와는 공유하지 않아요. 그리고 우리의 추억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집합 속에서 자신을 위해 단 하나의 형상화를 선택할 수 있고요. 이것이 기억들 사이의 간격을 채우는 묘사이며, 어떤 점에서 보면 그 세대 전체가 그 묘사에서 자신을 알아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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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하트와 포테이토는 뭐가 다르다는 거냐?"
.."하트는 심장이고, 포테이토는 감자입니다."
..젊은 남자는 달려들 듯이 말하고는 유리문 밖에서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사람들을 한 번 노려보고는 다시 축 처져서 고개를 숙였다.
..순사는 상당히 기분이 좋은 듯이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후후. 그래? 그런데 어느 쪽이든 뭐 별반 다르지 않잖아."
..젊은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순간 유리문 밖 웃음도 멈췄다. 순사는 뽐내듯이 몸을 뒤로 젖히며 말했다.
.."둘 다 쓸데없는 곳에서 싹트고 들러붙고는 썩어버리잖아."

.."아하하. 소비에트 제국주의는 나름 괜찮았어. 그 선전에 속아서 무심코 소비에트 통치 아래로 들어가면 끝나는 거지. 그 나라 노동자와 농민은 지금 소비에트와 마찬가지로 운이 다했으니까. 자본주의 나라가 인민에게 착취하는 것은 돈뿐이야……, 그렇지만 소비에트주의가 인민으로부터 착취하는 것은 피와 눈물 그리고 영혼까지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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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p.
..그렇다. 비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비가 언젠가 그치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332~333p.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그 사람의 기량만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었다. 분명 품고 있는 몽상의 크기까지 포함한 경구임에 틀림없다.

390p.
...이윽고 물방울의 음악이 고막에 닿았다. 내 머리에 ‘현명玄冥‘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물의 신 혹은 비의 신을 나타내는 단어이자, 글자 그대로 끝 모를 암흑이라는 뜻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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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p.
.."사요 말인가. 그 사람은 미치광이였소. 당신은 모르겠지만 이 추고쿠 혈통에는 강캉타타키라는 핏줄이 있다오. 시고쿠의 견신, 큐슈의 뱀신, 그런 것과는 다소 분위기가 다르지만 보통의 인간과 교류가 불가능한 것이지. 연유를 설명하자면 오래된 일이지만, 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安部睛明)가 추고쿠 연변에 내려왔을 때 공물이 모두 죽어버렸소. 그래서 세이메이는 길가에 핀 풀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인간으로 만들어 공물로 사용했던 것인데, 아무튼 교토로 돌아갈 때 원래대로 풀로 돌려놓으려고 하자 그것이 말하기를 모처럼 인간으로 만들어주셨으니 이대로 두어 주십시오, 하고 부탁했다 하오. 그래, 세이메이도 측은하게 생각하고 그대로 인간으로 있게 해주었는데 원래대로라면 그건 풀이니 생계를 이어나갈 직업을 알지 못하지. 세이메이는 그래서 기도술을 가르치고 그것으로 대대로 생계를 유지하라고 했다고 하오만, 이 혈통의 사람을 풀 인간, 일명 캉캉타타키라고 해서 대대로 기도를 직업으로 하고 있지. 근본이 풀인지라 사람과의 교류는 불가능하다고 해서 보통 사람은 꺼린다오. 사요는 그 혈통 사람이라고들 하더라만 거짓인지 진짜인지 나는 모르오. 어쨌든 지금 촌장을 하고 있는 아라키가 어디서 조사해왔는지 그걸 카에몬 씨에게 떠들어 대는 바람에 카에몬 씨는 점점 사요를 싫어하게 되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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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p.
..섬에 밤이 찾아왔다. 밤은 두 번 찾아온다. 한 번은 날이 저물 때. 또 한 번은 침실의 불빛이 사라질 때.

179p.
.."선생님께서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실수인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아무리 봐도 그리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억울하게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우아한 생활로 복수하고 있는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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