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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여름 2018 ㅣ 소설 보다
김봉곤.조남주.김혜진.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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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혜진 작가의 글이 인상 깊었다. 김혜진이 읽어내는 관계의 결이랄지, 양상이랄지, 이런 것이 참 좋다. 문장도 깔끔하고. 거리를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절과 기분>. 이 소설로 김봉곤 작가를 처음 접했고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나서 작가가 퀴어일 거란 확신을 했다. 명확한 심장의 언어. 이런 소수자 문학은 진솔함, 자아 쓰기가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 자체가 삶이고 삶이 소설이며 그래서 소설가의 이야기가 소설에 등장하게 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런 분야에서의 '자신을 드러냄'으로서의 글쓰기는 의미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금 우리의 현주소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런 감정들을 호명하는 이야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뒤에 인터뷰가 붙어있는데, 이러한 배치가 작품 이해를 높이는 동시에 내가 책을 읽고 생각하고 음미하는 시간을 박탈한다는 생각도 든다. 소설 읽고 나서 좀 뒤에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책이 작고 가볍고 싸고.. 계속 내줬으면 좋겠다 이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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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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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나는 이 소설이 그려내고 있는 '딸'을 머릿속에 그렸다. 핏대를 세워 엄마에게 따박따박 대답하는 딸, 레인과 꼭 껴안고 있는 그린,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연설자, 부당하다고 소리치는 대학 시간 강사, 기자의 무례함에 솔직함으로 맞서는 인터뷰이. 이 사람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소설 속에서 이 사람은 언제나 엄마에게 '딸애'라고 불렸고 이 '딸애'는 '그 애'에게 '그린'이라고 불렸으므로 이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드러난 딸은 언제나 한 번쯤 누군가를 투과해서 나온 사람. 그런 것이 되는 것을 그린은 견딜 수 있었을까. 그린의 엄마가 '성 소수자', '동성애자', '레즈비언'이라는 단어를 듣는 것 자체로 마음 깊이 타격을 입은 것과는 달리, 그린은 그런 규정성을 가지고 있는 단어의 무게를 '전단지를 가리키며 이 단어가 바로 나라고 소리치면서' 벗어던진다. 멋졌고 아팠다.

이 소설을 성 소수자 이야기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퀴어 문학을 퀴어로 읽는 것은 중요하지만, 퀴어됨에서 벗어나는 다음 발판 역시 이야기 속에 이미 마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소설을 평범함에 관한 서사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말하는 '평범함'이란 '엄마'가 '딸애'에게 평범하고 수수하게 사는 모습을 볼 권리가 있다고 한 말과 같은 맥락에서의 '평범함'을 뜻한다. 지난 학기에 잠깐 들었던 여성과 문학 수업의 첫 시간에 교수님은 이 수업의 첫 시간마다 몇 년째 물어보고 있는 질문이 세 가지 있다고 하셨다. 첫 번째, 일을 할 것인가? 두 번째, 결혼을 할 것인가? 세 번째, 아이를 낳을 것인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이제는 거의 모두에 해당할 정도로 긍정의 비율이 높아졌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긍정적 대답은 여학생의 경우 절반으로 뚝 떨어졌으며, 세 번째는 두 번째보다 더 적은 수의 여학생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빠른 변화라며, 이제 독일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독일에서 유학한 교수님은 말씀하시면서 '개인주의'에 희망을 걸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어쩌면 다름에 대한 반발은 개인주의의 반대편에 서 있는, 뿌리 깊은 공동체주의라는 것에서 온 걸지도 모른다. 마치 이 소설의 '엄마'가 집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처럼, 순식간에 타인의 변화를 눈치채고 떠드는 교회 사람들처럼, 모두가 모두에게 가십거리로 소비할 정도의 관심만을 기울이고 있는 상태. 그런 게 평균의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다 하는 것, 모두가 비슷해야 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기. 모나거나 튀면 안 되니까, 그런 걸 경계하기 위해 발달해온 공동의 감각.

이 소설에 나오는 '나', 즉 '엄마'는 양면적인 존재다. 왜 사람들은 젠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라는 물음과 왜 젠/딸애는 자신과 무관한 일에 이렇게 신경을 쏟고 자기의 삶을 허비하는가, 라는 물음이 내부에 공존한다는 건 모순이다. 그 모순으로 인해 나는 '엄마'가 '딸애'를 이해할 가느다란 가능성을 본다.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점점 그런 모순을 자각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 소설이 나는 너를 이해해, 따위의 말로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 건 거짓이니까. 김혜진 작가는 작가의 말에 '소설을 쓰는 동안엔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라고 썼다. 동의한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문제에 대해 그 누구도 정확하게 이해하거나 말할 수 없다. 함부로 말하거나 섣불리 이해했다고 여겨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어설픈 공감이나 위로는 아니었다. 이것은 작가가 말했듯, '그럼에도 내가 아닌 누군가를 향해 가는,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마음에서 나온, 다짐의 글쓰기였기 때문이다.

p.s. 두 번째 읽으니 이 세상의 엄마들이 얼만큼 닮았는지 이해하게 된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다들 얼마간 반짝임을 잃고 서로서로 닮아간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런 걸 타협과 체념이라고 부르는 걸까.
그런 게 사회화라면 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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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페미니즘을
초등성평등연구회 지음 / 마티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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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그걸 실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문제가 생겼을 땐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본령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힘 빼고 일러준다. 냉소하지도 않고 회피하지도 않고 문제의 핵심을 통과해 나간다는 것 멋지다.

으레 역사 드라마 같은 것에서 아이들의 행동에서 힌트를 얻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장면이 클리셰처럼 제공된다. 또 교육자들이(교사들이) 교육 방법에 대해 말할 때 더 어린 아이에게 소위 '먹히는' 방법이 바로 위의 학년에서도 먹힌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걸 왜 강조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단순화 하면 무엇이 문제인지 보인다.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말기 위해서는 더 간단하고 더 간명해져야 한다. 너무 머리를 복잡하게 쓰면 오히려 문제의 외곽에 서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명제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많은 위안과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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