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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평점 :
결혼하기 전의 아내는 장모님 작품이고,
결혼 한 후의 아내는 남편 작품이다.
결혼하기 전의 남편은 시어머니 작품이고,
결혼한 후의 남편은 시아버지 작품이다.
며칠 전 SNS에서 본 글이다.
결혼 전후의 남편과 아내가 달라지는 것은
각 가정에서의 살아온 분위기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예로 든 것 같다.
보통 연애할 때는 다정해서 잘 챙겨주던 남편이,
결혼하고 나니 시아버지가 하던 것처럼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거나
권위적인 행동에 실망했다는 말들을 한다.
이는 둘만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암묵적인 사회 분위기로 인해
남녀 간의 관계에 권력과 폭력이 발생하며
감정의 균열이 생기게 된 것일 터.
특히나 결혼 전 동등하게 여겨졌던 관계가
결혼 이후 부딪치며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은데,
비단 이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너무 늦은 시간》에서도
세 편의 단편을 통해 남녀 관계에 대해 다룬다.
이 이야기들은 남녀 관계 속에 숨어있는
갈등을 통해 특히 여성의 내면과 생존,
그리고 가부장적 사회 구조의 문제를 비판하며
더 나아가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첫 번째 이야기인 표제작 〈너무 늦은 시간〉은
카헐이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평상시와 다를 것 없이 업무를 하고 있지만
어쩐지 직장 동료들은 그의 눈치를 보는데,
사실 그날은 그의 결혼식이 예정된 날이었으나
약혼녀 사빈과 파혼하게 된 것이다.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며
그는 약혼녀였던 사빈과의 관계를 회상한다.
그를 위해 애정을 담아 요리를 하고
재료를 사느라 시간과 발품을 파는 데에도,
또 돈을 쓰는 데도 망설임이 없던 사빈과 달리
카헐은 지갑을 두고 온 그녀 대신
결제를 하면서 비싼 값에 놀라거나
다 먹은 그릇을 헹궈 식기세척기에 넣는
사소한 행동에도 불만을 갖는다.
심지어 살림을 합치기로 한 뒤에도
그녀의 물건이 늘어나는 것에 당황하며,
그저 자신의 공간에 그대로 그녀만 들어와
자신에게 맞춰주길 기대한 것이다.
사랑을 받는 데는 익숙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 가부장적인 생각으로
그녀를 대했기에 결국 파혼에 이르게 되는데,
하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거나 반성하지 않고
술에 취해 욕을 하는 데 그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시간과 욕망,
공간이 어떻게 침해되고 억압되는지
그 씁쓸함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였다.
두 번째 이야기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우연한 기회에 유명 작가의 고택에서
2주간 머물게 된 여성작가의 이야기이다.
지원자가 많았지만 운 좋게 기회를 얻고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며 글을 쓸 계획을 세우던 차,
작가의 집에 전화를 걸어와
다짜고짜 '집을 보여달라' 요구하는
한 독일인 남자를 마주하게 된다.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집을 보여줄 거라던데요?'라며
자신에게 맞출 것을 종용하는 남자였지만,
그런 그를 위해 여자는 시간을 비우고
작업을 미루며 케이크를 굽고 애써 존중한다.
하지만 그런 배려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그녀가 준비한 케이크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면서도
작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좋은 기회를 케이크나 굽고, 수영을 하고
자전거나 타며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낸다며
그녀를 비난한다.
심지어 자신으로 인해 그녀의 시간과 공간이
침해받고 있음에도 미안한 기색조차 없다.
그녀는 남자의 무례함에 분노를 느끼면서도
직접적으로 그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
그 마음을 글로 담아 표현하며
여성의 공간과 시간을 존중하지 않는
남성 권력을 문학적으로 응징하는
고상한 복수를 담아냈다.
마지막 〈남극〉은 낯선 남자와
하룻 밤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에
일탈을 꿈꾸는 평범한 주부의 이야기이다.
남편과 아이들을 뒤로 한 채 혼자서 떠난 여행지에서
매력적인 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자신을 위해 장을 보고 요리를 하며
아이처럼 챙겨주는 그에게 빠져 하룻밤을 보낸다.
여행을 마치고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그녀를 유혹하는 그를 거절하지 못하고
다시 그의 집을 찾게 되고,
그녀를 가두고 묶어둔 채 사랑한다 말하는
비뚤어진 구속에 갇히게 된다.
그저 한번 자신의 욕망대로 하고자
일탈을 꿈꾸었던 그녀의 어리숙함은,
후회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시간임을
다시 남편과 아이들을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남극처럼 얼어붙은 결말로 이어진다.
각각의 이야기는
가치관이 맞지 않아 헤어진 두 남녀,
너무 쉽게 타인의 공간과 시간을 침범하며
타인을 힐난하는 두 사람의 갈등,
일탈을 꿈꾸다 범죄에 빠진 한 여자 등
각기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권력과 폭력,
여성의 생존과 저항을 다뤘다.
겉으로는 고요한 듯 보이지만
각 등장인물의 내면에는 격렬한 긴장이 담겨
어떤 인물의 감정에 나를 대입하느냐에 따라
다른 해석을 가져오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으며 몇몇 장면은
소설 《82년생 김지영》과도 겹쳐졌는데,
프랑스판 제목으로는 '여성 혐오'로 출간되었듯
가부장제에 대한 증언과 투쟁의 관점으로도
생각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력적인 현실 속에서도
글로써 응징하거나 파혼하는 '선택'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저항하며
생존하려 애쓰는 여자의 분투에는
공감과 응원의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 큰 자식들과 남편을 위해
팬케이크를 구웠음에도
어느 하나 기다리지 않고 먼저 먹기 시작하고,
기껏 자신의 것을 먹으려 하자
의자를 빼는 장난으로 넘어뜨리고
접시를 깨 음식도 못 먹게 만들고서는
그 폭력을 웃음으로 넘어가는 장면이
마음에 오랜 잔상으로 남았다.
그때 누구라도 웃지 않았다면,
다른 행동을 선택했다면 달랐을 텐데
이 씁쓸함은 시대와 나라를 넘어
누구나 어디에서든 공감할 것이라는 생각이
꽤나 묵직하게 아프다.
하지만 단순히 여성의 이야기가 아닌,
모든 인간관계에서 권력과 감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이 작품을 통해
지금 내가 내리는 이 순간의 선택과 태도가
나 혹은 나와 관계 맺는 누군가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이 책을 읽은 이들이라면
자신의 태도와 언행을 돌아보고 행동하는
신중함을 가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