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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곡미풍 -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
위화 지음, 백도라지 옮김 / 푸른숲 / 2026년 5월
평점 :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언젠가 집 정리를 하다가 아빠의 낡은 수첩 속
내가 태어나던 날의 일기를 본 적이 있다.
철야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잠든 새벽,
엄마의 진통이 시작되어 병원에 갔고
그제야 쌍둥이 임을 알게 되며
큰 병원으로 옮기고 나서야 제왕절개로
우리를 만난 하루의 일상을 적어둔 것이다.
아빠의 일기는 독백이라기보다는
막 태어난 우리를 향한 편지 같은 느낌이었는데,
둘째를 낳으러 갔다가 졸지에 세 아이가 되면서
당황스럽고 복잡한 마음과 동시에
어떤 이름을 지어줄까 행복한 고민을 이어가며
이런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는 바람까지
내가 태어난 날의 기록을 보며
그 시간을 돌아간 듯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이토록 누군가의 인생을, 일상을 담아낸 글은
시간이 이만큼 지난 후에 바라보면
그 시절로 되돌아가게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혹은 지나고 나서 그 시간이 나에게 준 의미를
현재의 내가 비로소 깨달으면서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도
그 자체로 가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중국 현대 문학의 거장이자,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전히 국경과 세대를 초월하는
사랑을 받고 있는 위화 작가가
자신의 인생을 담아낸 산문집을 펼쳤다.
어느 날 휴가지에서 문득 불어오는 미풍을 맞으며
자신의 유년 시절 풍경을 떠올린 그는
바람을 맞기 위해 돗자리를 둘러메고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던 어린 시절을 추억했고,
여름을 대표하는 기억으로 자리 잡은
이 회상을 시작으로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찬찬히 곱씹어 복기했다.
작가이기에 이 회상의 순간들을 문장으로 담아
1980년대부터 2020년까지
40여 년을 아우르는 기록으로,
작가로서가 아닌 아들이자 아버지, 남편이자
어린아이였던 한 사람의 새로운 면모와
그의 인생을 함께 살아보는 듯한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책이다.
1960년 생인 그는 딱 우리 부모님 연배로,
물리적인 환경은 다르지만
이따금씩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던
부모님의 추억 속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넉넉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나름의 즐거움을 찾곤 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
부모님께 흠씬 혼나고 매 맞던 개구쟁이 시절과
돌아갈 수 없기에 때로 더 뭉클하게 나가오는
아들의 출생과 성장과정까지
이리저리 그의 인생의 시간을 따라가다 보니,
무심히 지나간 누군가의 삶이
이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추억 속에서 아련하게 빛나는 과거,
삶이 주고자 했던 메시지는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빠의 일기장을 보며 내가 알지 못한
그 시간을 마치 지금 겪는 듯 느꼈듯,
우리 모두에게도 삶이 나에게 일러준
무심코 흘려보냈지만 선물처럼
나에게 깃들어 있는 그 '삶 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누구에게는 두려움의 장소인 병원,
공포로 다가오는 죽음의 감정도
어린 시절 의사였던 부모님으로 인해
그곳을 어느 곳보다 따스하게 느꼈던
작가의 어린 시절,
말더듬는 습관으로 우스꽝스러웠던
학창 시절의 작은 에피소드나
아들의 임신 사실을 알고 추운 날씨도
체감하지 못한 채 매일 걷던 길을
새삼스레 행복하게 걷던 아버지로서의 설렘까지
그가 이끄는 시간과 장소를 오가며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삶에 대한 기쁨과 슬픔,
때로는 쓸쓸하고 고통을 느끼는 등
40여 년이라는 인생의 흐름 속
그의 내면에 스며든 삶의 조각들은
자기만의 풍미를 더해
특별한 즐거움을 맛보게 해주었다.
하나하나가 꼭 대단한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더라도
그것이 지금의 그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었음을,
우리가 매일 앞을 보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다시 살아가며
인생을 '복습한다'는 그의 메시지 아래
나의 과거의 시간들을, 인생을 돌아보는
의미 있는 기회가 된 독서였다.
과거를 회상하고 돌아보는 것이
앞을 살아가는 데 있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추억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 생각하기 쉬운 요즘
걸음을 멈춰 후회가 아닌 아련한 회상으로
지금을 그리고 내일을 살아가는,
삶을 지탱할 힘을 건져올리는 이 시도가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결국
앞으로를 살기 위한 일임을 일깨워 줬다.
오늘을 사느라 바쁜 현대인들에게
거장의 인생이 주는 메시지가
조금은 천천히, 느린 속도로 곱씹는
삶의 순수를 깨닫게 할 것이다.
휴가지에서의 산들바람이 나비효과처럼
그의 인생을 곱씹어 다시 살아보게 했듯
이 책을 계기 삼아 나만의 산들바람,
지나온 시절에 숨겨져 있는 삶의 선물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