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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메모의 묘미 - 시작은 언제나 메모였다
김중혁 지음 / 유유 / 2025년 7월
평점 :

















기억에 남는 메모가 있던가,
생각을 할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지금이야 TV 프로그램을
언제든 다시 찾아볼 수도 있고,
방송에 나온 레시피가 궁금하면
이를 정리해서 올려주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그런 것이 전무한 시대였기에
오로지 개인의 '메모'에 의존해야 했다.
평상시에 엄마가 메모를 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는데,
어느 날엔가 노트에 볼펜을 들고는
TV 앞에 앉아 한창 집중하던 모습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오늘의 요리' 같은 프로그램이었는데
그날엔 마늘장아찌 담그는 법을 알려줬고,
그 레시피를 기억하기 위해
엄마는 비장하게 볼펜과 종이를 들고
TV 앞에 앉아있다가 자막을 보곤
부리나케 양념 비율을 적었던 것이다.
엄마가 메모를 할 정도면
대단하게 맛있는 요리인가 싶었는데,
끓여서 붓고 며칠 있으면 완성된다는
진행자의 말이 와닿지 않아
'에이 이게 뭐야' 했던 기억은 덤이다.
분명 글이지만 그 형태와 모양,
기록에 완성을 따지지 않는 유일한 글 메모.
누구나 손에 연필을 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어쩌면 본능 같은 일인지도 모른다.
책 한 귀퉁이에 선생님이 하는 설명을
슬쩍 덧붙여 써놓는 메모를 비롯해서,
까먹지 않기 위해 일정을 기록하거나
장 볼 물건들을 쭉 써두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 들은 맛집 레시피를
옮겨 적어두는 것 등
메모에는 다양한 장르가 범벅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메모는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 그런가
휘갈기듯 아무렇게나 써놓은,
들쭉날쭉한 메모는
부피만 차지하는 쓰레기처럼 느껴져
그때만 쓰고 버리는 휘발성 기록일 뿐
기억 보조 장치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소설가 김중혁은
그 누구보다 메모에 진심인 사람으로
메모 앱만 백 개, 메모 노트만 수백 권을 써본
자타 공인 메모광이라고 한다.
그는 머릿속에 부유하는 생각의 파편들을 잡아채
그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들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메모를 활용한다고.
그래서 때로는 영화를 보면서도 메모하고
그 메모들이 작품을 만드는 씨앗이 되는 등
메모를 보조 장치가 아닌 메인 장치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상상을 덧대는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쁜 메모,
알아보기 좋은 글씨체로 쓴 건 아니다.
휘갈기듯 쓴 메모는 때로는 자신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필체이기도 하고,
모든 메모가 가능성 있는 씨앗이 되는 게 아니라
메모 그 자체로만 남는 경우도 꽤 많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메모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메모'라고 생각할 때 떠올리는
수첩이나 포스트잇에 손으로 글씨를 쓰는
아날로그 기록을 넘어서
앱을 이용한 메모, 사진이나 그림,
혹은 영상 형식으로도 메모를 하고 있다고 하니
어떤 면에서는 메모를 별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던 나 역시도 '메모'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하게 만들었다.
책은 에세이 형식으로,
작가가 실제로 남긴 메모와
그에 얽힌 이야기가
짤막한 챕터마다 유쾌하게 펼쳐진다.
작가 특유의 유머와 집요함이
문장 곳곳에 배어 있어
가볍게 읽히면서도 묘하게 여운이 오래 남는다.
메모를 표로 정리하거나 지도를 그리는 등
메모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다 해본 그의 다양한 시도를 따라가면서
'메모'만이 갖고 있는 미묘한 묘미가 있음을
깨우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냥 끄적인 것인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는 그런 질문에도
메모 안 하는 게 더 아깝다면서,
그러면서 날려버린 아이디어가
더 낭비가 아니냐는 발칙한 대답을 던진다.
메모의 효과와 역할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는
조목조목 친절하면서도 꼼꼼한,
그리고 메모 덕후의 집요한 대답을 담아내며
메모의 묘미를 전파하는데 애쓴다.
머릿속에 떠다니며 부유하는 생각 중
어떤 것을 낚아채고 싶은지,
낚아챈 생각의 조각을 어떻게 간직하고 싶은지
또 그렇게 채운 아이디어 곳간에서
무얼 만들어 내고 싶은 사람인지가
메모에 담겨있기 때문에
메모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준다고 했다.
무얼 원하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예민하게 느끼는지 감정이 녹아있기에
메모는 내가 누구인지 간단히 보여주는
방식이 된다.
그렇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때 문득 대학교 '카피라이팅'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해주셨던 말이 생각난다.
괜찮은 걸 쓰려고 애쓰지 말고,
일단 아무 생각 없이 많이 쓴 다음에
다시 그 쓴 걸 살펴보다 보면
그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찾을 수 있고,
또 그것들 중 일부 단어가 뭉쳐져
아예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아마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모의 묘미,
설명하기 어려운 아이디어들이
메모라는 형태를 갖추게 되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유용한 재료가 된다는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문장이기도 해서
무릎을 탁 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메모는 글쎄,라고 생각했던 마음에
익숙한 것을 새롭게 조명하게 만드는,
나만의 독창성에 기반이 되는 메모의 묘미를
책을 통해 깨우치게 되면서
갑자기 메모의 욕구가 샘솟는 기분이 들었다.
메모를 시작하는 순간 세상이 달리 보이며,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또 알고 있던 게 새로워진다니
'메모를 시작하자'는 말에 절로 마음이 움직인다.
지금 당장은 의미가 없을지라도,
내가 끄적여둔 메모가 언젠가의 나에게
좋은 영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행동이자
장을 담그고 와인을 발효하는 마음으로
메모를 길어올려야겠다는 다짐이다.
깔끔하게 적어야 한다,
있어 보이는 중요한 것만 적어야 한다는 편견으로
메모를 망설이고 멀리하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메모 말고
진짜 나를 알기 위한 조각이라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제부터라도 메모를 시작해야지 싶다.
나처럼 메모의 필요성이나 중요성을
체감하지 못했던 사람에게도,
평상시에 끄적이는 메모들을 버려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에게도
메모 광인 김중혁 소설가의 메모 예찬이
새로운 가능성, 마음을 안겨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