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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망초 피는 병원, 아즈사가와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최주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5년 9월
평점 :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몇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때가 기억난다.
치매를 앓고 계셔서 요양센터에서 생활하시던 중,
식사를 거의 못하시고
컨디션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연락을 받았다.
부랴부랴 119를 불러 종합병원으로 이동했는데,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과 함께
워낙 고령이라 수술 중 사망하거나
회복이 어려울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수술을 하지 않으면
하루 이틀 내에 돌아가실 수 있다는 말에,
가족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당장 너무 고통스러워하시니,
강한 분이니까 회복하실 거라 믿으며 수술을 결정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할머니는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고
중환자실에 계시던 중 새벽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날, 요양시설 직원 한 분이
당황한 가족들에게 했던 말이 기억난다.
“다들 이렇게 가는 과정이에요.”
분명 삶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식사는 유동식으로, 화장실은 기저귀에,
씻는 것도 타인의 손길로만 가능했던 할머니였다.
생명은 소중하지만,
자신의 의지 없이 겨우 연명으로 유지되는 삶은
서서히 죽음으로 닿아가는 과정처럼 느껴졌고,
연명치료와 인간다운 죽음에 대한 생각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현직 의사인 작가가 쓴
《물망초 피는 병원, 아즈사가와》는
고령화 사회 속 의료 현실과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깊이 있게 다루며,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의학적·철학적 고찰을 담아낸다.
나가노현 외곽의 아즈사가와 병원을 배경으로,
3년 차 간호사 미코토와 1년 차 수련의 가쓰라가
지역 의료의 특수한 환경 속에서
응급 이송과 환자 돌봄에 시달리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인간을 성찰한다.
지방 병원의 열악한 환경, 인력 부족,
고령화 사회의 의료 부담 등
일본 지역 의료의 구조적 문제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픽션이지만,
고령인구가 급증하는 우리 사회에도 적용 가능한
고령자 의료의 딜레마를 엿볼 수 있어
묵직한 메시지로 다가왔다.
매일같이 환자를 마주하느라
개인적인 데이트도 쉽지 않은 의료진의 피로,
넘치는 고령자를 지탱할 수 없기에
다음 세대를 위한 가지치기가 필요하다는
동료 의사와 가쓰라의 윤리적 갈등은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든다.
병을 치료하거나 생명 연장에 머무르지 않고,
환자가 죽음의 순간까지 인간다운 삶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가쓰라의 성장.
위루로 영양을 공급하며
의학적으로 ‘새로운 단계’가 열렸다고 하지만,
거동도 못하고 의지도 없는 환자가
'양호한 영양상태’라는 말에
위화감을 느끼는 미코토의 마음.
이들은 단순한 의료 기술자가 아니라,
환자의 삶과 죽음을 함께 고민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산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으며
동시에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다”라는 책 속 문장처럼,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각각의 존재가 기억되고 연결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메시지가 깊이 다가왔다.
병원이라는 공간에 어울리지 않게
많은 꽃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가쓰라의 본가가 꽃집이라는 설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얼레지는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리는데,
그 뿌리가 끊어지면 곧 시들어 버린다.
인간도 마찬가지다.”라는 표현은
삶의 끈이 남아 있는지를 꽃에 빗댄 흥미로운 접근이었다.
죽음과 관련해 한계점에 달한 현재의 의료 방식,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무관심한
사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되짚게 해준다.
삶의 마지막까지 존엄과 연결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이라는 저자의 통찰이 깊게 와닿는다.
나 역시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느꼈지만,
막상 그 현실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궁금해하지도 않고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 무관심들이 쌓여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하고,
인간다운 마지막을 맺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이 책의 이야기가 묵직한 울림을 준다.
인간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결국엔 누군가에게 기대고
또 누군가를 지탱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의료진과 환자, 가족과 지역사회 등
여러 관계 속에서 연결된 삶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 계절, 한 해를 살고 지는 꽃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 역시도 땅에 뿌리를 내린 존재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뿌리가 아직 끊어지지 않은 사람은
나이를 떠나 충분히 살아갈 이유가 있고,
또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연명치료를 앞둔 고령의 가족을 둔 사람들에게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소설이지만 현직 의사의 경험이 녹아 있어,
의료인으로서의 철학적 책임까지 엿볼 수 있는 책이었다.
삶과 죽음을 함께 고민하는 존재로서,
여전히 환자들에게 온 마음을 다하는
미코토와 가쓰라를 통해
우리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미래를 꿈꿀 수 있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