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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형의 삶 (양장) - 김민철 파리 산문집
김민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평점 :

















매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번아웃을 느끼고 퇴사를 결정한 뒤,
약간은 충동적인 계획으로 해외여행을 떠났었다.
한바탕 열병을 앓고 난 이후처럼
몸도 마음도 둥 떠난 시기의 여행이라
유독 좋게 느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여행지로 찾았던 그 나라와 도시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따스하고 좋았던 추억으로 남아
언제 찾아도 여전히 나를 위로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했다.
광고대행사의 카피라이터이자
이 책 《무정형의 삶》을 쓴 작가 김민철에게
프랑스 파리가 그런 도시라고 한다.
갓 스무 살이 되어 찾았던
퐁피두 센터 도서관에서 파리에 대한 사랑이 싹텄고,
그렇게 첫눈에 반한 이후에는
좋은 날, 좋은 나의 모습으로
이곳에 다시 돌아올 거라는 다짐으로
사랑의 열병을 내내 앓았다고 했다.
그 꿈을 이루기까지 걸린 시간은 20년.
회사를 퇴사하고 나서야 다시 찾게 된
그녀의 파리 생활기는
같은 경험이 있었던 나였기에
더 설레는 마음으로 오랜 추억을 되짚으며
책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이 여행의 시작은 작가의 퇴사에서 비롯된다.
안정적인 직장을 떠나
오랜 꿈이었던 파리에서의 삶을 실현하는 데
마냥 즐거움과 설렘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는 게 맞나,
지금 시기에 이 여행이 맞나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의 형태를 미리 살아보는
실험이자 도전으로서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린
그녀의 마음에 어느새 응원의 마음이 가득해졌다.
쫓기듯 조급한 마음으로 여행하던 과거와 달리
그녀는 좋아하는 미술관을 찾아 오래 머물고,
동네에서 치즈와 와인을 사고,
작은 빵집에서 오늘 먹을 빵을 사는 등
쫓기지 않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처음에는 혼자서,
그리고 오랜 친구, 회사 동기와 함께하는 여행은
그녀를 각기 다른 세계로 이끌어주었다.
삶의 작은 순간들이 주는 즐거움과 소중함은 물론
내가 좋아하는 것 앞에서 당당해질 용기를,
그리고 좋아하는 것들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었다.
계획을 세우는 여행이 아니라
정해진 틀 없이 감정과 우연에 따라 살아보는 것.
늘 계획을 세워둬야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그녀가
그런 부담을 내려놓고 자유롭고 유연하게
일상으로서 파리를 경험하는 과정은
정형화된 삶에서 벗어난 '무정형의 삶'이 주는
새로운 행복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했다.
관광지가 아닌 '우리 동네'에서의 삶을 통해
파리의 맨얼굴과 마주하며
기존에 사랑하던 도시의 새로운 면면을 깨닫고
이 안에서 자신만의 취향과 낭만을 되찾는 여유는
약간의 불안감을 갖고 시작한 여행이지만
그 안에서도 자신을 위한 선택으로
인생을 풍성하게 만드는
'삶의 선을 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먼 미래를 위해 지금을 희생하지 않고
오늘을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때
그런 매일이 쌓여
결국 원하는 인생이 된다는 믿음으로
오늘의 반짝임을 붙잡는 삶은,
마냥 '나중에'로 행복을 미루던 지금의 마음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 역시 일상에서도 여행에서도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움직여야 비로소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계획 없이 움직이는 것은 때로 게으르며,
방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작가의 '무정형'으로 채워진 두 달의 시간을 보며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일상이 가져오는 해방감이
얼마나 쾌감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또 이 시간들이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삶의 방향을 재정립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익숙한 환경을 떠난 낯선 도시에서의 삶은
당연히 불안감을 가져오기도 하고,
이따금 느껴지는 외로움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그런 고독의 시간 속에서
작가는 자기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갔고,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는 통찰 아래
스스로를 더 성장시켰다.
그녀의 여행을 따라가다 보니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삶도 충분히 괜찮다고,
사회가 규정한 혹은 타인의 삶에 발맞춘 정답 대신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보자는 용기가 생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의 삶은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졌다.
그동안은 언제나 꿈꾸던 도시인 파리에
다시 가고 싶다는 것이 전부였다면,
이제는 파리가 아니어도
어디서든 자신이 원하는 형태대로
'무정형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고 말이다.
여행을 떠나야 비로소 자유를 찾고,
그 안에서 잠시 행복을 누리다가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녀의 파리 생활기를 통해
내가 꿈꾸는 나만의 '좋음'은 무엇인지,
그리고 여행이 아닌 일상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중심에 두고 살아간다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고,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삶의 형태를
빚어낼 수 있다는 기대감은
앞으로의 매일을 조금 더 긍정하게 만들어 주었다.
반복되는 매일에 지친 사람에게,
어디론가 도피하듯 떠나고 싶은 사람에게,
삶의 방향을 재정비하거나
나만의 리듬을 찾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큰 울림을 줄 것이다.
삶을 새로이 감각하고
회복해가는 과정을 담은 이 기록은,
나답게 살고 싶은 누구에게나
삶의 실마리를 찾게 하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퇴사나 여행이 아니더라도,
일상 속에서 ‘나답게 사는 법’을
고민하고 싶다면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