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 - 낯선 경험으로 힘차게 향하는 지금 이 순간
조승리 지음 / 세미콜론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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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해외여행을 갔던 때가 생각난다.

공항에 도착하면서부터 코 끝에 느껴지던

이색적인 향신료 냄새,

피부에 와닿는 공기의 색다른 습도는

마치 다른 세계로 뚝 떨어진 듯 생경하기만 했다.


평생을 나고 자라오는 동안 보지 못했던

독특한 생김새의 나무와 풀,

그리고 다른 피부색과 외모를 가진 사람들 속에

나만 이방인처럼 겉도는 느낌은

두렵고 낯설면서도

모든 게 궁금하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마음이 한 뼘쯤 자란 것만 같았다.

그동안 내가 살아오며 바라보던 풍경이

이 세상의 전부이자 기본값처럼 느껴졌는데,

꽤 살아봤으니까 웬만큼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지구가 새로운 지각변동을 일으킨 것 같달까.


이토록 낯선 경험 속에 부러 나를 떨어뜨려

익숙한 일상과 분리되는 '여행'이라는 경험은

사람을 꽤나 성장시키고 무언가를 깨닫게 한다.


이질적인 것을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며

앞으로 더 다양한 세상 속으로

나를 데리고 가고 싶다는 생각에

'여행'이 주는 큰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앞을 볼 수 없다면

이런 여행에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싶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좋은 여행지도

즐거움이 느껴지지 않을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다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낯선 경험 속으로 용기 있게 뛰어들어가

삶을 최대치로 느끼는 경험을 선택한

한 시각장애인이 있다.


파격적인 제목의 전작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의 작가

조승리가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10대에 시력을 잃고 전맹이 된 후,

안마사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어느 정도 이 생활에 안정을 누리게 되었지만

어느 날 문득 그 생활에서 공허함과

알 수 없는 허기, 허탈함을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우뚝 비행기를 타고

먼 세상을 향해 떠나게 되었다.


베트남 나트랑과 하노이,

말레이시아 페낭, 일본 도쿄,

홍콩 마카오와 필리핀 클라크, 백두산 천지 등

전 세계의 다양한 여행지에서의 경험,

그리고 예술과 직업 일상 속에서

다양한 시도를 통해 본인의 감각을 탐색한

그 열정의 발걸음을 담아낸

이 작품 《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이다.


눈이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지 않는 이들 나름의 방식으로 풍광을 감상하고,

자신이 듣고 맡고, 맛보고 만진 모든 것을

상상하고 머릿속에서 다시 그려내며

그녀가 써낸 문장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눈으로 바라본 세상의

새로운 면을 만날 수 있었다.


책은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세상이 너무도 보고 싶어서〉에서는

시각장애를 겪는 작가가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백두산 등

다양한 장소로의 여행기를 통해

세상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그녀의 열망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여행이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익숙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시각 대신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등

자신만의 감각으로 낯선 것을 받아들이고

그 감각을 언어로 풀어내고자 하는

그녀의 용기 어린 시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시각장애가 있음에도

여행을 통해 세상을 느끼려는 작가의 열망은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더 큰 힘임을,

그리고 경험은 감각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2장 덥지도 않은데 열이 난 순간들〉에서는

플라멩고 수업, 바리스타 자격시험,

성형외과 상담, 배리어 프리 전시 관람 등

일상 속에서 낯선 활동에 도전하는

그녀의 경험을 담아냈다.


장애를 이유로 포기하지 않고,

춤을 추고 커피를 만들며 외모에 대한 고민으로

성형외과를 찾기도 하며

작가는 몸으로 삶을 배우고 표현한다.


장애가 있어도 예술과 직업,

자기표현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살아 있기에 느낄 수 있는 감각에 최선을 다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과 노력을 보여준다.


〈3장 우리는 어떻게든 살고, 살아갈 것이다〉는

장애인 콜택시, 가족과의 갈등, 사회적 편견 등

작가가 마주한 현실적인 문제,

사람들과의 관계나 내면의 갈등과 성장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콜택시 대기가

90명이 넘어갔던 날의 기록이나

마사지숍을 찾은 손님들과의 대화,

가족과의 갈등 등 일상 속에서 느낀

불편함과 감정의 진폭을 생생하게 담아냈는데


유머와 냉소, 따뜻함이 공존하는 문체는

무거운 현실을 유쾌하게 풀어내며

장애 유무를 떠나 누구에게나

불완전한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

그리고 그 안에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용기를 가르쳐 줬다.


마지막 에필로그를 통해서는

책의 제목이기도 한 검은 불꽃,

그리고 빨간 폭스바겐에 대한 에피소드가 담겼다.


시력을 잃게 된 후 소리만 들릴 뿐

그 형형색색의 불꽃을 볼 수 없어 색을 잃은 불꽃과

먹고사는 생존 앞에 어머니의 배알을 꼴리게 했던

빨간 폭스바겐 자동차는

감각의 상실, 기억의 힘을 상징한다.


시각이 사라져도

감정과 기억은 여전히 선명히 남아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무엇으로 세상을 느끼는가 하는

깊이 있는 질문을 마음속에 던지게 한다.


'과연 보이지 않는 여행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조차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의 여행기,

다양한 일상에서의 경험들로

세상을 새롭게 감각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장애는 감각의 끝이 아니라

다른 감각의 시작임을,


삶은 누구에게나 불편하고 복잡하지만

그 안에서도 똑같이 울고 웃으며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는

어떻게 더 깊이 느끼고 살아갈 것인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뜨거운 메시지가 남았다.


감각을 통해 삶을 최대치로 느끼려는

작가의 여정은 장애인의 이야기를 넘어

감각과 감정으로 삶을 껴안는 방식을 보여주며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을 낯설고

또 아름답게 다시 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엇비슷하게 반복되는 하루에

일상이 무뎌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삶의 감각을 되찾아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에게

장애가 있어도 하고 싶은 건 한다는

조승리의 태도가 큰 용기를 주리라 생각한다.


삶을 더 깊이 느끼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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