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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어둠
조승리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6월
평점 :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라는
파격적인 책 제목만큼이나 뜨거운 울림을 주었던
시각장애인 작가 조승리의 작품을 기억한다.
시각장애라는 암담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뜨겁고 치열하게 세상과 부딪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매일을 살아가는 그녀의 이야기는
동정과 연민으로만 바라보던
장애인의 삶과 그들의 현실에 대해
그동안 갖고 있던 편견과 고정관념을
녹일 수 있는 의미 있는 기회였다.
장애 당사자가 써 내려간 장애인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굉장히 사실적이고 가감 없이 현실을 드러내어
필력이나 문학적인 가치를 떠나 좋았는데,
이번 작품 《나의 어린 어둠》에서는
작가로서 조승리의 필력을 느끼고 만끽할 수 있어
전작 못지않게 많은 감동을 받았다.
이번 책은 그녀의 이야기를 담아낸
에세이나 산문집이 아닌 '소설'이지만
분명 가상으로 만들어낸 창작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녀의 삶인 양 느껴진다.
실명을 앞둔 청소년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각 작품의 화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실을 끌어안고 한걸음 나아가는 모습은
각기 그 모양은 달랐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조승리'들의 삶을 그대로 녹여내었기에
때로는 숨이 턱 막히는 막막함으로,
때로는 애틋함에 울컥 눈물이 차오름을 느끼며
단숨에 멈추지 않고 읽게 만들었다.
실명을 앞둔 중학생이 겪은 첫사랑,
갑자기 장애를 떠안게 된 자식을
아직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모와의 충돌,
특수학교에서의 기숙사 생활,
장애에 냉혹한 사회 앞에서의 좌절 등
일부러 극적으로 지어내려 애쓰지 않아도
극적인 그들의 삶과 그 안에서의 성장은
픽션을 넘어 르포르타주에 가깝게 느껴져
더 감정을 이입하게 되었다.
시각을 잃어가는 각 작품의 화자들이
상실을 어떻게 예감하고 마주하며 성장하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재건축해나가는지 그 발걸음을 함께하며
독자 스스로가 각자의 삶에 얹어진 상실을 가늠하고
나는 어떻게 내 현실을 마주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시간을 갖게 했다.
첫 번째 이야기 〈네가 없는 시작〉은
실명 판정을 앞둔 중학생 '나'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한 학년 선배인 '너'와 사랑에 빠지지만
시각장애라는 현실 앞에
결국 이를 떠안을 용기가 없는 '너'의 회피로
관계가 단절되어 버리고 만다.
시각장애를 가진 자신을 망가진 존재로 인식하며
네가 더 망가지면 당당히 그 옆에 설 수 있을 거라는
'나'의 비틀린 감정과 절망은
이 시간을 직접 통과한 조승리가 아니었다면
표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놓칠까 봐 두려운 마음,
애틋한 사랑의 감정도 장애라는 현실 앞에
당연한 듯 단절되고 상실하게 되는 모습에서
그저 시력만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삶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시각장애인들의 상처를 헤아릴 수 있었다.
두 번째 작품인 〈내 안의 검은 새〉는
장애를 가진 자식을 부정하는 아버지,
진로에 자립도 부정당하는 장애인을 보는 시선,
낯선 곳에서 혼자 설 수 없는 현실을
복합적으로 그려냈다.
갑자기 장애를 가지게 된 자식을 외면하고 싶고,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차별하는 부모의 마음이
속상함에서 비롯되었다 할지라도
상처로 와닿는 장애 당사자의 서러움은 물론
졸업도 진학도, 취업과 진로에서도
자신의 의지대로 하기보다 보호자의 의견 아래
그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게 부정당하는 현실은
가정이나 사회에서는 물론 어디에서든
이방인처럼 취급 당하며 쫓겨난 것처럼
처참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지금의 사회에서
우리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를
스스로 고민해 보게 만들었다.
실명이 감각의 상실일 뿐 아니라
관계의 파열이나 불확실한 미래까지 받아들이게 하는
총체적인 체험임을,
이를 거부하거나 부정할 수 없이
그저 수긍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막막함을
이렇게 문장으로나마 짐작해 본다.
세 번째 〈브라자는 왜 해야 해?〉에서는
앞선 두 작품에서의 그려진 상실의 과정을 지나
성장으로 나아간 장애인을 담았다.
특수학교에서 부장님이라 불리며
다른 이들을 책임감 있게 통솔하는 화자는
과도기를 거쳐 장애라는 현실에 적응한
성숙한 모습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 역시 장애가 있지만
정도가 더 심한 부희언니를 향해 느끼는
양가적 감정이 존재함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하지만 특수학교 아이들과 지역 초등학생들이
트램펄린을 두고 벌어진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 속,
장애를 가진 몸도 가난도 표가 나지 않는
다 똑같은 그림자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마지막 이야기는 책의 제목과 동명의 작품인
〈나의 어린 어둠〉이다.
시골길을 넘어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다니고,
엄마의 농사일을 도우며 평범한 나날을 사는 성희.
이따금 눈앞이 까만 도화지를 펼쳐둔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꽉 감았다가 다시 뜨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앞이 보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고장 난 자전거 바퀴를 수리해두지 않아
걸어서 학교에 가야 했던 어느 날,
우산을 챙겨가라는 엄마의 말을 뒤로하고
빈손으로 학교에 갔다가
예고 없이 내리는 소나기에
온몸이 젖어들며 겨우 집에 돌아온다.
시력이 떨어진 거겠지 싶었던 눈에
소나기처럼 예고 없이 실명이 들이닥치고
주인공 성희는 빗속에서 자전거를 타듯
앞으로의 인생이 그러할 것이라는걸,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장마가
자신에게 시작되었음을 실감한다.
각 작품의 화자가 시각장애를 마주하며 겪는
가족, 사회와의 단절이나 절망감은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상실이 끝으로 두지 않고 다시 일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려는' 의지가 녹아있다.
이는 비단 글을 쓴 조승리 작가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가 장애인 학교에서 만난 동료들에게서
배운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자신과 그들의 인생을 되짚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그에게 녹아들었고,
그렇기에 이 작품이 작가 본인의 이야기가 아님에도
왜 자전적 소설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게 만들었다.
고요하지만 뜨거운 빛을 품고 있는 어둠,
눈으로는 빛을 바라보지 못해도
손끝과 냄새와 기억으로 세상을 열심히 들여다본
한 사람의 뜨거운 몸부림을 통해
끝내 상실을 받아안을 수 있는
그 녹진한 마음을 오롯이 마주할 수 있었다.
이야기의 어떤 부분이 픽션이고,
어떤 부분이 사실일까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진정성 있게 자신의 삶과 상실, 성장을 담아낸
그의 문장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여러 과정을 거쳐 힘겹게 찍어내 완성한 이 책을 넘어
그가 앞으로 써 내려갈 많은 문장들에도
뜨거운 진심과 글을 향한 갈망이 담기리라 기대된다.
그가 써내려갈 문장을 통해
수많은 비장애인들이 장애를 바라보는
비뚤어지고 편협한 시각과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 있었으면 좋겠고
장애당사자들 역시 절망을 이겨내고
앞을 기약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