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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 개정판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평점 :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아내와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있는
평범한 40대 중반의 남자 조지 볼링.
작은 마을의 곡물·종자 상의 아들로 태어나,
1차 대전에 참전해 하급 장교로 전역,
운 좋게 들어간 보험회사에서
18년째 일하고 있는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겨우 먹고살 만한 하류 중산층의 삶은
큰 사건 없지만 매일이 무미건조하다.
애정 없는 결혼생활,
아내는 매일 돈, 돈 노래를 하며 그를 옥죄고
쟁쟁거리는 아이들은 그를 지치게 한다.
부모로서 따스한 사랑, 희생을 감수하는 다짐은
아이들이 잠든 찰나의 순간뿐이다.
그러던 그에게 어느 날 공돈이 생긴다.
동료의 권유로 우연히 경마에 돈을 넣었고
아내가 모르는 돈 17 파운드가
그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이걸 어디에 쓸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 그는,
문득 20여 년 전 떠나온 고향을 떠올린다.
평화로운 풍경, 낚시를 즐기던 유년 시절,
첫사랑과의 추억이 가득한 그곳에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빠듯하게 먹고사는 매일 속 반복되는 걱정거리,
그리고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그렇지만 반드시 찾아올 거라 확신하는
전쟁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고요함'을 만끽하고 싶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무겁게 얹어진 가장의 중압감을
잠시나마 떨쳐버리고 오로지 나만의 공간,
어린 시절 나만이 알고 있던
비밀 연못에서 낚시를 하다 보면
이 흔들리는 마음과 불안감은 녹아내리고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현타'의 순간에서 꿈꾸는 '현실도피',
일명 '힐링'이라 할 수 있겠다.
《숨 쉬러 나간다》는 이 책의 제목처럼
오랫동안 발길을 끊었던
평온한 고향으로의 발걸음은
숨 막히는 현실을 살아가는 누구나 꿈꾸는
일주일간의 작은 일탈을 다룬 이야기이다.
아내에게 출장을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
비상금을 들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찾아간 고향은 예전과 같이
그를 설레고 따스하게 맞아줄까?
그랬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대리만족'을 기대하던 마음을 무너뜨리듯
대규모 주택단지, 공업 타운으로 변해
삭막해진 풍경은 물론
푹 퍼져 '할머니' 같은 모습이 된 첫사랑
(심지어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곳만큼은 남아있을 거란 기대로 찾은
그만의 비밀 연못도 물 한 방울 없이
쓰레기 매립장이 되어 그를 실망시킨다.
1차 대전을 겪고,
시대의 변화로 인해 기존의 가치가
와르르 무너지던 당시의 시대상,
그리고 다가올 전쟁에 대한 두려움 등
현대사회에서 누구나 느끼는
'소외와 불안'을 다룬 이 이야기는
주인공의 일탈이 성공했는가,
혹은 그가 일탈을 통해
무엇을 만끽했는가를 떠나
시대는 다르지만 장기 불황과
불확실성 속에 살아가는 요즘에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
큰 공감의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젊고 야망이 가득했으며,
당장은 어떨지 모르지만
미래에는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로
반짝반짝 빛났던 과거의 영광과 달리
한가득 배가 나오고 틀니를 낀
중년의 그가 마주한 현실은
시간의 흐름만큼이나, 그의 외모처럼
씁쓸하고 잿빛으로만 변했기에
마치 나의 '일탈'이 실패한 양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호시절은 미화되기 마련이지만
낚시로 상징되는 그의 어린 시절은
무척이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웠으며
그의 곁을 지켜주는 부모의 노동 역시
힘겹고 지치기보다는 그가 흘리는 땀방울로
건강하게만 느껴졌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가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물론
그들의 '계급'과 '성격'을 표현한 문장은
'시간의 흐름 앞에 장사 없다'는
옛말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변해버린 추억의 장소에 대한
실망감이랄까 안타까움은 물론
저물어 가는 한 시대와 세계,
그리고 이를 잠식하고 쉽게 무너뜨리는
현대의 삭막함은 이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운명과 숙명을,
그렇기에 가속화되는 경쟁과 불안감,
각자의 욕심을 위해 유발되는 전쟁이라는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두려움은
책이 쓰일 당시 다가오지 않았던
2차 대전과 파시즘 지배를
정확하게 예견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제대로 통찰하고 바라본
조지 오웰의 뛰어난 안목과 시선을
느낄 수도 있었다.
전쟁이 일어날 것임은 알고 있지만,
전쟁이 일어난 이후가 문제라며
먹고살기 바쁜 내가 왜
이런 것을 걱정하고 고민하는가가
도리어 이상하게 느껴지는 조지의 고민은
다가올 두려움의 정체와
불안함의 원인이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단지 1차 대전을 겪고 2차 대전을 맞이할
그때의 그들에게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 같아
한편으로는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제 과거로 돌아가 본다는 생각과는
작별을 고한 그가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
어떤 기대로, 어떻게 숨을 쉬며 살 것인가
그 뒤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가장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시대와 문명의 위기를 짚었을
조지 오웰의 날카로운 문장에서
어쩌면 더 꽉 막혀버린 오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혹은 어떤 것을 꿈꿔야 할까 모르겠다.
하나의 저무는 세계,
그 격동의 지점을 살아갔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과연 세상에 숨 쉴 곳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표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