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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 정신과 영수증 - 2만 장의 영수증 위에 쓴 삶과 사랑의 기록 ㅣ 정신과 영수증
정신 지음, 사이이다 사진, 공민선 디자인 / 이야기장수 / 2025년 4월
평점 :














막 디지털카메라가 출시되고
싸이월드가 유행하던 대학 시절,
아날로그와 디지털 감성이 공존하던 그때
독특한 책 한 권을 만났다.
'정신과 영수증'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얼핏 정신(의학과)과 영수증으로 해석되어
도대체 무슨 책이지 싶은 느낌이었다.
먼저 이 책을 읽어본 언니가
"이 책 정말 미쳤어, 꼭 읽어봐." 하길래
기대 가득한 마음으로 책을 펼쳤고
사진과 몇 줄의 글 만으로 푹 빠져들었다.
요즘이야 '영수증 드릴까요?' 물으면
영수증 리뷰 이벤트를 위해 필요할 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지만
그때의 정신은 영수증 한 장 만으로도
뚝딱 이야깃거리를 써 내려가는
그야말로 '부러운 감성'의 소유자였다.
또래인 그녀가 빼곡하게 모아온
영수증과 그에 담긴 이야기는
부러움과 질투 어린 감정으로,
'나도 이런 이미지이고 싶다'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다.
워낙 많은 영수증과 글이었지만
유독 마음에 남는 기록이 있다.
좋아하는 오빠의 집 앞에
종이 우유팩 하나를 매일같이 사다 놓고는
30일째 되는 날에는 딸기우유로
고백할 거라는 귀여운 그녀의 작전.
'오빠 집 앞의 딸기우유가 되어
집 안에 들어가고 싶어요'라는
발칙하고도 귀여운 고백 멘트는
나중에 꼭 써먹고 싶다며
메신저 대화명으로도 써둔 적이 있을 정도.
시간이 지나 이 책에 대한 기억도 흐릿해졌고,
이따금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러 갈 때면
'이 책이 있나' 한 번쯤 검색해 봤을 뿐
이렇게 긴 시간이 흐른 후에
그녀가 다시 영수증을 들고 나타날지 몰랐다.
스물네 살의 정신은 40대가 되었고,
자신의 감정과 사랑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드러내었던 그녀는
이미 결혼을 했거나,
혹은 다시 돌아왔을 수도 있겠다는 짐작과 달리
여전히 인생을 홀로 살아가는 중이었다.
더 나이가 들면 '당신'을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조급한 마음과 동시에
여기에서가 아니라면 타국에 있을까,
어쩌면 허무맹랑하고 단순한 생각으로
비행기에 탄 40대 정신의 영수증 기록은
'결혼도전기'라고 해야 할까
그녀와 똑같이 여전히 미혼인 나에게
웃프기만한(웃기지만 슬픈) 상황이었다.
정성스럽게 모아둔 영수증,
누군가를 위해 혹은 자신을 위해
물건을 사고 영수증을 챙기며
기록을 멈추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20대의 정신, 그대로였다.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에
변함없는 여전한 감성이 담긴
이 책을 넘기자니
어쩐지 코끝이 훌쩍여지는 듯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지인처럼,
동창회나 옛날 살던 동네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처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지금은 어때?'
묻는 질문에 답을 하듯
자신의 상황과 마음, 기도는
순식간에 20대 초반의 그 시절로 이끌었고
그때 나를 설레게 했던
'정신과 영수증' 책을 함께 만들어준
사이이다와 공민선은
이번 책에서도 여전히 그녀와 함께했고
그녀의 친구로 여전히 뜨거운 응원과 박수,
그녀를 향한 따뜻한 애정을 담뿍 남아낸
홍진경의 추천사 역시 한결같아서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 만났지만
모두 한마음인 듯
나만 아는 결속력에 피식 웃음 짓기도 했다.
처음에는 제아무리 개성 넘치던 사람도
40대에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이 중요한 건가
하는 아쉬움이 들던 것도 잠시,
결혼이라는 인생 과업 앞에
조금은 성급해지는 마음,
과연 '내 짝이 있을까'하는 두려움과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정신의 비장한 결심은
나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아
'당신'을 만나기 위해 데이팅 앱을 열어
착실히 출근하고 퇴근하는 시간이
제발 무의미해지지 않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또 바랐다.
막막하고 막연한 인생 속
단단한 일상을 가지길 꿈꾸는 게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바람이니까.
목적지를 옮기고 만남을 반복하지만
큰 소득 없이 여정이 막 내릴 무렵
운명처럼 '당신'을 만난 문장에서는
영수증 한 장과 글 몇 자에 불과하지만
막 사랑에 빠진, 여전히 소녀 같은
정신의 설렘을 엿볼 수 있어
나 역시 두근거림을 멈출 수 없었고
그를 위해 생일 선물로 피아노를 고르고
결혼을 위해 부모님께 소개하고
코로나를 겪으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그녀가 그토록 꿈꾸던
'단단한 일상'에 닿은 일련의 과정은
오랜 친구의 청첩장을 받고,
임밍아웃을 들은 듯
함께 웃고 우는 공감의 시간이었다.
작은 사랑에 설레고,
친구를 위해 혹은 자신을 위해
물건을 사고 삶을 살던 그녀가
이만큼 자라나 여전히 기억을 돌아보며
한 발짝씩 차근차근 인생의 발걸음을
더해가고 있음이
불확실함으로 가득한 이 세상 속
변함없는 어떤 우직함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스함으로
오래 마음에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생의 어두움 속에서도
수집과 기록, 나아감을 멈추지 않고 나아가
결국에는 빛을 찾아내고,
또 이를 책으로 엮어
기억 속 오래된 추억을 되살릴 수 있게'
만들어준 그녀의 노력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각자의 삶이 다르지만
우리는 한 시대를 살아왔고,
여전히 함께 살고 있기에
그녀가 그러했듯
나 역시 나만의 발걸음을 쌓아
이다음 '정신과 영수증'이 나올 때에도
또 한 번 추억과 공감을 되살릴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이토록 반가운 후속편이 있을 줄이야,
새삼 내가 정말 기다렸던 책이었구나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