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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 트리
오가와 이토 지음, 권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6월
평점 :
품절


















요즘이야 '시골 할머니 댁'이라는
표현이 드물 정도로
외가와 친가가 가까이 있는 집이 많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방학이면
'할머니 댁에 다녀왔어'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익숙한 아파트 단지에서 벗어나
각기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는
시골만의 자유롭고 여유로운 풍경,
공부나 학원에 얽매이지 않고
무엇이든 괜찮다고 보듬어주는
인자한 할머니 댁에서의 시간은
나에게도 오래 마음에 남는 추억이기도 하다.
오가와 이토의 소설 《패밀리 트리》,
주인공인 류세이에게도
여름방학은 그런 추억의 시간이다.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소도시
호타카에서 자란 그는,
여름방학이면 외가로 찾아오는 소녀
릴리와의 시간을 항상 기다리곤 한다.
누나, 릴리와 함께 외할머니가 운영하는
고이지 여관의 한 방을 차지하며
함께 풀숲을 뛰놀고 모험을 하며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그 시간은
엇비슷한 매일의 속에서
'살아갈 힘을 주는' 유일한 계절이 된다.
가을도, 겨울도, 봄도
아무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그저 여름의 기억만이 마음에 남아
환하고 선명하게 빛난 것.
그렇게 몇 번의 여름을 반복하며
그는 함께 뛰놀던 '친구' 릴리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쑥쑥 자라는 몸 만큼이나
서로에게 어색함을 느끼는 시간이지만
여전히 '함께하는 즐거움'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여름 날,
우연히 강아지 한 마리를 만나게 된다.
누군가 상자에 담아 버린 그 개를 발견하곤
그들은 '바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는
함께 정성을 다해 돌보고 마음을 쏟는다.
류에게 목숨만큼, 아니 그 이상 소중해진
강아지 바다와의 시간은
그를 이만큼 더 성숙하고 성장하게 만들고,
'내년 여름에 다시 바다를 만나러 온다'는
릴리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은 세 계절을 함께하며
대자연의 생명력을 듬뿍 받으며 자란다.
그러나 갑작스레 찾아온 사고,
그로 인해 뼈아픈 이별을 겪은 류는
더 이상 맑은 소년이 아닌
세상에 대한 절망과 누군가에 대한 미움,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조금은 비뚤어지게 되며
가족의 곁을 떠나 점차 어른으로 자란다.
그렇게 그들이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그동안 류세이가 몰랐던
가족의 특별한 비밀이 드러나고,
사건 이후 제각각의 모습으로 흘러가는
그들의 인생 서사는
여기저기로 가지를 뻗는 커다란 나무처럼
아예 다른 삶인 듯 하나로 이어져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예측할 수 없이 부딪치는 관계,
때로 갈등하지만
다시 화해하고 뭉쳐지는 과정 속에서
하나의 나무 아래 새로운 가지를 만들어내듯
쑥쑥 자라는 이 가족의 연대기는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다양한 관계의 변화,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어두운 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삶의 의미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주인공인 류와 릴리의 이야기를 넘어
그들을 둘러싼 가족 모두 이야기이자,
이를 읽는 이에게는
'나의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목숨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
아끼는 존재를 잃은 사고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그렇지만 이런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인 채 다른 가족과 거리를 둔
류가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런 그를 따스히 안아준 할머니,
그리고 거리를 두고 있지만
떠나지 않고 곁에서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가족들의 사랑은
'세상에 혼자인 것 같은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렇게 나는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만들어주었다.
한 사람의 인생 흐름을 따라
그가 만들어내는 가족의 모습을 보며
각자 다른 잎, 가지를 가지고 있지만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패밀리 트리'가
있음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었고
힘겹고 흔들리며,
서로 갈등하는 순간도 있지만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혈연이라는 테두리로
여전히 서로가 연결되어 있기에,
그에게서 받은 힘으로 인생의 발걸음을
한걸음 더 내디딜 수 있다는 믿음이
때로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견딜 수 있는
든든한 용기를 만들어주리라 기대된다.
끝없이 자애로운 사랑을 베풀어 준
기쿠 할머니의 인생,
그 아래로 세대를 거듭하며
조금씩 영혼을 물려받은 류와 릴리.
이들의 이야기는
혼자 세상에 뚝 떨어진 것 같지만
이 세상은 혼자 태어날 수도,
살아갈 수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가 연결된 존재라는 상냥한 메시지는
인생의 희로애락은 물론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해주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되었다.
릴리와 류가 그려냈듯,
우리 집의 '패밀리 트리'를 그려보며
내 뿌리와 시작을,
그리고 내가 이어 만들게 될 미래를
꿈꾸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