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말씀만 하소서 - 출간 20주년 특별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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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잃은 아이를 부르는 말은 '고아',

남편을 잃은 아내를 이르는 말은 '과부'.

하지만 자식을 먼저 앞세운 부모는

그 슬픔을 이로 표현할 말이 없어서

어떤 말로도 부르지 못한다고 했다.


어떤 죽음이든 사연 없는 집,

아프거나 슬프지 않은 건 없다지만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앞세운

그 고통과 슬픔만큼은

감히 짐작하지 못할 아픔이다.


부모가 자식을 두고 세상을 떠나면

자식에게는 슬픔과 애틋함으로,

그리고 그리움으로 남지만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마음은

그 원인이 나에게 있는 양

그 누구도 탓하거나 마냥 그리워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미워하게만 되는 것 같다.


앞날이 창창한 의대생,

스물다섯이라는 예쁘고 고울 나이에

하나뿐인 외동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뒤

박완서 작가는 글쓰기를 멈추고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도무지 마음을 잡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이해인 수녀님은

분도 수녀원의 언덕방으로 이끌었고

딸의 집에서 언덕방으로,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수없이 무너지고, 또 신과 결판을 내던

박완서 작가는 다시 '삶'에 대한 의지를 붙잡고

집필활동과 여생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아들을 잃고

작가가 언덕방에서 보낸 일상,

그리고 다시 글을 쓰기까지의

시간들을 담아낸 기록으로,


그저 한 사람의 일기를 넘어서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눈으로 바라본

무너진 나의 세상,

그리고 다시 일어서기까지의 고통을

모두 담아낸 처절한 삶의 탐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지금으로부터 11 년 전,

나 역시 아까운 가족을 잃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그 일로 인해

우리 가족도 모든 세상이 무너지는

시간을 겪었더랬다.


작가의 그것과는 크게 다르지 않은

고통에 대한 절규로 힘들었던 지난날은,

매해 이맘때가 되면 울적한 마음

그리고 애틋한 그리움으로

여전히 아프게만 만든다.


이럴 때 작가의 아픔을 읽어 내려가는 것이

어쩌면 그때의 슬픔을 다시 살리는듯해

두려운 마음이 앞서기도 했지만,

그래도 다시 '삶'을 이어간 작가의 글에

무언가 답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펼쳐보았던 것도 사실이다.


사고 든, 어떤 이유로든 가족을 잃게 되면

어째서인지 그 원인이랄까

원망의 대상을 찾게만 된다.


작가에게는 그토록 열심히 믿었던 신이

그 대상이 되었고,

우리 역시 '신이 있다면 이럴 리가 없다'라며

죄 없는 아까운 생명을 앗아간

신을 욕하고 원망하는 시간을 보냈다.


자꾸 생각한다고 해서 시간이 돌려지는 것도,

떠난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원인이 나에게,

죄가 있는 나 때문에 벌로 내려진 걸까 봐

애써 신을 탓하곤 했었는데


수없이 무너졌다가 정신줄을 붙잡고,

그 와중에 신을 원망했던

작가의 몸부림은 체면이며 사회적 지위

그 모든 것을 떠나 원초적으로

그저 한 사람의 엄마로서 분노했던

인간 박완서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했다.


수없이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들,

분명 애써 마음을 전했을 것인데도

그 무엇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에 와닿지 않았었다.


진심이었을 텐데도 값싼 동정처럼,

그 이면에는 '나의 불행'을 보며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고 안도했겠지,

남아있는 내 가족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번 다짐했겠지

그런 비뚤어진 생각을 갖기도 했었고,

살기 위해 음식을 입에 넣었지만

'더 이상 좋을 일이 뭐가 있다고'

살아가야 할 남은 날들이

불필요하게 길게만 느껴졌던 날이었다.


나름대로 착하게 살아왔는데

'왜 하필 우리 아이에게 이런 일이'라는

마음은 정답이 없는 문제의 답을 찾듯

스스로에게 끝없이 던지던 질문 역시

작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많이 공감되었던 대목이었는데,


언덕 집에서 만난 한 수녀님의

'왜 내 동생이라고 저러면 안 되나?'라는

생각의 전환이 그러했듯


그럼 내가 아니면 다른 누구라면

그래도 된다는 걸까 생각해 보면

그 역시 내 입장에서의

이기적인 마음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그런 일은

'나에게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고

그런 일이 일어나도 괜찮은 사람은 없다,

고로 나에게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당연한 것은 없다는 메시지는

조금은 이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을

누르게 만들어주지 않았나 싶다.


참척의 고통은 영원히 이어질 것 같지만

흐르지 않을 것 같은 시간도

결국에는 흐르기 마련이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어서

그래서 살 수 있다고 했던 누군가의 말처럼

작가도 어느덧 언덕방의 일상 속에서

때로는 딸과 사위, 그리고 손주들을 통해

잠깐의 즐거움을 느끼기도 하고


배고픔을 느끼는 스스로에게

수치심에 창피하기도 했지만

점점 다시 '삶'에 가까워지는,

원래의 일상을 되찾아가는

자연스러운 회복의 결과를 마주하게 되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는 순간을 꼽아보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장실에도 가고 싶은

원초적인 본능을 느낄 때라는 점이다.


그런 자신의 수치감을 인정하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밥이 되어라'라는 말을 읽으며

자신에게 사실은 '밥'으로 찾아온

하느님을 마주했다는 인정을 한

작가의 솔직함은 인간적이기도,

다시 세상을 사랑하게 된 계기가 되어

다행스러운 포인트였다.


산 사람은 살게 되어 있다고,

결국에는 사람은 삶을 이어간다.

우리 가족 역시 11년의 시간을 보냈고

때로 그 아이를 생각하며

여전히 슬프며 아프기도 하지만

대체로 우리의 매일은 즐겁고 행복하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마음에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은 없다.

작가 역시 다시 세상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마음을 부끄럽지만

구태여 숨기지는 않겠노라 고백했다.


이렇게 그를 다시 삶으로 이끌어

밥이 되게 하고 글을 쓰게 한

언덕 집에서의 시간처럼,

붙잡고 싶어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와 우리 가족 역시 다시 살아냈고,

지금도 매일을 보낸다.


책을 펼치며 다시금 고통의 시간을

곱씹어 생각하긴 했지만,

애틋함과 그리움은 남기고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하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마음은 많이 가라앉아

제법 흐릿해진 것 같다.


신에게 당신이 존재한다면

한 말씀만 해보라며 으름장을 놓던 작가가

배고픔을 느끼며 비빔밥을 맛나게 먹고

다시 글을 쓰며 일상을 찾았듯,

이 글들이 누군가에겐 '밥'이 되어

다시 하루를 살아낼 힘을 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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