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망 1
박완서 지음 / 민음사 / 2024년 8월
평점 :




이르지 않은 나이에 입문한 작가 생활임에도
생애 동안 남긴 수많은 주옥같은 작품들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박완서 작가,
그녀가 쓴 유일한 역사소설이자 대작인
미망을 새로이 개정해 방언과 입말,
소설에 쓰인 한자어와 일본어, 숙어 등의
표현을 풀어내 더욱 이해하기 쉽도록
민음사에서 새로이 출간되어
감사한 기회에 읽어보게 되었다.
미망은 작가의 고향인 개성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자신이 만들어 낸 인물들을 통해
그리운 고향의 산하를 거침없이 누비고,
운명과 싸워 흥망과 울고 웃는 삶의 모습을
풀어내고 싶다고 고백했는데,
개성 지방의 물과 흙으로 키워낸 인삼농사와
조선 말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쳐
분단에 이르기까지 전씨가 사람들을 통해
한반도의 역사와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녹여낸 대작이다.
대한민국 이전의 조선,
그 이전의 고려 시절부터 맥을 이어온
역사와 경제, 구시대의 가족과 그 이후로
시대를 거듭하며 변해가는 시대에 대한
통찰이 담겨있기도 한데,
역사의 큰 줄기를 관통해가는 과정 속
작가 특유의 여성주의적 관점,
서정적인 시선으로 담아낸
인물에 대한 냉철하고 가식 없는 평가와
욕망에 가차없는 판단이 빛을 발하는
부분들이 넘겨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개인적인 고통 속에서 집필했음에도
결연하고 전진하는 듯한 단단한 힘이 서린
문장과 전씨일가의 삶을 통해서
인생에 대한 참 맛을 깨우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 책의 시작은 신분제가 들썩이던 시절,
비범한 상업 감각으로 인삼 농사와 장사를 통해
집안에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해
자수성가한 전처만 영감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지금이야 넉넉한 부를 가지고 있으니
세상 두려울 게 없어 보이는 전처만이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평탄치만은 않았다.
서만의 아버지는 등짐장수로 번 돈을
청국이나 왜국과 밀무역했다는 오해를 받아
동네 양반집 이생원에게 문초를 당하게 되고,
이를 지켜보던 어린 서만이 대들어
진노한 이생원이 '눈을 뽑겠다'라며 달려들자
아버지는 스스로 눈을 쑤시며
한쪽 눈을 잃은 대가로 아들을 지킨다.
이때부터 서만은 동네를 떠나 전국을 돌며
장사를 시작하고 종국엔 큰돈을 들고
고향으로 돌아와 거부가 된 것이다.
샛골에는 그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그곳의 삼포는 거의 그의 것과 진배없었기에
일명 개성 제일가는 상인이 되었다.
그는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으나
장남은 일찍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딸인 태임 하나만 낳은 채 세상을 떠나고,
다른 아들과 손자들이 있음에도
일찍이 세상을 떠난 첫째 아들의 여식인
손녀 태임에게 유난히 애틋하게 아낀다.
무어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장사꾼으로서의 촉이 좋았던 그는
팔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느낀
개화의 바람을 눈치채고는
이 변화에 걸 맞춰 손녀 태임을
지금껏 자신의 어머니가, 그리고 아내가,
또 며느리나 이 세상 여자들이 살아온 것과는
다른 삶으로 이끌고 싶다는 소망으로
애정을 담아 키워왔다.
그러나 그런 평온한 나날들도 잠시,
아들의 집에서 사환으로 일하는 청년
종상의 얼굴에서
어린 시절 그를 두렵게 하고
집안에 아픈 상처를 가져다준
이생원을 떠올리게 하고,
그가 이생원의 손자라는 것을 알게 되자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다.
운명의 뜻인지
이생원 댁과 얽히게 된 전처만은,
가세가 기울었다는 이생원 댁의 손자인 종상을
자신의 첩인 해주댁의
집에 머슴으로 보내게 되고
삼포의 인삼(전처만의 인삼)을
일본인들에게 불법으로 넘기려 한 걸
혼자 쫓아서 관아에 신고했으나
되려 거꾸로 벌을 받아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게 된 종상을 보고
보호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한편,
전처만과 마찬가지로 그를 신경 쓰고
챙기는 손녀 태임을 보며
어떤 면에서는 어떻게든 종상을 집에서 쫓아
내고 싶다는 걱정에 빠지게 되는데……
짜임새 있는 각 인물들의 서사,
천서만의 어린 시절과 이생원 댁과의
끈질긴 악연이 담긴 이야기는 물론
충분히 성공한 삶을 이루었으나
마음에 차지 않는 남은 두 아들보다
더 애정하고 잘 키워내고 싶은 건
먼저 떠난 장남의 여식인 태임뿐이다.
친우의 딸을 며느리로 들이고 싶은 마음에
병이 든 것을 숨긴 채 혼사를 고집해
이렇게 벌을 받는 건가 자책하기도 하는
천서만은 마냥 계산적이지도,
혹은 요즘식 표현으로 꼰대스럽지 않은
깨어있는 시선을 가지고 있어
그가 태임을 바라보는 애정 어린 눈빛,
당시였으면 큰 죄인 외간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진 며느리를 포용하고
그 아이마저 어여삐 여기는 그의 마음은
반드시 복수하고 또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악이 가득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
성공해 모든 것을 쥐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쓸쓸하고 외로운
그의 삶 전체를 엿볼 수 있어 인생에 대한,
시대의 변화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엿볼 수 있어 좋기도 했고
그의 애정 아래 자라 티 없이 단단한 태임이
변화의 물결 속에서 공부에 대한 욕구,
신분을 떠나 종상에 대한 신뢰나 애정을
숨기지 않는 모습 역시도
굉장히 놀라운 발전이 아니었나 싶다.
전처만과 머릿방아씨 모두 세상을 떠나고
종상과 태임의 새로운 발걸음을 기약하며
1권이 마무리되는데,
2권을 통해 새롭게 펼쳐지는 시대의 변화 속
그들의 신식공부는,
또 혁명과 개화에 전씨 일가는
어떤 모습을 가지게 될지 궁금한 마음이다.
전처만의 아버지 대부터 시작해
몇 대를 이어 이어지는 그 서사와
각 인물들의 성격, 연결고리 등을
하나하나 만들어낸 박완서 작가의
깊이 있고 놀라운 필력에 감동하게 된 독서였다.
태임과 종상은 오히려 안되기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사랑을 하게 될까,
그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은
어떤 모습이며 또 다른 어려움을 없을까
얼른 다음 책을 찾아 펼쳐봐야겠다.
한 사람뿐 만 아니라
한 집안의, 여러 세대의, 우리나라의 역사의
긴 시간을 이어 한반도의 삶을 담아온
작가의 이야기는 정말 오래도록
앞으로도 울림 있는 메시지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