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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행복 - 가장 알맞은 시절에 건네는 스물네 번의 다정한 안부
김신지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4월
평점 :
품절




한 달 가까이 이어지는 열대야로
유독 더운 여름을 보내고 있는 올해,
인터넷에서는 '처서 매직'을 기다린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일 년을 네 개의 계절이 아닌
스물네 개로 잘게 쪼갠 단위의 절기 중
14번째 절기인 처서와
마법을 뜻하는 magic을 합친 말로,
처서가 지나면 아무리 기승을 부리는 무더위라도
마법처럼 한풀 꺾이며 시원해진다는 뜻이다.
너무 더운 날이 이어지다 보니,
살아오며 몸으로 겪고 느낀
'처서가 지나면 시원해진다'라는 사실을 떠올려
어서 처서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마음은
동질감에 피식 웃게 되기도,
그만큼 길게 이어지는 여름이 실감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기도 한다.
30대의 끝자락에 다다른 나는
할머니나 엄마 아빠를 통해 절기를 듣기도
또 절기마다 챙기는 다양한 음식이나
유래를 들으며 익숙하지만,
요즘처럼 바삐 살아가는 세상 속
일 년을 네 계절도 아니고 스물네 개로 쪼갠
절기는 잊히기 마련이라
이렇게 많은 이들이 찾는 '처서 매직'의 유행,
그리고 '처서 매직의 뜻'을 검색창에 두드려보는
요즘이들의 모습이 어떤 면에서는 반갑기도 하다.
네 가지의 뚜렷한 기후 특징을 나타내는
사계절을 가진 우리나라.
요즘은 우스갯소리로 여름과 겨울이 길어져
더위와 추위만 남은 것 같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옛 조상들은 매년 나오는 달력 없이도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동식물과
기후의 변화에서 계절을 짐작했다고 한다.
봄의 시작을 의미하는 입춘,
비가 내리고 싹이 트는 우수,
개구리가 잠에서 깬다는 경칩,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춘분,
봄 농사를 준비하는 청명,
농사비가 내리는 곡우
여름의 시작인 입하,
본격적인 농사의 시작인 소만,
씨뿌리기 좋은 망종,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하지,
여름 더위의 시작을 의미하는 소서,
더위가 가장 심한 때인 대서
가을의 시작인 입추,
일교차가 커지는 처서,
이슬이 내리기 시작하는 백로,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추분,
찬 이슬이 내리는 한로,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상강
겨울의 시작인 입동,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소설,
겨울 큰 눈이 오는 대설,
밤이 연중 가장 긴 때인 동지,
겨울 중 가장 추운 때를 의미하는 소한,
겨울 큰 추위를 뜻하는 대한까지
한 단어로 짧게 정의되는 네 계절의 시간을
잘개 쪼개서 24개로 작은 계절을 만들고,
이를 기념하고 챙기며 좀 더 충만하고
깊이 있는 매일을 보내온 것이다.
이 책은 이 스물네 개의
절기를 따라 일 년을 보내며
작가가 그러모은
자잘하게 쪼갠 작은 계절변화 속 행복,
해마다 설레며 기다리게 되는 작가만의
연례행사를 소개하며
'가장 알맞은 시절'을 쉬이 흘려보내며
매일이 바쁜 우리에게 다정한 안부를 전한다.
조금은 촌스럽거나 예스러울 수도 있고,
매일을 보내기에도 바쁜 때에
스물네 개의 작은 계절들을 곱씹으며
여유를 부릴 새가 어디 있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맘때면 꽃에 새 순이 올라왔었지,
이맘때면 일 년 중 가장 낮이 길지,
이맘때면 '덥다' 소리가 들어갔는데,
이맘때는 얼음이 얼었지 하는
세밀한 계절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시간을 거듭해도 착실하게 지켜오는
해의 '약속'을 확인하는 일은
효율이나 가치를 따지기에 앞서
얼마나 낭만적인가 싶어
그녀가 곱씹은 계절의 묘미를
글로써나마 잠시 시간을 멈춰 맛보았고
기록해두지 않으면 그냥 흘려보내기 쉬운
작은 변화를 기념하며
그때에만 만끽할 수 있는 재미와 즐거움을
찾아서 즐길 줄 아는 여유는
너무 급하게만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마음인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저 '왜 이렇게 더운 거야?' 하고
투덜거리며 선풍기나 에어컨을 틀기보다는
'오늘은 염소 뿔이 녹을 정도의 더위래'
혹은 '다음 주면 시원해질 거야'하며
계절 속에 담긴 의미를 찾아보기도 하고
마냥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 같은 내일이 이어지는 것 같겠지만
조금씩 계절은 약속한 시간을 향해
흘러갈 것이기 때문에
지금 '순간'의 소중함에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인생의 수많은 매일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지혜이지 않을까 싶다.
할머니가 때때마다 찾아와서 챙겨주던
부럼이나 정성스레 몇 시간씩 끓이던 팥죽,
'이걸 먹어야 액운이 떨어지는 거야'
하는 소리에 한 숟가락 먹고 나면
조금은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떡국이나 삼계탕 남짓으로 간단해졌지만
우리 일상에 여전히 남아있는
각각의 의미가 담긴 절기음식까지
'제때 알맞게 찾아온 제철 행복'을 만끽했던
지난날의 추억들을 생각해 보면
순간순간의 시간이 참으로 다채롭고
새로운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이를 여전히 꾸준하게 곱씹으며
자연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제철의 행복을 놓치지 않는
작가의 스물네 계절을 함께 곱씹으며,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의 손에 가닿을 수 있는
앞으로 다가올 스물네 번의 제철 행복으로
나 역시 매일을 꽉 채우고 싶다는 마음이다.
책 속 절기에 담긴 제철 행복들을 따라
작가가 충만하게 느낀 즐거움을 읽다 보니
멀리 있는 행복을 좇느라
가까이 손에 잡히는 계절이 건네주는
소소한 행복을 놓친 채
잿빛 매일을 보내고 있던 건 아닐까
문득 지나쳐버린 올해의 절반이 아까워진다.
하지만 아직 올해의 가장 알맞은,
제철의 행복이 절반 가까이 남아있으니
처서 매직만을 기다리며
여름을 쫓고 싶은 마음을 가지기보다는
작가가 내준 제철 숙제들을 챙기며
지금이 아니면 만끽할 수 없는
작은 계절의 즐거움들을 찾고
나의 매일을 행복한 순간으로
이끌어야겠다는 다짐이 든다.
많은 것을 가지지 않고도
그저 자연이 내어주는 계절 속 행복만으로
배불리 먹고 즐기며 소박한 하루를 채워간
옛 조상들의 시간을 본받아
차곡차곡 다정한 안부를 챙길 줄 아는
따스한 사람이 되어
타인에게도, 또 스스로에게도
지금 이 계절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미루지 말고 챙겨야 할 기쁨에
어떤 것이 있는지 살피면서 지내는,
그리하여 해마다 스물네 번의 설레는
행복한 기다림을 가진 나를 마주하고 싶다.
덕분에 '별일 없이 비슷한 매일'이
행복해질 기회가 스물네 번이나 찾아온다는
확실한 약속으로 특별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