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비실
이미예 지음 / 한끼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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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딱딱하고 건조한 사무실의 공기 속,

잠시 긴장을 풀고 '진짜 나'를

잠시 꺼내어 볼 수 있는 공간이

탕비실이라는 점에 공감할 것이다.


커피나 차 한 잔을 타러,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간식을 꺼내거나

사용한 컵을 잠시 닦기도 하며

조금은 풀어진 마음으로 있을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럿이 같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보니

때로는 이곳에서 타인과 부딪치며

불쾌감을 느끼곤 한다.


공용 얼음 틀에 커피나 콜라를 얼리는 사람,

인기 있는 커피믹스를 몽땅 혼자 챙겨가는 사람,

전자레인지 코드를 뽑고 충전하는 사람도

싱크대에 안 씻은 개인 텀블러나 컵을

몇 개씩 늘어놓는 사람도 있다.


그뿐 만인가.

자기가 사용한 종이컵을 버리지 않고

물통 옆에 그냥 쌓아두고 가는 이도,

탕비실이 대나무 숲인 양 온종일 그곳에서

중얼중얼 떠드는 사람은 물론,

가뜩이나 좁은 냉장고에 케이크 박스를

몇 개씩 넣어두고 손도 대지 않거나

싱크대에서 가글 하는 사람까지

탕비실 빌런들은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어딜 가나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은 위에 나열된 각자의 이유로

같이 일하는 동료들로부터

'함께 탕비실을 쓰기 싫은 사람'으로 뽑힌

이들이 7일간의 합숙 리얼리티 쇼에

섭외되어 벌어지는 이야기로,


다른 사람들의 이유에 비하면

나를 '고작 그런 이유로 추천했단 말이지'하며

탕비실 빌런들 사이에 숨어있는

술래를 찾으면 상금을 얻는 게임에서

오직 내가 뽑힌 구체적인 이유를 알기 위해

촬영에 임하게 되는

'탕비실 얼음 빌런'의 관점에서 진행된다.


마치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할 법한 프로그램을

연상시키는 이 소설의 설정과 등장인물은

실제로 일상에서 만날법하기에

친숙하면서도 흥미롭게 느껴지는 시작이었다.


과연 이들 중 술래는 누구일까?

어떤 사람의 탕비실 행위가 더 불편하고

싫은가를 따지며 재미있게 쫓다 보니,


이상한 사람들만 모아둔 듯한 그들의 면면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각자의 입장에서는

'나는 정상'이지만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이상한' 느낌으로 느껴지는 상황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정상과 평균의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모습도 누군가에게는 이상하고 불쾌한

'빌런'의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냥 웃을 수만은 없게 되기도 했다.


그런 감정을 깨닫게 되는 것은

책을 읽는 나만의 감정은 아니었다.

등장인물인 '얼음' 역시

자신이 친절이나 배려라고 생각했던 행동이

동료들은 더없이 불쾌하고 오싹한 소름으로

전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이야기의 흐름은 그때부터 다른 방향으로 흘러

더 이상 '술래'를 쫓는 본래의 게임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나에 대해 타인이 잘못 알고 있거나

혹은 오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의 진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라며 서운한 감정을 쏟아내고는 있지만,


정작 나 역시 타인의 진심이나 의도를

이해하려고 제대로 애써본 적도 없이

그저 '보이는 그 순간의 모습'을

그 사람의 전부인 양 오해하며

타인을 쉽게 평가하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반성의 마음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런 깨달음의 뒤에서야

각각의 인물들을 다시금 제대로 되돌아보며

온통 이상한 사람투성이인 것 같았던

합숙 리얼리티쇼의 참가자들은

사실은 각자의 입장과 시선에서 바라보면

어느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사람들뿐이다.


우리가 미처 들여다보려 애쓰지 않았던

타인의 진짜 모습을 외면한 채

편집자의 시선처럼

'보고 싶었던 모습만 보고'

누군가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만 보는'

시선으로 바라보았기에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 중

'누가 가장 싫은가?'에만 초점을 맞춰

그 사람에 대해 더 알아보려 한 적이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그램이 종료되고 난 뒤

달리는 수많은 댓글 가운데,

그들 중 '술래'로 밝혀진 사람 역시

누군가에게는 '빌런'으로 비췄다는 결말은


과연 '정상'과 '빌런'이라는 기준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나는 타인에게 싫은 사람,

이상하고 불쾌한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망설이고 고민하게 만들었다.


한창 이슈가 되었던 프로그램인

'나는 SOLO'의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보며

어쩜 이런 사람들만 모아놓았나 싶을 만큼

'역대급 빌런'이라며 쉽게 웃음 짓거나

혹은 비난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타인의 행동과

그를 비판하고 판단 내리는 그들의 모습도

타인의 시선 아래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 속 작은 공간인 탕비실에서

우리 모두의 현실을 보았고,

또 나의 비뚤어진 시선을 보았다.

정말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이야기를 담아낸

하이퍼리얼리즘의 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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