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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자의 사전
구구.서해인 지음 / 유유히 / 2024년 6월
평점 :




회사에 소속되어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는
직장인으로 일할 때에는 내가 담당하는 일과
업무가 명확하게 존재했었다.
디자이너로 일한 시간도 있었고
프로모션 기획자나 온사이트 마케터로서
각 직무에 맡는 역할을 해내는
충실한 톱니바퀴 역할을 해내는 한 명이었다.
그러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 언니와 함께
사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누군가
"혹시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난감할 때가 많았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사업이지만
기획도 디자인도 상품개발도 하고
마케팅이나 물류(택배 포장)까지
어느 하나 내 손이 닿지 않은 일이 없으니
과연 내 일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애매한 미소로 한 단어로 말하지 못한 채
구구절절하게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이던
지난날의 시간이 문득 떠올랐는데,
'당장 수익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작업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 가능하며,
조직에 속해 있더라도 조직 바깥에서
자신의 일을 만들어가는 사람'을
작업자라 명명한 이 책의 서두를 보며
진작 이 책 《작업자의 사전》이 있었더라면
보다 내 일과 노동을 설명하는데
수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독서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구구와
대중문화 뉴스레터 발행자인 서해인이 써 내려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작업자'들의
노동에서 길어올린 100가지 단어에
덧붙이는 풀이를 담아내었다.
나 역시 직장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관습처럼 사용하는 '단어'인데,
정확하게 의미하는 바를 몰라
혼자 쩔쩔매며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기에는 조금 난감하고,
검색창에 아무리 두드려봐도
사전적인 의미와는 뉘앙스가 다른
그 단어들의 뜻을 이해하고 비로소
사용하게 되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기억이 난다.
꼭 비단 조직 내에서만
이런 단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조직 밖에서 일하는 작업자인 그녀들도
우리에게 꼭 맞는 일의 언어가
필요했다고 책을 통해 이야기했다.
일하며 자주 마주치게 되는 단어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고,
각자의 일의 형태가 제각각인데도
그것을 설명하는 단어가 동일해서 오는
혼선과 오해가 자주 발생했기에
이런 문제들 앞에 느껴지는
막막함과 답답함을 해결하고자
의기투합해 이 책을 펴낸 것이다.
그녀들이 수집한 100개의 단어를 쫓아
작업자가 생각하는 의미와 풀이를 읽다 보니
단순히 단어의 의미뿐 만 아니라
자연스레 그들의 일상과 노동을
마주할 수 있었는데,
과중한 업무로 인해 잃어버린 생체리듬이나
수도 없이 맞춰놓은 모닝콜,
주말 밤낮없이 일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1인 사업자의 고충이나
남들 눈에는 '백수'로 보이는 짠한 현실은 물론
비용이나 수정요청과 같이
'수익'과 연결되는 애환부터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나에게서 끝나지 않는
평판처럼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콘텐츠가 되는 세상에서
작업자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누군가의 날 것의 노력과 시간이 보여
안타까움과 동시에
공감과 응원의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일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본인이 져야 하는 책임감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직업을 널리 알리고
지속 가능하게 삶을 꾸려가기 위해 애쓴
매일의 애환이 담긴 이 사전은
때로는 '마냥 놀기만 하는 백수'로
비치며 오해되기 쉬운
작업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변화를 가져다주는 씨앗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든다.
노동의 과정에서 마주하는
강박이나 예상치 못한 변수, 고충을 비롯해
책임감이나 의무감도 이야기하며,
'내 일의 고됨'뿐 만 아니라
다른 작업자에게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잔잔한 위로와 응원의 마음은
일의 종류는 다르지만 또 다른 작업자로서
살아가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래 맞아, 하고 그들이 풀이해놓은 단어에
내 마음속에 담긴 뜻 한자락을
함께 보태가며 읽었다.
이렇게 나와 같은 마음으로 임하고 일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안도감,
각자의 자리에서 애쓰고 있다는 것을
서로 알아주고 그런 서로의 존재에 기대어
앞으로 또 내디뎌 보는 한 걸음은
혼자 외롭게 달려가는 느낌이 아니라
든든하기만 하다.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를 사랑하기 위해,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정확하고 단호한
'일의 말'을 찾는 그녀들의 글은
내가 서있는 지점을 다시금 짚어보고
어떤 마음과 기준으로 일을 바라볼 것인가
앞으로의 나를 정의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독서였다.
마음속 사전에 담긴 빈칸의 단어들을 찾아
하나씩 제대로 나만의 풀이를 더하며
매일을 살아가는 '작업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