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변기의 역학 TURN 3
설재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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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방 한 칸짜리 집을 얻으려 해도

월세며 전세 금액이 어마어마한 요즘 시대에

국가에서 진행하는 청년 임대주택 사업은

참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세에 비해 한참은 저렴한 금액의 보증금에

월마다 약간의 월세만 내면

최장 거주 기간 10년 동안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짜릿한 행복인지 모른다.

안 그러면 다달이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집세와

생활비로 인해 손에 쥔 돈을 고스란히

쏟아부어야 하는 현실에 쫓기게 되니 말이다.


책 속 주인공인 아정도 마찬가지이다.

바닥을 자주 드러내는 잔고를 가진 소설가로,

30대 후반이지만 크게 모아둔 돈도 없고

그렇기에 가족들 사이에서도 늘 떳떳하지 못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행운이 찾아온다.

중위소득 100퍼센트 이하의 청년에게만 주어지는

청년 주택 지원 사업에 당첨되어

투룸의 신축빌라에 입주하게 된 것.


번듯한 직장인이 아니라

'정상 사회인'으로 자립하기엔

벼랑 끝에 서있는 것 같았던 아정은

비로소 인생 그 어떤 시기에도 없던

여유롭고 자유로운 삶을 만끽할 기대에 부푼다.


행복도 잠시, 그녀의 집에 문제가 발생한다.

아무도 없는 새벽 우르릉 소리를 내며 내려가는

변기 물소리를 듣게 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변기 문제는

고여진 물이 말라 심한 악취가 풍기는

봉수 파괴 현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원센터에 요청하지만

무책임한 공무원은 아정의 문제를 외면하고,

연간 시행되는 자체 평가에 의해

불량 입주자로 평가되면 퇴거된다는 원칙이 있기에

혹여나 밉보여 집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비참함을 꾸역꾸역 참으며 직접 윗집 입주자

이상기와 문제를 해결하려 나선다.


위층 세대에서

계속 변기에 무언가를 버려 배수관이 막혀

봉수 파괴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아무리 찾아가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윗집을 추적하던 중,

그가 등록된 세대원만 거주할 수 있다는

규칙을 어기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변기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자

이 사실을 빌미로 불법 거주자인

그의 어머니를 직접 붙잡고 대화를 시도하고,

윗집 거주자인 이상기와 가까워지며

노인의 소름 끼치는 비밀과 상기가 근무하는

회사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는데……


한겨레출판과 리디가 손잡고 론칭한

장르소설 TURN 시리즈의 세 번째 이야기인

《그 변기의 역학》은 현실 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청년 임대주택을 배경으로

현실감 있고 공감 있는 소재를 담아

이야기에 더 쉽게 몰입하게 되었다.


나이는 먹었지만 충분히 자립하지 못하는

청년 아정의 모습,

딸에 대한 솔직하고도 기이한 가치관을 가져

감정 쓰레기통처럼 온갖 소리를 쏟아내거나

그녀를 옥죄는 엄마의 에너지는 물론

상기의 추천으로 입사한 회사에서 마주한

따뜻한 것 같지만 묘하게 냉기가 흐르는

개인적이고 냉소적인 직원들의 대화나

무책임한 지원센터 공무원의 무심함까지


작가가 펼쳐낸 상상력의 세계이지만

이 현실과 아정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게 해

감정을 더욱 이입하게 하였는데,


그렇기에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쳐 방을 차지한

엄마로 인해 흔들리게 된

'자유롭고 여유로운 1인 가구의 삶'을 되찾기 위해

아정이 홀린 듯 선택하게 되는 '그 행위'가

굉장히 자극적이고 반인륜적인 금기임에도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게 만드는 탄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랫집, 윗집과의 인간관계,

엄마와 함께 산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집에서 내쫓기게 된다는 공권력의 두려움,

당장 이만큼의 돈을 줄 수 있는 회사도 없으며

이곳을 나가면 다시 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벼랑 끝의 상황과 그녀를 아쉽게 만드는 돈은

그녀를 한계까지 내몰아 어쩔 수 없이

그 행위를 선택하게끔 만든 것 같아

서럽고 안쓰럽게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도대체 어떻게 자기 엄마에게 이럴 수 있지?'

하고 이해가 가지 않던 윗집 이상기의 행동을

똑같이 반복하게 되는 아정의 모습은

'내가 마주한 고통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몸부림치고

버둥거리는' 나름 삶에 대한 발악으로도 보여

공포가 아닌 애잔함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래서 윗집 이상기와 아정의 행동은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금기임에도

어느 순간 자연스레 그들의 편에 서서

'어떤 형태로든 그들의 삶에 평화가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해주었고,


그 행위를 하면서 느끼는 마음속 망설임으로

결국에는 멈추기로 한 상기와

그럼에도 앞으로 더 나아가기를 선택한 아정

그 누구의 옳고 그름을 따질 수도

또 비난할 수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변기에 버린 무언가가 뭉쳐

나타나게 된 크리처는

소름 끼치는 두려움과 공포의 느낌보다는

상기와 아정 마음속에 담겨있는 본질적인 고민과

마음을 마주하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매개체로

이들을 쫓아 전개되는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며

알 수 없게 쫄깃해지는 긴장감과 음침한 즐거움,

그런 마음 안에 담긴 찜찜한 가책과

많은 여운을 불러일으켰다.


이상기의 추천으로 회사에 입사하게 되지 않았더라도

아정은 다른 형태의 행위라도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렇게 처절한 상황까지 이어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내몰리는 그가 처한 현실이

어쩌면 더 씁쓸하고 잔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늪으로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음에도

더 나은 삶을 위해 어떻게든 조용하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아정이 되려 시간이 갈수록

더 큰 문제로, 감당할 수 없는 현실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게 되는 전개가


실존 불가능한 소재를 표현하고 상상해낸

판타지임에도 그 어떤 이야기보다 리얼리즘으로

다가온 독서였다.


책을 읽고는 자연스레 휴대폰을 들고

봉수 파괴 현상을 검색하는 스스로를 발견하며,

서늘하고도 서러운 인물들의 어긋난 관계와

통념의 허를 찌르는 이야기를 탄탄하게 만들어낸

작가의 놀라운 상상력에 새삼 감탄하게 되었다.


세대 간의 갈등, 현실의 청년문제부터 시작해

인간관계와 개인의 다양한 가치관까지

많은 부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뒷맛이 가득한 책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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