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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일기
권남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평점 :
처음 카페에 혼자 갔던 날이 기억이 난다.
집 근처의 멀지 않은 작은 회사에서
2년여를 근무하다가 더는 안되겠다 싶어
과감하게 사표를 던진 후
포부 있게 큰 물로 나가 구한 두 번째 직장은
역삼역 테헤란로 빌딩 숲 사이의
꽤나 이름있는 대기업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서류와 실기, 면접을 통과하고
드디어 첫 출근 일이 되었던 날,
혹여나 조금이라도 늦을까 걱정이 되어
약속된 시간보다 한 시간은 일찍 도착했고,
그렇다고 회사에 벌써 들어가기도 애매해
시간이 붕 떠버렸었다.
각자 자기 갈 길을 가기 바쁜 직장인들 사이,
어디에서 시간을 보낼까 하다가 찾은 게
바로 카페였다.
역삼역에는 한 빌딩에만 해도
몇 개의 카페가 있을 정도로
직장인들이 한가득이라
아침 시간에도 어찌나 사람이 붐비는지
'그들만의 세상에 들어온 낯선 침입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안에 들어가는 데만 해도 꽤 용기가 필요했다.
당시의 나는 커피를 입에도 대지 못했음에도
그저 '앉을 장소와 때울 시간'이 필요해서
마시지도 않을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과연 내가 이들 속에 어우러질 수 있을까' 하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눈을 돌리며
너무도 익숙한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기 바빴었다.
일본 문학계의 유명한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로도 이름을 알린 권남희 작가의
첫 스타벅스 '혼자 방문기'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눈치 없이 젊은 사람들 사이에 껴서
내가 일해도 되나? 하며 바짝 쫄았다니,
그때의 내가 떠올라 살포시 미소가 지어졌다.
직장이 멀어 독립한 딸,
지병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게 된 어머니,
세상을 떠난 반려견까지
갑작스레 '독립생활'을 하게 된 작가는
빈둥지증후군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덩그러니 앉아 하루를 보내는 날이 많았다고 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어느 날 문득 들른 스타벅스에서 느낀 편안함
그리고 타인과 어우러져 그들 속의 일부가 되는
그 경험은 '혼자'가 익숙지 않은 작가에게
다른 장르의 쾌적함과 안도감을 주었나 보다.
그렇게 방문한 매일이 쌓이고 쌓여
'오늘의 음료'와 함께 기록된 글 꼭지들이 모여
이렇게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카페에 가면 참 다양한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는 업무 미팅을 위해서,
혹은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담소를 나누기 위해서,
혼자서 공부나 업무를 하기 위해서,
그것도 아니면 잠시 들러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등
각자의 이유로 카페를 찾고 시간을 보낸다.
나 역시 카페에 가면
'내가 이곳에 방문한 목적'이
분명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처음 혼자 방문한 카페에서 주변을 관찰하듯,
주변의 사람들을 보며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에 빠지기도 하고
그들의 주문한 음료나 푸드를 보며
'저건 무슨 맛일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우연히 들른 스타벅스에서 2층 출입구로 들어와
얌체같이 집에서 챙겨온 텀블러 음료를 홀짝이며
가방 속에 있는 비닐봉지에 담긴 쓰레기를
스타벅스 휴지통에 버리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혼자 4인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콘센트에 노트북을 꽂고 집에서 가져온 음료로
'스타벅스에 온 기분'만 내는 사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고 '뭐 이런 무개념이'
싶은 생각이 들다가 퍼뜩
그런 그를 처음부터 관찰하고 있는 나도
매너 없기는 매한가지네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타인과 테이블 하나 건너로
같은 모양의 의자에 앉아 공간을 공유하고
엇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일상 속 풍경.
이만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나나 그이나 다를 것 하나 없는데
그 안에 각자의 이유와 하루가 담겨있다.
스타벅스에 앉아 음료 한 잔을 시켜둔 채
눈을 굴리며 옆 테이블의 혹은 저쪽 멀리 자리 잡고
열심히 무언가에 열중하는 누군가를 관찰하듯
소소한 일상 속 풍경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모습을 참 맛스럽게,
또 향기롭게 기록해둔 책이 아닌가 싶다.
만약 그녀가 스타벅스에서
혼자 덩그러니 앉아
뜨거운 커피가 다 식도록 눈알만 굴리며
눈치를 보던 그때의 나를 보았다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이야기로 책에 담았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늘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 좀 별로,
하고 생각했던 고정관념도 깰 수 있었고
누군가를 몰래 슬쩍 훔쳐본듯한
작은 에피소드들이 마음을 몽글몽글
포근한 느낌으로 즐거워진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스타벅스에 가고 싶어졌다.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