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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평점 :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개 한창 사춘기 시절에 그 고민을 하기 시작해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나의 정체성과 존재에 대해
깨닫고 중심을 잡게 될 거라는 기대를 하며
살아가게 되는 데,
막상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같은 고민을 계속 이어가게 될 때도 많다.
이런 고민이 들 때면
매일같이 똑같은 일상 속 배경을 벗어나
저 멀리 떠나 내 인생을 바라보면
조금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기도 하고
실제로 그런 시간들을 통해,
낯선 시간과 장소 속 이방인이 된 나를 통해
약간씩 성장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 책은 바로 '자기 자신을 떠나서야
비로소 진짜 자기 자신을 찾게 된
한 사람의 여정'을 담아낸 이야기로,
겉으로는 평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20대 청년 틸러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이 속한 곳에,
심지어 가정에서조차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채
어디에서도 감정적인 애착이나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중국계 미국인 사업가이자
거대 제약회사 베이더가스의 실험실 화학자인
'퐁'을 만나게 되며 변화하게 된다.
틸러는 자신과 달리 부유하고 지적이며
모든 면에서 노련한 퐁에게 순식간에 매료된다.
그는 퐁에 대해 잘 몰랐지만
그의 말투와 움직임에 존재하는
충실함과 태도에서 확신을 느끼고는
자기 자신을 그냥 넘겨주고 싶다는 생각에까지
사로잡히게 된다.
삶으로부터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삶 속으로 사라지고 싶은 마음으로.
퐁 또한 틸러에게 미묘한 유대감을 느낀다.
그는 틸러에게 존재하는 절박함과 일종의 허기를
스스로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던지며
그에게 함께 해외 투자여행에 동행하기를 제안한다.
자신의 초라한 현실, 어디에서 속하지 못해
둥 떠있는 것처럼 느껴져
현실이지만 현실을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던 틸러는
큰 고민 없이 퐁의 조수로 그 여행에 따라나선다.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른 채
파도를 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바다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사람처럼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면서 말이다.
퐁과 함께 하와이를 거쳐 중국, 마카오, 홍콩 등
동아시아의 다양한 무역도시들을 이동해가며
그들의 긴 여정이 이어지고
낯선 장소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틸러는
젊음이 가져다주는 특유의 고뇌와 혼란,
시공간적 경계를 허무는 자유로움의
요정을 모두 보여주며 이야기가 이어진다.
책의 시점은 계속 널뛰듯 오가면서
주인공인 틸러의 시선으로 표현되는데,
사건들은 현실인지 그저 그의 상상인지 헷갈릴 정도로
굉장히 독특한 시점 이동과 문체여서
신선하게도, 복잡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틸러가 보낸 타국에서의 일 년이라는 시간이
그의 인생을 통째로 뒤흔들어 성장하고
바뀌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낯선 경험이 그의 세상을 변화하기엔 미미하고
그런 경험을 통해 스스로가 우리 자신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없다고 하지만,
틸러가 퐁에게 얻었던 칼을 간직하고 있다가
밸의 행위를 막기 위해 전깃줄을 끊어낸 것처럼
그때 얻은 칼 같은 것(경험)을 간직하다 보면
언젠가 우리가 결정적인 행동을 해야 할 때는
그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칼이라는 도구가 아닌
칼을 손에 쥐고 긋겠다는 결단을 할 수 있다는
'성장'시키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이야기의 진행과정에서
자기 자신과 가정, 그 어디에서도 쉽게
뿌리내리지 못하던 틸러가
아무 의심 없이 너무도 쉽게
퐁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기하다 싶기도 했고,
어쩌면 그 여정이 너무도 무모한 것 같아
틸러라는 인물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많았다.
그가 그 여정들을 통해 대단하게 의미 있는
성장과 발전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워서
누군가에게는 씁쓸한 마음이 남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저 휩쓸리듯 이리저리 부유하다가
기존의 삶과 다른 또 어떤 삶에
갑자기 떨어져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결말이지만
그래도 그런 과정들을 통해 틸러가
자기 내면의 불안을 직면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고자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정도의 성장 또한
의미 있는 발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렇게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를 내던져
헤매고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결국엔 '나'를 찾기 위해 무한히 나아가는
틸러의 도전만큼은
아직 30대이지만 많은 것을 망설이고
여전히 부유하는 삶을 사는 나에게는
많은 자극과 울림을 주는 성장소설이었다.
각 장면을 설명하기 위한 서사와
수많은 등장인물, 그리고 여러 나라를 오가며
언급되는 다양한 문화권의 배경으로 인해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이 자체도 '낯선' 세계에 나를 던져
당혹스러운 틸러의 감정선이라 생각하니
나 역시 완벽한 '이방인'이 되어
책을 읽는 동안 그와 같이
'타국에서의 일 년'을 함께 겪은 느낌이다.
한 번에 그 의미와 뜻을 모두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기에 시간을 두고,
다시 한번 또 한 번 그렇게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두렵지만 내디뎌 보는 한 걸음처럼
어렵지만 놓을 수 없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