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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나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2
이주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8월
평점 :
#어느날의나 #이주란작가님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괜찮다, 말해 주네.”(p. 9)
소설의 첫 문장이다. 이야기는 주인공 유리가 언니의 방문에서 떨어진 포스트잇을 줍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누구일까. 누가 언니에게 괜찮다고 말해 준 걸까. 누구인지는 몰라도 언니에게 그 말을 해 준 사람이 있다는 것에 유리는 안도한다. 소설은 유리의 독백으로 진행된다. 떠오르는 풍경들을 기억나는 대로 에피소드처럼 적어 놓았다. 유리는 사실 이 글이 “살기 위해”(p. 10) 쓰기 시작했던 거라고 미리 이야기한다. 죽지 않으려고 기록했던 기억들. 한 인물이 어떻게든 살아가 보려고 그러모았던 순간들을 엮은 것이, 이주란 작가님의 신작 『어느날의 나』였다.
“언니와 골목에서 헤어진 뒤에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이럴 때면 지나간 불행이 줄어드는 것 같다. 골목에, 정류장에, 버스에, 길가에 수많은 사람이 어딘가를 향해 걷는 것, 지나친 횡단보도의 신호가 깜빡일 때 누군가 다급히 건너는 것. 그가 안전하게 인도에 도착했을 때 혼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p. 47)
유리와 언니가 같이 산 지 1년이 되어 간다. 오랜 시간 동안 할머니의 간병을 했던 유리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혼자가 되었다. 언니는 가족에게 사랑받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다. 홀로 보내 온 시간이 길었어도 “혼자 있기가 어렵”(p. 102)게 느껴지는 밤이 있다. 그 밤이 얼마나 긴지 알고 있는 사람만이 타인의 밤을 알아차린다. 언니가 유리에게 따뜻한 밥과 국, 새 칫솔을 쥐어 준 것처럼. 유리가 언니에게 기꺼이 현관문을 열었던 것처럼.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건너 온 긴긴 밤에 대한 이야기는 인물들의 대화에서 조금씩 언급되는 기억이었고 그들이 이미 “지나쳐”(p. 89) 온 터널이었다. 무너질 것 같은 순간에 나를 끌어올리고 일으켜 세우는 것은 그런 사랑의 기억들이다. 그런 기억들이 있어 우리는 우리 안의 아픔을 응시할 수 있고 건너갈 수 있다. 그리고 소설은 그 ‘이후의’ 시간을 다룬다. 터널을 건너 온 유리가 자꾸만 시선을 두는 풍경과 귀를 기울이는 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시원하게 몸을 씻고 편안 옷으로 갈아입고 내 방에 누우면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되는 기분이다. 이 세상에 내가 있구나. 나라는 사람이 숨을 쉬고 있구나. 여러 모습으로 여러 마음으로 종일 말하고 움직이다가, 몸과 마음에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나인 채로, 나로 살아 있는 상태로 나 자신이 되고 내 세상이 되는 것.”(p 37)
무엇이 ‘나’를 ‘나’로 만드는 걸까. 지금까지 나는 내가 ‘만들어 내는’ 순간이 ‘나’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유리라는 사람이 ‘유리’라는 걸 알아가는 과정은 달랐다. 그런 순간뿐 아니라 유리가 ‘찾아보고’ ‘발견하는’ 풍경이 유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한 느낌이었다.
유리가 무엇을 보았더라. 집 문을 두드리기가 미안해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주인 아주머니를 보았다. 슈퍼 앞에 앉아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수많은 사람, 개, 자전거를 보았다. 손톱달을 보려고 멈춰 서는 남자와 한 가족의 사진을 찍어 주는 언니를 보았다.
또 무엇을 들었지. 싸우다 화해한 주민들의 웃음소리와 상가 주민들의 농담, 클레이로 크림빵을 만들자 아이들과 선생님이 질러 주었던 탄성을 들었다. 유리는 앞 건물 위층에서 앵무새가 우는 소리를 깐따삐아라고 외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재한 씨와 언니가 “다만 캠핑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먹으며 두서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을 들으며 “사는 게 엄청 재미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행이라 여긴다”(p. 108).
유리의 마음이 가닿았던 곳곳을 짚어 볼 때마다 유리란 사람에게 ‘괜찮다’고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그의 전부를 알지 못하더라도.
“희망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거나 대단한 미래를 꿈꾸며 살지는 않지만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은 어차피 바꿀 수 없고 오늘 나는 그 어느 날의 나보다 괜찮으니까. 가진 것을 생각하면.” (p. 114)
삶을 계속해서 이어 가기 위해 유리가 적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거창하거나 대단하지 않은 삶의 풍경들.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장면들이었다. 한영인 평론가님이 쓴 문장이 떠오른다. “삶을 계속 살게 하는 힘은 완벽한 이해나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 어떤 존재를 염려하는 애틋한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이야기. 온기 가득한 발견들이 인상적이었던 따뜻한 소설이었다.
*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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