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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피컬 나이트
조예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평점 :
#트로피컬나이트 #조예은작가님
“이 괴이한 것을 어쩌자고 집 안에 들였을까.”(「고기와 석류」 p. 32)
괴담에는 대체로 금기가 있다. 열어선 안 되는 문이 있거나 들어가선 안 되는 방, 불러서는 안 되는 이름이나 닿아선 안 되는 존재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괴담 속 주인공들은 매번 금기를 어겨 왔던 것 같다. 공포를 느끼면서도 문을 열어 보고, 뒤를 돌아보고, 말을 걸고야 만다.
이번 여덟 편의 단편소설에서도 저마다의 금기를 깨뜨리며 나아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다만 그동안 우리가 숱하게 접해 왔던 괴담이 미지의 존재와 마주친 순간 끝나 버리는 이야기였다면, 『트로피컬 나이트』는 그러한 존재와 마주한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수안은 뒤돌아서서 좀 전에 자신이 빠져나온 문을 바라보았다. 허무할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숨이 막히지도, 머리가 아프지도, 토할 것 같지도 않았다. 수안은 주먹을 꽉 쥔 채, 한 발을 더 내디뎠다. 그리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가장 작은 신」 p. 195)
트로피컬 나이트 라는 제목처럼 여름만큼 괴담과 어울리는 계절이 있을까. 피부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창문을 열어 놓고 잠드는 계절. 바깥과 안쪽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여름에 괴담을 듣는다는 건 꼭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피부로 감각하는 일 같았다. 온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존재를 촉감으로 더듬거리는 느낌.
그런 순간들을 소설에서 발견할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문을 ‘열거나’ 창을 ‘통과’하거나 차원을 ‘넘어’ 비로소 어느 존재에게 ‘닿’는 장면들. 온기와 부피를 ‘만지’고 ‘잡아’ 보던 모습들을 기억한다. 반드시 물리적인 거리가 좁혀져야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자꾸만 내게 증명하는 것 같았다.
바깥에 있는 괴물이 안쓰러워 현관문을 열었던 할머니와 할머니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던 괴물처럼. 악몽을 꾸면서도 누더기 인형을 끌어안는 은성이와 은성이의 인형 뽑기를 도와주었던 악마처럼. 소중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또는 지키기 위해 문 밖으로, 차원 너머로 나아갔던 사람들처럼. 누군가 문 앞에 놓고 간 떡국이나 어느 신체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손목, 별모양 트리 장식같이. 마음이란 것이 갖가지 형태로 서로에게 가닿는다. 당신이 어떤 존재이든지 간에.
“알코올과 새벽의 힘인지, 함께 울면 울수록 우리 사이에 존재했던 공백이 메꿔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 달, 1년, 10년, 20년가량을 거슬러 올라간 나는 어느 찰나를 기억해냈다. 최악의 명절로 남은 설 당일. 어른들의 고함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던 이불과 이불 안에서 맞잡고 있던 손을.”(「새해엔 쿠스쿠스」 p. 132)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평생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p. 93) 타인은 얼마나 미지의 공포일까.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이 단지 아는 것뿐이라면, 우리는 평생 셀 수 없이 많은 질문과 발견을 거듭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긴 터널을 걷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괴담 속 인물들에게 작가가 보내는 따스한 응원처럼 나도 터널을 걷는 일을 즐겁게 생각하고 싶다. 혹시라도 지치거나 힘들어지더라도 “다만 어차피 삶은 계속될 테고, 그 사실이 버틸 만하다는”(p. 209) 작가의 문장을 이따금씩 떠올릴 것 같다.
“릴리, 나는 아마도 세상을 만지는 시도를 할 거야. 동시에 내가 잃어버린, 떨어져 나간 나의 일부를 찾아 나설 거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찾아 나서는 과정보다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더 길지도 몰라. 이거 하나만 기억해 줘. 물은 어디로 가고 어디로든 흐르잖아. 아마 세상도 곧 그렇게 될 거야. 이건 확신이야. 내 애정이, 내 목소리가 너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닿을 거라고 믿어. 내 꿈속의 네가 진짜 너라면 내 손을 잘 간직해 줘.”(「릴리의 손」 pp. 104-105)
여름 막바지에 멋진 책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작가님이 단단한 문장으로 그려 낸 으스스하지만 따뜻한 세계. 각 소설의 소재들이 표지에 조화롭게 펼쳐져 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솔직하고 용감했던, 생동하는 인물들도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