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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평점 :
#영의자리 #고민실작가님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중 어느 쪽을 더 잘 잊어버릴까? (p. 55)
무엇을 믿어야 할지 선택하는 과정은 젖은 운동화를 신고 돌아다니는 일과 비슷했다. 멈추기 전에는 발을 말릴 수 없었다. (p. 163)
조제약은 의사의 처방이 필요하지만 일반약은 누구나 쉽게 쇼핑한다. 열이 나면 해열제, 속이 거북하면 소화제, 설사가 나면 지사제, 염증에는 진통소염제. 스스로 판단하여 복용 여부를 결정한다. 부작용은 오롯이 내가 감당할 몫이다. (p. 167)
‘영혼이 없다’고들 한다. 마음에 없는 행동을 할 때 관습적으로 쓰는 말이다. 말과 행동에 담기지 않은 영혼은 어디를 떠도는 것일까. 어디선가 다른 사람들은 알아 듣지 못할 언어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영혼이 떠난 몸은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죽은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이것을. 껍데기만 남아서 있으나 마나 한 이것을. 그저 사람들 틈에서 영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이것은, 또 다른 의미에선 꼭 유령 같지 않는가.
‘양’이란 사람이 있다. 마지막 실업급여를 받은 양은 알바 자리를 찾던 중 플라워 약국이란 곳을 발견한다. 나이도 학력도 경력도 무관. 무엇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양에게 이만한 일자리는 없었다. 평생을 남들만큼만 노력해 오고 그만큼만 살아온 양이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들이 더 하찮아 보’(p. 12)인다고 양은 생각한다. 플라워 약국으로 면접을 보러 가던 날도 양에겐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어떤 기대나 희망을 갖고 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유령을 보는 약사를 만난 뒤로 양은 잔잔한 일상의 진동을 느끼게 된다. 오감으로 느끼지 못했던 끊임없는 증발과 응결을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약사가 유령을 보긴 했지만 플라워 약국은 여느 약국과 똑같았다. 영양제나 진통제를 찾는 사람들과 처방전을 든 노인들이 약국을 찾았다. 가끔씩 구구단을 외우는 아이나 인상을 찌푸린 영업사원, 넋두리를 하는 아주머니 같이 유령인지 의심스러운 사람들도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김 약사의 눈에는 ‘네에에…’하고 대답하는 양이나 ‘글쎄요오…’하고 대답하는 조 부장이나 유령과 별반 차이가 없는 듯했지만 말이다. 김 약사의 입에서 나오는 ‘유령’이란 말은 어떤 면에선 꼭 증세에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햇빛을 받은 사람이 재채기를 하는 것을 보고 광반사 재채기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처럼. 증상에 이름을 붙였다는 건 유의미한 통계가 생긴 것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유령이 되어야지.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양은 자신을 둘러싼 복잡하고 불편한 상황들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엄마의 한탄을 듣고만 있어야 할 때, 회사가 폐업했을 때, 혜의 마지막 메시지에 답장하지 못했을 때, 부모님에게 보증금으로 돈을 빌렸을 때, 덕질을 시작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할 겨를 없이 휩쓸리기에 바빴던 나날이었다.
유령의 눈으로 보게 되니 알게 되었다. 유령의 자리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니 보이는 것이다. 왜 혜와의 관계가 점점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나의 마음이 얼마나 마모되고 소모되어 왔는지도. 진통제를 복용하듯 덕질을 한 이유도. 그리고 늘 인생의 가해자라 생각했던 엄마가 어쩌면 나와 같은 유령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모두가 부작용을 감수하고 약을 먹는 사람들이었던 거다. 넋두리를 하고 한탄하고 의존하고 화를 내는, 모든 양상들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
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 팔이 찢어진 남자가 약국에 왔다. 치료는 불법이라고 고개를 젓는 김 약사에게 양이 남자를 치료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중 어느 쪽을 더 잘 잊어버릴까? 오래 안 살아도 좋으니까 나쁜 기억을 남기는 일은 하고 싶지 않’(p. 199)다는 양의 독백이 떠오른다. 퇴근하는 길에 양은 비에 젖은 뺨을 만져 본다. 오랜만에 할 수 없는 일을 했다고 말하며, 그는 뺨에서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고 덧붙인다.
그 순간만큼 그는 더 이상 유령이 아닌 것 같았다. 있으나 마나 한 존재에서 좀 더 뚜렷하고 다채로운 존재가 되어 간다. 약국을 관두기로 결심한 날, 양은 생각했다. ‘유령이 되는 건 외로움에 대한 저항이 실패하는 과정이었다’(p. 218)고. 마음의 헛헛함을 채우기 위해 의지할 것들을 찾았던 시간이었다.
여러 실패 끝에 비로소 알게 된 것은 외로움을 완벽하게 저항하는 방법이 아닌 완전히 받아들이는 방법이었다. 나뿐 아니라 모두가 ‘어디선가 한 칸의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작은 픽셀’(p. 232)이란 깨달음.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여백에 0을 놓아둘 발상을 했을까. 어떤 숫자를 더하거나 곱해도 자리가 비어 있지 않다는 것. 여전히 하나의 단위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 무한히 태어나고 성장하는 자리가 바로 영의 자리인 것이다.
안개가 자욱한 바다를 앞둔 양은 다시금 헤엄을 칠 준비를 한다. 이번엔 헤매는 일이 있더라도 좀 더 오래, 좀 더 멀리 헤엄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