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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여자 - 일상에 도전하는 철학을 위하여
줄리엔 반 룬 지음, 박종주 옮김 / 창비 / 2020년 4월
평점 :
#생각하는여자 #줄리엔반룬
'두려움의 지리학은 우리에게 야외 공공장소에서 편히 있지 말라고 가르쳐왔고 우리는 그에 맞게 움직임을 제한하며 종종 좀 더 편안한 느낌을 주는 사적인 영역이나 가정의 영역에서 꼼짝 않곤 한다' (1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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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녀 어머니란 여성의 욕망을 승화하고 우리가 금욕하고 회생하고 견딜 것을 요구하는 지배적 모성 재현의 부리에 있는 환상이다' (17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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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백인 남성들의 철학이 아닌, 살아 있는 여성 철학자들의 이야기'라는 말을 처음 봤을 때 얼마나 속이 시원했는지 모른다. 사람의 디폴트가 성인 남성이기 때문인 걸까. 그동안의 철학엔 '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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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많이 펼쳐봤던 성경책에서 조차도 여성은 부가적이고 대상화되는 존재로 그려질 뿐이었다. 그렇게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본의 아니게 남성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했던 시절들을 끝으로, 여성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다는 건 무척 기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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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각 여섯 가지 주제(사랑, 놀이, 일, 두려움, 경이, 우정)로 나뉘어, 각 주제별로 역사가, 소설가, 철학가, 비평가 등의 여러 위치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들의 일화와 생각들이 정리되어 있다.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파트는 '두려움'과 '경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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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여자의 장소'가 되었다는 부분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저번주에도 살해당한 여성이 있었는데, 이제는 평범한 일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누구도 놀라거나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무엇이 여성을 두려움에 가두었을까. 무엇이 여성을 자유롭게 걷지도 뛰지도 못하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여성에게 침묵과 억압을 강요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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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변화의 상태 속에 있는 것, 다양한 힘들에게 포위당해 있는 것이다.' (173-1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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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주는 폭력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살아 있는 것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이다. 죽은 것들만이 가만히 있다. 살아있는 존재에게 생각을 강요하고 행동을 억압하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것은 폭력인 것이다. 주체성이란 말이 좋다. 우리를 형성하는 다양한 현상과 관계들로 우리들이 계속 생겨나고, 그 생겨남의 과정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계속된다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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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위험에 대한 전적으로 적절한 반응이에요. 황소에게 쫓기면 신장 바로 위에 있는 부신에서 아드레날린을 뿜어내죠. 혈압이 높아지고 혈당수치가 높아져서 필요하다면 도망치기 위해 6피트 높이의 담장도 뛰어넘을 수 있게 돼요. 두려움에 대한 이런 부신 반응 덕분에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거죠.' (1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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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오랫동안 친밀한 남성의 폭력과 소위 매 맞는 여자가 되는 것을,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입에 담지 않는 개인적인 공포를 가진 여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해왔다. 그녀는, 이 여자는, 덫에 걸렸다. 그녀는 덫에 걸려 고통받고 나갈 길이라곤 없다. 게다가 그녀는 공공연히 모욕당한다. 심지어는 시선을 돌리는 것처럼 미묘한 무언가에도 수치심을 느낀다.' (2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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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상황에 대해 계속해서 촉을 세우고 생각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학부 교수님께 들었던 말씀이 떠올랐다. 인간의 무사유는 죄, 라는 말. 주위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사고하고 고민하고 곱씹어야 한다고 하셨다. 편안하고 안온해보이는 상황일지라도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폭력과 피해자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주제에 대하여 어떤 정답이나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그렇지는 않다. 다만, 주제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제목과 정말 잘 어울리는 책이라 생각된다. 읽는 동안 독자 또한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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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꺼지라지, 하고 생각했다. 여성들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2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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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적 성과와 활동 덕분에 조금 바뀌긴했지만 아시다시피 여전히 남자에게서는 단정적이고 자신감에 찬 발화가 여자에게서는 거슬리고 앙칼지고 과하게 화를 내는 게 되죠. 여자들이 하면 잡담이나 수다라고 해요. 남자에게는 달변이고, 뛰어나고, 자신감 있는 게 되고요.' (2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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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구조가 우리를 제약하고 곤란에 처하게 한다 해도 우리가 그것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2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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