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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담은 그림자
안은희 지음 / 웅크린불꽃 / 2022년 6월
평점 :
사랑을 미는 힘
안은희 작가의 『빛을 담은 그림자』는 연애소설이다.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시선이 교차 되는 구성이다. 독자는 여자 입장과 남자의 입장을 각각 들여다보며 전지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같은 상황에서 보여주는 둘의 다른 태도는 남자의 편이 되게도 하고, 여자의 편이 되게도 한다.
작가는 여주인공 연주의 목소리부터 들려준다. 그리고 둘의 여정은 가독성 좋게 쉼 없이 달려 300여쪽을 지나 남주인공 규영의 목소리로 마무리된다. A5사이즈의 316쪽 분량으로 다른 여타의 사건들을 넣을 수 있을 텐데도 작가는 오로지 이 둘의 시선으로만 이야기를 끌고 간다. 지루할 수도 있을 법한 구성이건만 이 구성은 오히려 사랑이 가진 힘을 보여준다. 끝까지 지켜내려는 힘. 사랑을 미는 힘이 단단하다.
이 책을 연애소설독서동아리 말랑하트에서 같이 읽었다. 편이 갈린다. 연주 편, 규영이 편. 나는 규영이 편이다. 더 정확히는 ‘규영이가 더 이해된다’ 이다. 그는 연주를 따뜻하게 대하지 않았다. 늘 옆에 있는 사람으로 부재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연주는 그의 옆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다. 하고 싶은 말도 못 한다. 규영에게 늘 맞춰준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떻게 이 둘이 사랑인가 싶겠지만 이 둘은 정말 사랑한다. 연주는 규영을 떠나왔지만 늘 규영이 생각뿐이다. 규영은 늘 옆에 있던 연주가 사라지자 연주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안다. 한 번도 부재를 생각하지 않은 당연한 사랑인 것이다.
문득문득 그를 떠올리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고 느껴질 때 약간의 서글품이 묻어나기도 했다. 그런데 고작 메일함에 나타난 그의 아이디만으로 모든게 무너져 버린 것이다. 여태 죽을 만큼 애쓴 보람이 없다. 어찌해야 하나……. (50p)
연주는 규영을 떠나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림자처럼 산다. 맘에서 규영을 떠나 보내는 매일을 보낸다. 문득문득 수시로 떠오르는 사람.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미칠 수가 없다. 미치도록 사랑한다는 증거이다. 연주는 그래서 규영을 떠났다. 이런 사랑이 규영을 힘들게 할까봐. 정말 떠나야 했을까?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네가 사라져버린 걸 받아들이고 난 후부터
어쩌면 나의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렇게 되돌아가는 시간으로 하루를 견디며 너를 만나고 있거든.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찾아가 볼 생각이다.
그래야 나중에 널 다시 만났을 때
네게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디를 가든 넌 항상 웃는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다.
그런 너를 바라보는 나는 웃을 수가 없네. 젠장. (p63)
규영은 연주가 사라진 것을 며칠 후에나 안다. 연락이 되지 않는 연주. 연주의 흔적을 찾지만 어디서도 찾지 못한다. 연주의 어머니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연주 어머니를 계속 찾아간다. 연주를 대신해 어머니를 살피는 것이다. 우연히 보게 된 우편물. 연주가 샌프란시스코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회사에서 주어진 기회로 시애틀에 가게 된다. 그리고 주말이면 연주의 흔적을 찾아 2시간 거리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가 헤맨다.
결국 만난 두 사람.
여전히 사랑하지만 규영을 밀어내는 연주. 이제야 연주의 존재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기에 보낼 수 없는 규영. 흔히 썸을 탈 때 밀당을 말하지만 헤어질 때 밀당도 있다. 이 둘의 헤어짐의 밀당은 일방적 밀과 일방적 당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연주는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에서 수도 없이 밀당이 일어난다. 사랑이 확실하기에 마음에서는 흔들림없이 당기는 규영이지만 연주가 불편할까봐 현실에서는 연주를 위해 물러서기도 한다.
이런 모습을 통해 진짜 사랑은 헤어짐의 위기에서 발현되는 것 같다. 좋을 땐 다 좋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면 헤어지고 싶은 생각이 든다. 갈등이 생긴다. 이 갈등을 어떻게 처리하냐가 사랑의 지혜인 것 같다.
연주에겐 규영이 모르는 아픔이 있다. 규영이의 첫사랑을 지켜본 연주, 다시 그녀에게로 갔던 규영이를 아는 연주. 그리고 뱃 속에 아이를 잃은 슬픔. 혼자 이 모든 것을 껴안은 연주의 사랑.
규영은 연주가 이제 자신의 사랑임이 분명하다. 연주도 날 사랑한다. 의심 따위는 없다. 사랑이 분명한데 무얼 할 필요가 있나? 당신은 어떤가? 사랑이 분명한데 왜 사랑을 의심하지? 왜 그걸 매번 확인시켜야 하지? 나도 이렇게 생각했던 사람이라 규영이가 이해되었다.
작가는 연주만의 아픔을 크게 보여주지 않는다. 담담하게 그려 오히려 두 사람의 사랑에만 집중하게 한다. 주변인들의 사랑도 있다. 그러나 오직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해서만 그들의 사랑을 보여준다. 작가는 상실된 생명을 규영이에게 댓가지불 하게 하고 다른 생명을 살림으로 둘의 관계를 회복시켜 간다. 연주가 아닌 주연으로,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게 되는 규영이는 새로운, 뭔가 한 고비를 넘긴 인생으로 선다. 작가는 이 한 고비를 인생의 수많은 고비를 넘긴, 샌프란시스코에서 적응하게 해 준 할머니를 통해 넘기게 한다.
책을 덮고 수일이 지났다. 여전히 이 책이 준 사랑의 힘이 단단하게 내 안에 자리매김 하고 있다. 사랑은 이렇게 미는 힘이 있다는 것, 끝까지 가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책이다. 두 사람이 사랑한다면 사랑을 믿고 가는 것이 맞다. 사랑은 스스로 인생의 돛을 달게 하고, 사랑 스스로 바람을 불게 하여 두 사람이 바라는 사랑으로 가게 하는 힘이 있다. 지금 당신의 사랑이 흔들리고 있다면 읽어보길 바란다. 두 주인공을 바라보며 나는 어떤 사랑의 힘으로 사는지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옆의 그 사람이 소중하게 다가올 것이다.
며칠 전 어떤 친구가 연애소설독서동아리에서 읽었던 책 중에서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이 이 책이다. '대형출판에서 나왔으면' 하고 생각하는 아쉬운 책이다. 숨은 보석 같은 책이다. 그 보석을 당신도 갖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