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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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무런 근거 없이 우리 자신을 가혹하게 심판하기도 해. 하지만 잘못된 책임감은 사람을 쇠약하게 만들 수 있다네."(p.106)

 

어떤 책임감은 중요한 일을 해내게 만들지만, 잘못된 책임감은 사람을 쇠약하게 만든다.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자네는 양심이 있는 사람이고 양심은 귀한 것이지만, 그것이 자네가 자네의 책임 영역을 넘어선 것에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시작한다면 그건 귀한 게 아니게 되네."(p.109)

 

자신의 책임 영역을 넘어선 양심과 책임감은 그로부터 비롯된 행위가 숭고할 지언정 거기에는 어떤 뒤틀린 구석이 있다. 공동의 문제를 홀로 떠안으려는 저 숭고한 양심 속에는 영웅적인 결단이 아닌 해석의 오만이 깃들어있다.

 

 "그는 비극을 죄로 바꾸어야만 했다. 벌어진 일에서 필연성을 찾아야만 했다. 유행병이 생겼고 그에게는 그것을 설명할 이유가 필요하다. 그는 왜냐고 물어야만 한다. 왜? 왜? 그것이 의미 없고, 우연이고, 터무니없고, 비극적이라는 말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이 급격히 증식하는 바이러스라는 말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대신 그는, 이 순교자는, 왜에 미친 이 사람은 필사적으로 더 깊은 원인을 찾으며, 그 왜를 하느님이나 그 자신 안에서 발견하거나, 아니면 신비하게도, 불가사의하게도, 그 둘이 무시무시하게 합쳐져 생겨난 단일한 파괴자에게서 찾는다. 그가 그의 삶을 시들게해버린 고통들을 쌓아가는 것에 내가 아무리 공감한다 해도, 그것은 어리석은 오만, 의지나 욕망의 오만이 아니라 환상적이고 유치하고 종교적인 해석의 오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p.266)

 

자신의 삶을 집어삼킨 고통이 어떤 의미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누가 쉽게 견딜 수 있겠는가. 소설 속 화자가 '오만'이라 말했지만 그런 해석의 힘 없이 고통을 견디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고, 비극을 죄로 번역하는 해석이 결코 구원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세상에서 망가진 착한 소년만큼 구원하기 힘든 사람은 없는 법이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자신만의 상황 감각을 키워왔기 때문에 - 또 간절하게 갖고 싶어했던 모든 것을 갖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내 힘으로는 그가 자기 삶의 끔찍한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을 몰아낼 수도 없고 그와 그 사건의 관계를 바꾸어놓을 수도 없었다.(……) 버키 같은 사람의 죄책감은 남이 보기에는 터무니없지만, 사실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구제할 수 없다. 그가 하는 어떤 일도 그가 안에 품은 이상에는 이를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책임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절대 모른다. 그는 절대 자신의 한계를 믿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체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선을 천성적으로 짊어지고 있어, 자신에게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반드시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불구인 남편을 얻는 것을 막는 데서 가장 큰 승리감을 맛보며, 그녀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가장 깊은 욕망을 부인하는 것은 영웅적 행동이 된다."(p.273~274)

망가진 착한 소년들은 낯설지 않다. 대부분의 소년들은 개인적인 관계에서 결국 폭력성을 분출하고 말기에 그들은 전혀 복잡하지 않으며 손쉽게 분류하고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버키는 복잡하다. 그는 대가를 치렀다. 그는 부조리를 자신이 저지른 큰 범죄로 해석했고, 자신이 한때 소유했던 모든 것을 내놓고 인생을 망쳤다.

 

이 복잡하게 망가진 인물이 그보다 덜 복잡한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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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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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A가 자신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는지 아닌지는 제 판단에 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대신 워드 판사가 재직 당시 미성년자 E에 대해 내린 결정, 역시 여호와의 증인인 십대 청소년 관련 판결을 지침으로 삼겠습니다. 해당 판결문에서 워드 판사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동의 복지는 이번 판결에서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이며, 나는 무엇이 E의 복지를 좌우할지 판단해야 한다.'

 

이 견해는 1989년 아동법의 금지명령에 명확하게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1989년 아동법은 그 도입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동의 복지임을 주창했습니다. 저는 '복지'가 '안녕'과 '이익'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A의 의사를 고려할 의무도 있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A는 제게 본인의 의사를 뚜렷이 전달했고 A의 아버지 역시 본 법정에서 본인의 의사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 성경의 세 구절에 대한 특정한 해석에서 끌어온 종교적 교리에 의거하여 A는 생명을 구할 가능성이 큰 수혈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치료 거부는 성인의 기본적 권리입니다. 성인을 본인의 의지에 반하여 치료하는 것은 형사상 범죄로서 폭행에 해당하는 행위입니다. A는 스스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나이에 근접해 있습니다. 종교적 신념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다는 사실은 그 믿음이 얼마나 심오한지 증명합니다. 또한 그의 부모가 끔찍이 사랑하는 자식을 신앙을 위해 희생시킬 각오를 한다는 사실은 여호와의 증인이 고수하는 교리의 힘을 보여줍니다."

(……)

:바로 이 힘 때문에 저는 멈춰 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A는 17세가 되도록 종교적, 철학적 사고라는 격변하는 영역에서 다른 표본을 접해본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독교 종파는 신자들 간의 열린 논쟁이나 반대의견을 장려하는 문화가 아닙니다. 회중의 신자들은 자신들을 '다른 양'이라 부른다는데요, 적절한 명칭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저는 A의 정신, 견해가 온전의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A는 아동기 내내 강력한 하나의 세계관에 단색으로, 중단 없이 노출된 채 살아왔고, 그런 배경이 삶의 조건을 좌우하지 않았을 수는 없습니다. 고통스럽고 불필요한 죽음을 감수하는 것, 그리하여 신앙을 위해 순교자가 되는 것이 A의 복지를 도모하는 길은 아닐 것입니다.

(……)

본 법정은 내세에 관해 어떤 견해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쨌든 A는 언젠가 스스로 내세를 찾거나 혹은 찾지 못하게 되거나 하겠지요. 한편 건강을 회복한다는 가정하에 A의 복지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시에 대한 사랑, 새롭게 발견한 바이올린에 대한 열정, 활발한 사고력 발휘와 장난기 많고 다정한 본성의 표현이며, 그리고 아이 앞에 펼쳐질 모든 삶과 사랑입니다.

 

요컨대 저는 A와 그의 부모, 회중의 장로들이 본 법정이 가장 중시하는 A의 복지에 해로운 결정을 내렸다고 판단합니다. A는 그런 결정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합니다. A는 그의 종교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합니다."(p.166~169)

 

저 '여호와의 증인'의 자리에 다른 종교, 혹은 특정 경제체제에 대한 신념을 대입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이 부분을 읽었다. 읽으면서 시를 사랑하는 저 소년 A보다 다른 표본을 접해본 경험이 풍부하다고,그래서 반대의견을 내본적이 있다고, 그 때문에 공동체로부터 벗어나 본 적이 있다고 쉽게 자신할 수가 없었다.

 

법은 A의 존엄성 보다 A의 생명을 우선시 하며 A의 청구를 기각했다.  생명은 법이 지켜줄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다. 그러나 그 다음은?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의미'"는 법이 제공해줄 수도 지켜줄 수도 없다. '의미'의 부재앞에서 종교를 대신할 무엇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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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정지돈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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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동안 거리를 채우고 있을 콘크리트 더미를 생각하면 지금도 구역질이 납니다. 이구는 집을 기계로 짓기 시작한 이후 몰락이 시작됐다며 직접 벽돌을 지고 흙에 손을 묻혀야 합니다. 집은 손맛입니다, 라고 말했어. 나는 그 말에 껄껄 웃었고 이구 역시 말을 마친 뒤에 미소를 지었어. 그는 유머감각이 특출났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지. 그가 웃기면 사람들은 웃질 않고 당황하거든." (건축이냐 혁명이냐」, 정지돈. p.48)

 

이 소설이 바로 이구가 말한 '손맛'같은 작품일지 모른다는 오해는 여기서 시작됐다. "오해가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므로" 기꺼이 오해를 이어나가 보겠다. 

 

건축에서 손맛을 잃어버렸으므로, 건축이냐 혁명이냐, 혹은 "구축이냐 탈구축이냐"는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는 양자택일(Either/Or)의 문제가 생겨났다. 같은 후장사실주의자 금정연이 녹번동에서 해설한대로 정지돈의 소설은 건축이냐 혁명이냐의 양자택일의 문제를 넘어선다. 어떻게 넘어서는가. 정지돈의 소설이 "과잉-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은 풍부한 인용과 대화를 통해서다, 아니, 대화를 통해서"인데, 그 방식에서 '구축형 소설'과는 다른 손맛이 느껴진다는 것이 나의 오해다.

 

이미 오해를 저지르고 있지만 오해를 줄이기 위해 말해보자면, '구축형 소설'이라 해도 인용과 대화가 없을리 없지만, 그것들은 '순수한 창작'이라는 신화에 휩싸여있다. 반대로 "모든 문학은 표절이다"라는 도발적인 주장은 "모든 텍스트는 인용 표시 없는 인용이다"라는 바르트의 말을 무성의하게 낭비하는 유치한 생각에 불과하다.

 

"텍스트는 실체가 아니라, 쓰기와 읽기라는 행위가 동시에 참여하는 어떤 활동의 장을 가리키며, 인용은 그 활동의 역사성을 증언하는 개념일 수 있다. 텍스트에 있어서의 역사성이라는 지평은 크라카우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의 세계와 대책 없는 주관주의적 심리주의 사이의 영역, 즉 '중간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인용-텍스트 : 후장사실주의 선언에 붙이는 주석, 강동호, anal.realismvol.1)

 

'중간계의 손맛'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례가 소설에도 등장하는 박찬경의 작업이다. 그리고 "자신은 이상하게도 육십년대에 찍힌 다큐멘터리 사진, 전혀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없는 사진을 보며 매력을 느끼는데 이는 소위 말하는 미술품보다 이런 기록물이 더 미학적이기 때문에, 빈티지한 취향이나 사회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로서 그런 기록물이 앞서기 때문에 그런 기록물을 수집하는 행위로 작품을 만들어왔다"는 박찬경의 작업은 "작가가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삶을 써라. 대화를 기록하고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라. 그것뿐이다."라는 정지돈의 인용과 겹친다.

 

수집과 인용의 '반격자 구조' 배열이 만들어내는 과잉-의미의 재잘거림은 '세계의 다른 방식의 전개' 가능성에 대한 묘한 흥분을 불러 일으킨다. 그것이 꼭 "벤야민의 중단과 상황주의자들의 구축"이 말하는 정치적 효과와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집의 손맛을 잃어버린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세계에 구역질을 느끼는 사람에게 이 소설의 쓰기-읽기 행위는 이 소설이 처해있는 유한성(역사성)에 대한 어떤 대화를 불러일으키리라.

 

집의 손맛도 모르면서 너무 많은 글자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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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션 - 어느 괴짜 과학자의 화성판 어드벤처 생존기
앤디 위어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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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에게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은 알지만, 부모님께 저는 제 일을 사랑했고 자신보다 아름답고 위대한 것을 위해 죽는다고 전해주세요(I'm dying for something beautiful greater than I)"

 

영화에 등장했던 저 대사가 책에도 있었던가? 600페이지를 꼼꼼이 뒤져보진 않았지만 저 대사를 발견하진 못했다. 원작의 마크 와트니는 저런 대사를 정색하고 던질 인물이 아니다.

 

"닥터 실즈가 대원들 모두에게 일일이 편지를 쓰라고 하더군. 그래야 내가 인간다움을 유지할 거라나. 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명령이잖아." (p.319)

 

그렇다고 영화와 원작의 캐릭터가 다르다고 느낀건 아니다. 마크 와트니는 "당장 쓸모를 알 수 없는 탐구에 헌신하고 영원히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는 메시지를 남기는, 자기 내부에 삶의 동력을 가진 인물"(<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씨네21)이라는 점에서 그의 본질은 같다.  

 

그의 주된 매력인 낙천성은 그가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데서 온다. "사막에 데려다놔도 전갈과 사귀며 살아남을" 인간인 와트니는 "당면한 고역 속에서도 기어이 즐길 거리는 찾고야 마는" 인물이다. 그렇다고 그의 유머가 일부러 자아낸것처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정말 진지하다.

 

"그나저나 그보다 더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대체 대장에게 디스코는 뭡니까? 70년대 TV 프로를 좋아하는 건 이해하겠어요. 촌스러운 옷차림의 털보 아저씨들은 누구나 사랑하니까요. 하지만 디스코는 정말…… 디스코는!?"(p.341)

 

그런데 김혜리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사실처럼 마크 와트니는 줄곧 디스코를 디스하면서도 정작 어떤 음악을 듣고 싶은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취향이 무엇인지,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그런 곁가지 이야기들이 과감히 생략되었는데, 여기에 이야기의 진짜 매력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당면 과제에 집중하는 것. 물론 화성이 그럴수밖에 없는 공간이긴 하다. 그래도 와트니의 인기 비결은 역설적으로 페이스북을 하지 않은데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페이스북은 은유다. 오늘날 어떤 비판자들은 사람들이 '먹고사니즘'에만 빠져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그 어느때보다 자기전시가 넘쳐나고 있기도 하다. 생존의 문제에 대한 개별적인 취향이라도 있는 것인가?

 

마크 와트니가 감자를 심으며 감자맛에 대한 자기의 취향의 일기를 썼더라면 그도 죽고 이야기도 죽었을 거라 믿는다. 극소수 엘리트는 일을 하러 가고 아마추어는 포스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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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말 - 언어의 미로 속에서, 여든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윌리스 반스톤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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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당신은 이렇게 말했어요. 작가는 성이 있고 말이 있는 왕국을 묘사하기 시작하지만 자기 자신의 얼굴선을 그리는 것으로 끝맺는다고요."

 

"내가 그런 말을 했나요? 그런 말을 했기를 바랄게요! 아, 그 글을 썼던 게 기억나요. 자기 앞에 끝없는 세계가 펼쳐져 있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는 배를 그리고 닻을 그리고 탑과 말과 새 같은 것을 그려요. 마지막에 그는 자신이 그려온 것들이 자기 얼굴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 이야기는 물론 작가에 대한 은유에요. 작가가 뒤에 남기는 것은 자기가 써온 글이 아니라 자신의 이미지라는 거죠"(1980년 3월 컬럼비아대학교, p.135)

 

보르헤스가 훗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말을 철회하는 일만 생기지 않는다면, 보르헤스의 글에 새겨진 그의 이미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보르헤스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그건 단연코 '미로'일 거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세계관이라는 게 있다면, 나는 세계를 수수께끼로 생각해요. 그에 관한 한 가지 아름다운 사실은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을 거라는 점이지요. 나는 이 세계에 수수께끼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것에 늘 경이로움을 느낀답니다."(1980년 4월 메사추세츠공과대학, p.146)

 

세계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생각하는 작가의 글은 미로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출구가 없는 미로. 보르헤스는 수수께끼에 늘 경이로움을 느낀다지만, 해답이 없는 수수께끼는 때론 악몽이다.

 

"나는 인생이, 세계가 악몽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서 탈출할 수 없고 그저 꿈만 꾸는 거죠.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없어요. 구원은 우리에게서 차단되어 있지요. 그럼에도 나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p.152)

 

글쓰기를 받아쓰기라고 생각하는 작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그 출구없는 미로에 함께 발을 내딛는것과 같을 테다. 우리는 그곳에서 보르헤스와 함께 "끊임없이 경험하고 행복하고 슬퍼하고 당황하고 어리둥절하는 수밖에"없다. 물론 사는 일 또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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