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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정지돈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수십 년 동안 거리를 채우고 있을 콘크리트 더미를 생각하면 지금도 구역질이 납니다. 이구는 집을 기계로 짓기 시작한 이후 몰락이 시작됐다며 직접 벽돌을 지고 흙에 손을 묻혀야 합니다. 집은 손맛입니다, 라고 말했어. 나는 그 말에 껄껄 웃었고 이구 역시 말을 마친 뒤에 미소를 지었어. 그는 유머감각이 특출났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지. 그가 웃기면 사람들은 웃질 않고 당황하거든." (「건축이냐 혁명이냐」, 정지돈. p.48)
이 소설이 바로 이구가 말한 '손맛'같은 작품일지 모른다는 오해는 여기서 시작됐다. "오해가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므로" 기꺼이 오해를 이어나가 보겠다.
건축에서 손맛을 잃어버렸으므로, 건축이냐 혁명이냐, 혹은 "구축이냐 탈구축이냐"는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는 양자택일(Either/Or)의 문제가 생겨났다. 같은 후장사실주의자 금정연이 녹번동에서 해설한대로 정지돈의 소설은 건축이냐 혁명이냐의 양자택일의 문제를 넘어선다. 어떻게 넘어서는가. 정지돈의 소설이 "과잉-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은 풍부한 인용과 대화를 통해서다, 아니, 대화를 통해서"인데, 그 방식에서 '구축형 소설'과는 다른 손맛이 느껴진다는 것이 나의 오해다.
이미 오해를 저지르고 있지만 오해를 줄이기 위해 말해보자면, '구축형 소설'이라 해도 인용과 대화가 없을리 없지만, 그것들은 '순수한 창작'이라는 신화에 휩싸여있다. 반대로 "모든 문학은 표절이다"라는 도발적인 주장은 "모든 텍스트는 인용 표시 없는 인용이다"라는 바르트의 말을 무성의하게 낭비하는 유치한 생각에 불과하다.
"텍스트는 실체가 아니라, 쓰기와 읽기라는 행위가 동시에 참여하는 어떤 활동의 장을 가리키며, 인용은 그 활동의 역사성을 증언하는 개념일 수 있다. 텍스트에 있어서의 역사성이라는 지평은 크라카우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의 세계와 대책 없는 주관주의적 심리주의 사이의 영역, 즉 '중간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인용-텍스트 : 후장사실주의 선언에 붙이는 주석」, 강동호, 『anal.realism』 vol.1)
'중간계의 손맛'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례가 소설에도 등장하는 박찬경의 작업이다. 그리고 "자신은 이상하게도 육십년대에 찍힌 다큐멘터리 사진, 전혀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없는 사진을 보며 매력을 느끼는데 이는 소위 말하는 미술품보다 이런 기록물이 더 미학적이기 때문에, 빈티지한 취향이나 사회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로서 그런 기록물이 앞서기 때문에 그런 기록물을 수집하는 행위로 작품을 만들어왔다"는 박찬경의 작업은 "작가가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삶을 써라. 대화를 기록하고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라. 그것뿐이다."라는 정지돈의 인용과 겹친다.
수집과 인용의 '반격자 구조' 배열이 만들어내는 과잉-의미의 재잘거림은 '세계의 다른 방식의 전개' 가능성에 대한 묘한 흥분을 불러 일으킨다. 그것이 꼭 "벤야민의 중단과 상황주의자들의 구축"이 말하는 정치적 효과와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집의 손맛을 잃어버린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세계에 구역질을 느끼는 사람에게 이 소설의 쓰기-읽기 행위는 이 소설이 처해있는 유한성(역사성)에 대한 어떤 대화를 불러일으키리라.
집의 손맛도 모르면서 너무 많은 글자를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