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왜 의미 있는가 - 속물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인의 나침반
이한 지음 / 미지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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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곧 고통이다. 단지 삶을 이어나가는 데에 너무 많은 주의와 수고가 요구된다는 것만이 아니다. 또 우리가 아무리 많은 주의와 수고를 기울이고 쏟아부어도 결국 어떤 운명적인 혹은 사회적인 불행의 일격(가난, 사고, 질병, 전쟁 등)이 우리를 쓰러뜨리게 되리라는 것만도 아니다. 이러저러한 노력과 행운 속에서 삶을 안정되게 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삶 그 자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보살펴진 건강한 삶에서 삶 그 자체를 반복하고 증식하며 길게 이어나는 것 외에 어떤 의미나 가치 혹은 목적이 있을까. 삶은 이어나가기에 수고롭지만 이어나가봐야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부조리의 덩어리일 뿐이다. 종종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위로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주장도 참된 의미와 가치는 '삶 너머에' 있다고 다르친다는 점에서 삶 그 자체는 결국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부조리의 덩어리일 뿐이다. 삶은 곧 고통의 덩어리다."(권희철,『당신의 얼굴이 되어라』 p.277)

 

"우리는 삶의 손아귀에 붙들려 죽음이 도착할 때까지 부조리의 소나기를 맞고 있는 중"이지만,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삶을 돌보는 모든 행위들이 무의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타당한 논증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이 회의주의 논증은 "인생이 유이미하다는 설득력 있는 논변이 없으므로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추상적으로 규정한 다음 모든 개별적인 활동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 회의주의의 결론이 참이라고 치면, 그 대우명제도 참일 것이다. 그 대우명제는 다음과 같다. 모든 개별적인 활동이 무의미하지 않다면, 인생은 무의미하지 않다. 이 반대 논증을 유의미 논증이라 부른다면 이 유의미의 논증은 회의주의 논증보다 더 탄탄하다. "왜냐하면 논증은 더 확실한 것을 전제로 삼아 덜 확실한 것으로,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료를 발판으로 삼아 접근하기 힘든 결론으로 나아갈 때 더 탄탄하기 때문이다."(p.58)

 

그러므로 "우리가 확실하게 접근할 수 없고 분명하게 파악할 수도 없는 인생의 총체적 규정을 근거로, 지금 확실하게 접근할 수 있고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가치를 가져오는 활동을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없다."(p.66)  우리는 우리 삶의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이자 실천자로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판단을 발판으로 인생 전체의 유의미성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삶에서 '가치'란 우리의 실천을 변경시키는 이유로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삶에는 가치를 부인할 수 없는 경험들이 있다. 그 경험들은 삶의 행위를 변경하는 이유의 힘을 갖는다. 인생의 전체 시간은 부분 시간의 합이다. 따라서 부분 시간을 보내기에 가치 있는 경험들이 결합되고 조합 되어, 전체 인생의 의미를 구성한다."(p.63)

 

어떤 가치들이 삶을 실천적인 차원에서 의미있게 만드는지는 저자의 탄탄한 논증을 따라가면 알 수 있지만, 어떤 가치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둘 것인지 또한 저자만큼이나 각자가 '탐구'해야할 부분이다. 문제는 총체적인 부조리 속에서도 그러한 가치들을 따라 얼마나 기꺼이 순간들에 충실하며 살아가길 '의욕'하느냐는 것.

 

"삶은 곧 고통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번의 삶 속에서 우리는 미처 매순간의 어떤 가능성들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가능성들의 보석함은 미처 열리지 못한 채 무의미한 쓰레깃더미라는 듯 우리 곁을 스쳐간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는 부조리한 시간의 흐름만이 주어질 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순간들이 다시 주어진다면 그때는 보석함을 여는 데 성공하고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찾아 꺼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삶의 가능성들을 조금 더 밀어붙여 우리 삶을 보다 강렬한 것으로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권희철,『당신의 얼굴이 되어라』 p.290~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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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다른 곳에 밀란 쿤데라 전집 3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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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표현으로서의 시 쓰기란 자기 도취에 다름 아닌 경우가 많다. 표현할 '자기'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시 쓰기는 대부분 자기를 재확인 하고 치유하는 것에서 만족을 얻으며, 자기보다 조금 더 나은 자기를 표현하는 것에 그친다. 신형철은 이러한 시 쓰기가 거울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거울 앞에서 자기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매만지기 위해 거울을 보고 이정도면 됐다 싶을 때 떠난다." (<아방가르드 가이드> 1강)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오래도록 거울을 들여다보지만 그건 혐오스로운 자기를 철저히 까발리기 위함이 아니라, 사랑받고 찬미받을 수 있는 거울 이미지를 세상에 내보이기 위함이다. "시라는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도취하는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수록 상상의 이미지 속에서 떠다닌다. (『밀란쿤데라 읽기』, <서정의 시대>, 방미영)

 

"그는 이 구절을 큰 소리로, 선율적이고 비장한 목소리로 여러 번 읽으며 열광했다. 이 시의 근원에는 욕조 안의 마그다가 있고 욕실 문에 얼굴을 바싹 갖다 댄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 체험의 울타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 위에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그가 느낀 혐오감은 저 아래 있는 것이었다. 저 아래에서 그는 두려움에 질려 손이 축축해지고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여기, 이 위에서, 시 속에서 그는 자신의 초라함과 아주 멀리 떨어진 저 위에 있었다. 열쇠 구멍과 자신이 비겁하게 굴었던 사건은 이제 그가 딛고 뛰어오르는 발판일 뿐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방금 겪은 것에 종속되지 않았고, 그가 방금 겪은 것이 그가 쓴 것에 종속되어 있었다."(p.91)

 

물론 모든 시인이 야로밀과 같이 "시의 영사막에 포착된 자기 얼굴이 사랑받고 찬미받기를 바라는 의도로 세상에 자신의 자화상을 내보이는 자"는 아니다.

 

"오로지 진정한 시인만이 시라는 거울의 집이 얼마나 서글픈지를 안다. 유리창 너머에는 멀리서 울리는 총격 소리, 떠나고 싶어 불타는 마음이 있다. 레르몬토프는 군복 단추를 여민다. 바이런은 침대 머리맡 탁자 서랍에 권총을 넣어 둔다. 볼케르는 자신의 시구절 속에서 군중과 더불어 행진한다. 할라스는 저주를 시로 쓴다.다. 마야코프스키는 자기 노래의 목을 짓밟는다. 찬란한 전투가 거울 속에서 맹위를 떨친다."(p.473)

 

쿤데라의 소설은 자기 도취의 황홀경에 빠져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마저 버리는 괴물이 되어버린 한 서정 시인의 이야기이지만, 이 "젊음이라는 함정, 혁명이라는 함정"이 우리 모두의 "인생 어느 길목에 놓인 덫"임을 느끼게 한다. (<서정의 시대>, 방미영) 시를 쓰지 않아도 빠질 수 있는 이 함정을 어떻게 피해갈 수 있을까. '진정한 시인'이 되는 방법밖에 없는가?

 

첫 문단에 등장했던 신형철을 다시 참조하자면 그 방법중 하나는 시 쓰기가 아닌 시 읽기를 배우는 것이다. "자기 표현의 욕구를 식히고", 아마추어처럼 시에서 익숙한 모습만을 발견하고 위안을 받는 태도를 거두고, 대신 자기로부터 떠나는 훈련으로서의 시 읽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 프로의 시 읽기는 "내가 알고 있는 것에서 빠져나가는 것들을 나에게 동일화하지않으면서 붙들고 늘어지며, 나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인데, 말만 들어도 지겹고 힘든일처럼 보이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므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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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2 민음사 모던 클래식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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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화가는 자신의 그림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종국에 가서는 우리 마음속의 풍경까지 바꿔 놓는다는 것을 밀이야. 어떤 화가의 예술 작품이 이렇게 한번 우리 영혼 속에 자리 잡으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잣대가 되고 말지."(1권, p.289)

 

다른 사람들의 내면 풍경을 바꾸는 예술가 그 자신의 내면 풍경은 그가 남긴 예술작품만큼이나 아름다울까? 적어도 이스탄불의 세밀화가들은 아니다.

 

"여기서 등불 아래 이 그림을 보던 밤바다 신이 나를 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악마가 내게 친구가 되어 주었다는 걸 느꼈지. 내가 정말로 세상의 중심에 있어도, 그림을 볼 때마다 더욱 그걸 원했네. 내가 사랑하는 주위의 모든 것들, 아름다운 세큐레를 닮은 여자와 방랑승 친구들, 그림에 지배적으로 사용된 빨간색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욱 외로워졌네. 내가 개성과 특징을 갖고 있는 것, 다른 사람이 나를 숭배하는 것은 두렵지 않네. 그건 내가 원하는 바야. …… 두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나의 그림이 그려졌기 때문에 나 자신을 악마처럼 느낀다네. 이 그림을 그리려고 그 두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외로움이 날 두렵게 해 …"(2권, p.329)

 

오르한 파묵은 작가가 된다는 것이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제2의 존재와 그 존재를 만들어낸 세상을 인내심을 가지고 오랜 세월 동안 노력하여 발견하는 것"이라 했다.(『아버지의 여행가방 』) "사람들, 친구들, 그리고 평범한 일상 내지 자질구레한 것들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방에 가두고자 하는 자극"이 작가를 만드는 기본적인 자극이다.

 

"소설가들은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 공동체의 기본적인 본능을 공유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있는 문화와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일단 그의 의식이 속한 공동체의 의식과 달라지면 그는 국외자, 외로운 사람이 됩니다. 텍스트의 풍요로움은 국외자의 관음증적인 시선으로부터 옵니다."(『작가란 무엇인가』)

 

그런데 국외자의 작품이 어떻게 국내자의 마음의 풍경을 바꿀 수 있는가. 오르한 파묵은 "어느 날엔가 우리가 쓴 것들이 읽히고 이해될 거라는, 왜냐하면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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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따라 살기 - 유리 로트만과 러시아 문화 현대의 지성 157
김수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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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은 아무도 '책에 따라' 살려 하지 않지만" 책에 따라 살려고 해도, 책에 쓰여진 텍스트를 그대로 실현시킨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오늘날 유토피아의 가능성 자체를 더이상 믿지 않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유토피아를 지상에 실현시키는 것 또한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유토피아utopia는 그 어원상 이 세상에 없는 곳"이다. 유토피아가 실현되는 순간 그곳은 더이상 유토피아가 아니다.

 

유토피아는 "현존하는 삶의 질서를 대신할 다른 종류의 사회를 상상하는 사고의 작용"이자 결과다. 유토피아가 "현존재의 조건들을 근본적으로 다른 곳에 투사하는 기능"으로서 그 존재의의가 있다면, '책에 따라 살기' 또한 책을 그대로 실현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기 보다 지금의 삶을 반대하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따르는 삶이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끔직한 것이 될 것임"(p.50)은 동의하지만 끔직한 것이라 판단하기 이전에 실현이 불가능한 삶이다. 그런데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따르는 삶은 그 실현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없는 삶이 도덕적, 정신적으로 빈곤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이래저래 책을 읽는다는 건 미쳐버리는 일이다. 책에 따라 살 수도 없고, 지금 이대로 살 수도 없다. 사사키 아타루의 말대로 책을 "반복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어리석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책에 따라 살지 못하면서, 이미 읽어버린 이상 더 이상 이전처럼 살 수도 없다.

 

이 진퇴양난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념에 따라 살 것'을 지향하는 러시아의 '극단적인 원칙주의'가 갖는 의의란 무엇일까. 이사야 벌린은 '삶과 예술을 가르는 경계를 고의로 뚜렷하게 긋지 않는' 그들의 태도가 윤리적이라고 했다.(p.20) 미하일 바흐친의 말대로 "인간은 예술 속에 있을 때는 삶 속에 있지 않고, 삶 속에 있을 때는 예술 속에 있지 않지만" 러시아인은 자신 안에서 그것들을 하나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19세기 러시아의 법과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는 '범인들의 도덕률을 초월할 수 있는 초인들은 가능하다'라는 니체식의 명제를 현실속에서 '실험'하기 위해 직접 도끼를 손에 쥐었다. (p.18)

 

라스콜리니코프는 윤리적인가? 그는 결국 니체의 가설을 실현한 것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실험'을 했고, 그 실험에 충실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말들의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정신적 뿌리'를 자기 바깥에 두고 있다는 이 불가피한 조건을 "원초적 결여와 공백을 낳는 비극적 사태"로 해석한 것은 라캉이다. 러시아의 이론가들은 같은 사태를 두고 변형과 생성을 낳는 카니발의 무대로 보고자 했다. (p.230)주어진 "말들의 세계"속에서, 그 제약과 한계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며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바꾸는' 삶의 창조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실험도 결국 어떤 창조적 결과를 낳았느냐에 그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아감벤이 '동시대인'이라 명명한 사람들, 이 "자신의 시대와 완벽히 어울리지 않는 자, 하지만 바로 그 간극과 시대착오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더 그의 시대를 지각하고 포착할 수 있는 자"들이 바로 책에 따라 살려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아감벤은 동시대인의 시선이 과거의 불발된 가능성을 향해 있다고 했다. 책에 따라 살기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향해 있다.) 방향은 반대이지만 동시대와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더 동시대에 속하게 되는 역설은 같다고 우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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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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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도 아니고 각하가 읽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보좌관들이 준비한 보고서를 읽는데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인데 그 틈에서도 읽어야 하는 것이 문학이라면 문학은 도대체 얼마만큼의 유용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  그러나 얀 마텔은 그러한 취지로 문학을 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에서 유용한 것들만을 생각하는 시간을 줄이라고 말한다.

 

"스티븐 하퍼 수상에게도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며 혼자서 빈둥대는 시간이 있어야 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이 문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라는 기능적인 문제보다, '이것은 왜 이렇고, 저것은 왜 저럴까?'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는 시간이 있어야 했다." (p.27)

 

얀 마텔은 하퍼 수상에게 조용한 시간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문학을 권한다. 하퍼 수상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바쁘게 하는 것일수록 더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며 달리고 또 달리지만, 얀 마텔은 삶은 본래 조용한 것이며, 정신없이 달리는건 우리뿐이라고 말한다.

 

물론 정신없이 달리는 동안 문학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나 추궁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과 세계와 삶에 대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각하에게는 문제가 된다. 얀 마텔은 각하가 문학 작품을 전혀 읽지 않았다면, 도대체 "인간 조건에 대한 통찰력을 어디에서 얻었겠으며, 인간다운 감성을 어떻게 구축했을지" 우려스럽다고 개탄한다. 그런데 이런 개탄을 옆에서 듣고 있자니, 문학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 각하에게만 추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식은땀이 흐른다.

 

"(존재론적으로) 문학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무지를 추문으로 만든다. 여기서 무지는 가장 나쁜 무지로서 자기 기만을 겨냥한다. 문학은 무디게 갇혀 있는 일상인의 의식이 하나의 코미디, 혹은 거짓된 삶이라는 것을 드러나게 한다."

"(의미론적으로) 또한 몽상의 소산으로서의 문학은 인간의 실현될 수 없는 꿈과 현실사이의 거리를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드러냄으로써, 그 거리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억압되어 있는 가를 나타낸다." (『한국문학의 위상 』, 김현)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써먹을 수 없다는 특징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억압하지 않고, 바로 그것이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힘에 대해 감시체의 역할을 한다고 말한 것은 김현이다. 인간을 억압하는 힘들에 대한 감시 속에서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므로 인간의 자기 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고 했다. 얀 마텔 역시 문학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모순되게 들리겠지만,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 대해 읽어갈 때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해 읽는 것입니다. 이런 부지불식간의 자기점검에서 때때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지으며 인정하게 됩니다. … 때로는 불안감에 싸여 부인하고 싶은 마음에 몸서리를 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는 우리는 더 현명해지고 존재론적으로 더 단단해집니다."(p.43)

 

그런데 이러한 말은 마치 각하 자신을 위해 문학을 읽으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통치자가 더 현명한 사림이 되는 것이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녕 중요한 일일까?

 

"결과적으로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은 고깃덩어리와 천사 사이를 왔다갔다 하게 만든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한국문학의 위상 』, 김현)

 

각하를 비롯한 모든 정치인이, 그리고 시민이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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