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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따라 살기 - 유리 로트만과 러시아 문화 ㅣ 현대의 지성 157
김수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0월
평점 :
"이제 더 이상은 아무도 '책에 따라' 살려 하지 않지만" 책에 따라 살려고 해도, 책에 쓰여진 텍스트를 그대로 실현시킨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오늘날 유토피아의 가능성 자체를 더이상 믿지 않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유토피아를 지상에 실현시키는 것 또한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유토피아utopia는 그 어원상 이 세상에 없는 곳"이다. 유토피아가 실현되는 순간 그곳은 더이상 유토피아가 아니다.
유토피아는 "현존하는 삶의 질서를 대신할 다른 종류의 사회를 상상하는 사고의 작용"이자 결과다. 유토피아가 "현존재의 조건들을 근본적으로 다른 곳에 투사하는 기능"으로서 그 존재의의가 있다면, '책에 따라 살기' 또한 책을 그대로 실현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기 보다 지금의 삶을 반대하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따르는 삶이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끔직한 것이 될 것임"(p.50)은 동의하지만 끔직한 것이라 판단하기 이전에 실현이 불가능한 삶이다. 그런데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따르는 삶은 그 실현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없는 삶이 도덕적, 정신적으로 빈곤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이래저래 책을 읽는다는 건 미쳐버리는 일이다. 책에 따라 살 수도 없고, 지금 이대로 살 수도 없다. 사사키 아타루의 말대로 책을 "반복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어리석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책에 따라 살지 못하면서, 이미 읽어버린 이상 더 이상 이전처럼 살 수도 없다.
이 진퇴양난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념에 따라 살 것'을 지향하는 러시아의 '극단적인 원칙주의'가 갖는 의의란 무엇일까. 이사야 벌린은 '삶과 예술을 가르는 경계를 고의로 뚜렷하게 긋지 않는' 그들의 태도가 윤리적이라고 했다.(p.20) 미하일 바흐친의 말대로 "인간은 예술 속에 있을 때는 삶 속에 있지 않고, 삶 속에 있을 때는 예술 속에 있지 않지만" 러시아인은 자신 안에서 그것들을 하나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19세기 러시아의 법과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는 '범인들의 도덕률을 초월할 수 있는 초인들은 가능하다'라는 니체식의 명제를 현실속에서 '실험'하기 위해 직접 도끼를 손에 쥐었다. (p.18)
라스콜리니코프는 윤리적인가? 그는 결국 니체의 가설을 실현한 것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실험'을 했고, 그 실험에 충실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말들의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정신적 뿌리'를 자기 바깥에 두고 있다는 이 불가피한 조건을 "원초적 결여와 공백을 낳는 비극적 사태"로 해석한 것은 라캉이다. 러시아의 이론가들은 같은 사태를 두고 변형과 생성을 낳는 카니발의 무대로 보고자 했다. (p.230)주어진 "말들의 세계"속에서, 그 제약과 한계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며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바꾸는' 삶의 창조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실험도 결국 어떤 창조적 결과를 낳았느냐에 그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아감벤이 '동시대인'이라 명명한 사람들, 이 "자신의 시대와 완벽히 어울리지 않는 자, 하지만 바로 그 간극과 시대착오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더 그의 시대를 지각하고 포착할 수 있는 자"들이 바로 책에 따라 살려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아감벤은 동시대인의 시선이 과거의 불발된 가능성을 향해 있다고 했다. 책에 따라 살기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향해 있다.) 방향은 반대이지만 동시대와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더 동시대에 속하게 되는 역설은 같다고 우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