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다른 곳에 밀란 쿤데라 전집 3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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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기 표현으로서의 시 쓰기란 자기 도취에 다름 아닌 경우가 많다. 표현할 '자기'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시 쓰기는 대부분 자기를 재확인 하고 치유하는 것에서 만족을 얻으며, 자기보다 조금 더 나은 자기를 표현하는 것에 그친다. 신형철은 이러한 시 쓰기가 거울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거울 앞에서 자기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매만지기 위해 거울을 보고 이정도면 됐다 싶을 때 떠난다." (<아방가르드 가이드> 1강)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오래도록 거울을 들여다보지만 그건 혐오스로운 자기를 철저히 까발리기 위함이 아니라, 사랑받고 찬미받을 수 있는 거울 이미지를 세상에 내보이기 위함이다. "시라는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도취하는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수록 상상의 이미지 속에서 떠다닌다. (『밀란쿤데라 읽기』, <서정의 시대>, 방미영)

 

"그는 이 구절을 큰 소리로, 선율적이고 비장한 목소리로 여러 번 읽으며 열광했다. 이 시의 근원에는 욕조 안의 마그다가 있고 욕실 문에 얼굴을 바싹 갖다 댄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 체험의 울타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 위에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그가 느낀 혐오감은 저 아래 있는 것이었다. 저 아래에서 그는 두려움에 질려 손이 축축해지고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여기, 이 위에서, 시 속에서 그는 자신의 초라함과 아주 멀리 떨어진 저 위에 있었다. 열쇠 구멍과 자신이 비겁하게 굴었던 사건은 이제 그가 딛고 뛰어오르는 발판일 뿐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방금 겪은 것에 종속되지 않았고, 그가 방금 겪은 것이 그가 쓴 것에 종속되어 있었다."(p.91)

 

물론 모든 시인이 야로밀과 같이 "시의 영사막에 포착된 자기 얼굴이 사랑받고 찬미받기를 바라는 의도로 세상에 자신의 자화상을 내보이는 자"는 아니다.

 

"오로지 진정한 시인만이 시라는 거울의 집이 얼마나 서글픈지를 안다. 유리창 너머에는 멀리서 울리는 총격 소리, 떠나고 싶어 불타는 마음이 있다. 레르몬토프는 군복 단추를 여민다. 바이런은 침대 머리맡 탁자 서랍에 권총을 넣어 둔다. 볼케르는 자신의 시구절 속에서 군중과 더불어 행진한다. 할라스는 저주를 시로 쓴다.다. 마야코프스키는 자기 노래의 목을 짓밟는다. 찬란한 전투가 거울 속에서 맹위를 떨친다."(p.473)

 

쿤데라의 소설은 자기 도취의 황홀경에 빠져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마저 버리는 괴물이 되어버린 한 서정 시인의 이야기이지만, 이 "젊음이라는 함정, 혁명이라는 함정"이 우리 모두의 "인생 어느 길목에 놓인 덫"임을 느끼게 한다. (<서정의 시대>, 방미영) 시를 쓰지 않아도 빠질 수 있는 이 함정을 어떻게 피해갈 수 있을까. '진정한 시인'이 되는 방법밖에 없는가?

 

첫 문단에 등장했던 신형철을 다시 참조하자면 그 방법중 하나는 시 쓰기가 아닌 시 읽기를 배우는 것이다. "자기 표현의 욕구를 식히고", 아마추어처럼 시에서 익숙한 모습만을 발견하고 위안을 받는 태도를 거두고, 대신 자기로부터 떠나는 훈련으로서의 시 읽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 프로의 시 읽기는 "내가 알고 있는 것에서 빠져나가는 것들을 나에게 동일화하지않으면서 붙들고 늘어지며, 나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인데, 말만 들어도 지겹고 힘든일처럼 보이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므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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