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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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곤


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돌베개.


  아르곤, 원소 주기율표의 가장 첫 번째에 있는?

  아르곤이 검색어에 오르락내릴 때 내 반응이었다. 화학 선생님의 탁월한 지도로 주기율표를 완벽히 외웠던 시절은 까마득해지고 마치 알파벳 순서에 따라 ‘A’가 첫 번째인 것이 맞는 양 아르곤이 첫 번째인 것이 당연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잠시 생각해보니 이건 다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 때문이다. 그 책의 목차 첫 번째에 아르곤이 자리하고 있다. 내 기억은 이렇게 퇴화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의미없이 외웠던 기억은 희미해져 가고 주기율표는 앞으로도 딱히 인생에서 활용될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각인하며 화학자인 프리모 레비의 전공과 관련된 이야기인 줄 알고 프리모 레비의『주기율표』는 일찌감치 제껴두었던 책이다. 하지만 아유슈비츠에서의 경험을 얘기하는 프리모 레비의 저작 중에서 『주기율표』는 형식적인 면에서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이 책에서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인생을 원소 주기율표의 원소에 대입해 이야기한다. 내겐 낯선 원소의 특징이 그의 삶과 맞물려 이야기되는데 단순히 옛시절을 회상하고 있지만은 않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그의 삶은 화학자로서, 과학자로서 이루어졌겠구나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과학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열정적이었던 모습들이 나타나고, 역사와 철학에 관한 성찰도 담겨 있다. 원소의 성질에 대해 잘 모르지만 원소의 성질에 대입한 철학적인 사유는 상당히 아름답게 느껴졌으며 프리모 레비가 얘기하는 대로 원소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 속에는 이른바 비활성 기체라고 하는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박식하게도 그리스어에서 따온 진기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각각 '새로운 것'(네온), '숨겨진 것'(크립톤), '움직임 없는 것'(아르곤), 그리고 '낯선 것'(제논)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들은 정말로 활성이 없어서, 그러니까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하고 있어서 어떤 화학 반응에도 개입하지 않고 다른 원소와 결합하지도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비활성 기체는 수세기 동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아르곤은 비활성기체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다고 한다. 전구, 진공관, 금속의 생산과 제조, 반도체 분야 등에서 널리 쓰이는 이유일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선조들(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지방에 정착한 유대인)이 이런 비활성 기체와 비슷하다고 얘기한다.

  “물질적으로 활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이 그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주기율표의 많은 원소들 중에서 아르곤을 첫 번째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가 겪은 일은 혼자만의,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한 족(族, group)이 겪은 일이라고 말이다. 그가 줄곧 전쟁과 아우슈비츠에 관한 기록을 남기는 이유도 잊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아르곤으로 시작되는 첫 이야기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비활성 기체가 “희유(稀有) 가스”라고 불린다는 점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레비는 또 말한다. “그 양은 이 지구상에서 생명체의 흔적이 유지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이산화탄소보다 스무배 또는 서른 배나 더 많은 양이다.”라고.

  인종법이 공포되었고 프리모 레비는 외톨이가 되었다. 유대인에 대한 정체성을 확고히 가지고 있지 않았어도, 한세기 전부터 이탈리아에 정착한 조상의 후손으로 이탈리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무도 적대적인 말과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불신과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를 느낄 수 있었다고 레비는 회상한다. 그런 레비에게 주기율표가 가지는 의미는 무언가.

  

인간의 고귀함, 수만 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얻은 그 고귀함은 물질을 정복하는 데 있으며, 내가 화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는 바로 그 고귀함에 충실하기 위함이다. 물질을 정복한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이며, 물질을 이해하는 것은 우주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가 요 몇 주 동안 힘들게 풀이법을 배워온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한 편의 시이며,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소화해온 그 어떤 시보다도 고귀하고 경건하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주기율표는 압운까지도 들어맞는다. 지도 위의 세계와 실재 세계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 다리를 찾는 사람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 아우텐리트 교본 속에, 연기로 가득 찬 실험실 안에, 우리 미래의 직업 속에 있다.


  『주기율표』는 화학자인 레비에게 단순히 원소의 특징을 알려준다는 의미 이상이었다. 레비는 이 화학과 물리학을 통해서 당시 휩쓸고 있던 그 파시즘의 광폭을 이겨내려 힘쓰고 있던 것이었다. 학문적 순수성으로 이 파시즘의 허위를 잔혹함을 찾아가며 인간에 대한 고귀함을 인식하는 방법이었다.

  레비는 증류는 아름답다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느리고 철학적이며 조용한 작업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문장에서 당연 떠올리고 연관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증류. 순수한 것을 분리해내는 작업. 만족스러운 순도를 얻는 이 증류는 신성시되어왔고 종교적 행동으로도 여겨진다. 하지만 물질의 증류는 아름다웠을지언정 히틀러의 인종분리는 아름답지 않았다. 순수한 인종을 분리해내는 히틀러의 사고는 결코 철학적이지도 조용하지도 않았다. 무개념이었고 난폭한 광기로 행해졌다. 증류가 가지는 신성하고 종교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다.

  레비가 겪은 일이 한 개인의 경험이 아닌 것처럼 인종주의자 히틀러라는 범죄인이 개인적으로 저지른 일만도 아니다. 레비는 수용소생활에서 만난 독일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그에게 편지를 띄운다. 하지만 그 독일인은 아우슈비츠에서의 사건들을 전 인류의 탓으로 돌렸다. 이에 대해 레비는 단연코 주장한다. 그들이 아우슈비츠를 만들었으며, 그러니 아우슈비츠에 대해서는 모든 독일인이 대답해야만 한다고.

  역사의 청산이란 말이 적확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히틀러와 나치로 대변되는 독일인들은 이 문제에 관해 열의를 보이고 있다. 인종학살에 대해 참회하며 전범자 처벌을 국가가 나서서 행하고 있고 피해자들 역시도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런 경험들로 나타난 수많은 자료들을 토대로 전인류가 나치의 인종학살에 대해 기억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독일의 행동들을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같은 경험에서 피해자인 한국은 어떤가. 국가가 나서서 피해자들을 억압하거나 외면하고 가해자를 옹호하고 있다. 가해자의 반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이에게 계속 용서한다고 용서를 받아 달라고 구걸하고 있는 형국이다. 가해자의 편에 서서 피해자를 바라보며, 가해자들이 승승장구하는 나라. 생각해보면 히틀러와 나치의 만행과 일본인의 만행이 다른 것이 무엇이 있는가. 유대인 학살과 생체실험처럼 일본 역시 731부대와 마루타, 위안부 학살의 만행을 자행했다. 이 역사적 사실이 전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되지 못하는 이유 역시 일본인이 반성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전에 피해자인 한국이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해결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대학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지식인’이라는 ‘사회지도층’이라는 한 인간의 막말은 이어졌다. “위안부는 끼가 있어서 따라간 것”이라는 말이 이 한 ‘개인’의 그릇된 사고방식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 끔찍하다. 제 한몸 잘 살기 위해, 권력을 갖고 돈을 갈취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제게 맞게끔 퍼뜨리는 한국의 지배자들이 있는 한 한국은 이 상태로 계속 비활성기체로, 아르곤으로 머물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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