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 같은 시와 삶

 

실비아 플라스 시 전집

 

   3월의 꽃샘추위가 시작되었다. 눈이 내린 곳도 있다. 남쪽 지방에선 겨울에도 보지 못한 눈이 삼월에만 연달아 내리던 때도 있었다. 3월은 봄인데, 꽃샘추위라고 부르기엔 괴상한 날씨, 그것은 점점 이상기후라 불렸다.

    3월이 봄이란 걸 안다. 그만큼 3월 초엔 꽃샘추위가 있을 것을 안다. 추위는 매섭지만 꽃샘추위라는 귀여운 말에 가려, 곧 따쓰해질 것을 알아서인지 놀랍거나 불안하거나 하지도 않다. 봄이라는 따스한 기운은 그렇게 마음 속에 스며 새겨지는 모양이다. 3월만큼, 봄이라는 느낌은 2월에도 느껴진다. 2월이라는 달력을 보는 순간부터 벌써 봄을 느끼며 상승한 기온과 좀더 따뜻해진 햇살을 느낀다. 그런 2. 이제는 2월하면 한 작가가 떠오른다. 실비아 플라스. 안타깝게도 이 강렬한 이미지는 211일 생을 마감한 실비아 플라스의 생애에서 온다. 다른 어떤 말도 작가의 작품 구절도 아닌 작가의 생애에 대한 한 문장. “그날 영국은 100년 만에 가장 혹독한 추위였다.”

   이런 기분이었을 거라고. 봄에 느끼는 꽃샘추위의 느낌일 거라고 그날을 생각한다. 211일의 날씨가 실비아 플라스를 삼키고 추위보다 더한 고독와 배신과 우울이 작가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날.

    천재 시인이라 불리는 예술가의 비극적 마지막이 강렬하게 박혔지만 작가의 시 또한 강렬한 이미지로 사로잡는다. 실비아 플라스 시전집은 1956년 이후에 쓴 224편의 작품과 1956년 이전에 쓴 시 가운데 50편이 수록되었다. 이 책은 실비아에게 괴로움을 안겨준 남편이었던 테드 휴스가 엮은 것이다. 테드 휴스는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들은 지운 채 실비아의 작품을 정리했다고 한다.

   실비아는 문단에서 페미니스트 시인으로도 불리는데 그것은 실비아의 시가 여성에게 억압적이었던 시대, 여성에게 가해진 이 모순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 비평가들이 실비아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시의 언어가 아닌 개인적인 경험(아버지의 죽음과 자살 시도, 남편과의 이혼 같은 것)과 연계하는데 비해 1980년대 페미니즘 문학비평가들은 플라스의 시에 나타난 분노의 목소리를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여성의 격렬한 저항으로 재평가하여, 여성 문학의 신화혹은 페미니즘의 아이콘으로 부각한다(p657).”

   실비아의 시를 읽어 내려가기는 쉽지 않지만 이미지만큼은 강렬하다. 전체적으로 음울한 잿빛 이미지를 심어준다. 시를 읽다보면 반복적으로 뇌리에 남는 단어들, 울분과 결의의 소리들에 명징한 자의식을 찾고자 하는 실비아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쨌든 몇 년을 같이 산 전남편이자 시인인 테드 휴스는 실비아의 시쓰기에 대해 말하길 내면의 상징과 이미지에 큰 뿌리를 두고 있다했다. 실비아의 내면 속에 가득찬 것은 고뇌일까. 어릴 적부터 시를 쓰던 아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내면을 찾아들어갔을까. 외적인 사건들이 실비아의 생애에, 시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다. 분명 아버지와 남편과의 관계들은 영향을 주었겠지만 오로지 그것에 갇혀 있지는 않을 실비아의 시는, 읽고 있다 보면 마음이 힘겨워진다.

 

내가 한 사람을 죽인다면, 나는 둘을 죽이는 셈이지.

자기가 아빠라고 말하며,

내 피를 일 년 동안 빨아 마신 흡혈귀,

사실을 말하자면, 칠 년 동안.

아빠, 이젠 돌아누워도 돼요.

 

당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혀 있지.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당신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지.

그들은 춤추면서 당신을 짓밟지.

그들은 그것이 당신이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지.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

- 아빠

 

   실비아 플라스의 대표작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과 더불어 충격을 안겨준 아빠의 구절이다. 201640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김경욱의 아침의 문은 실비아 플라스의 이 시를 인용하고 있다. 이 시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나치와 유대인으로 설정하며 더 극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삶에 대한, 사물에 대한 시선. 내면의 갈등은 끝이 난 것인가. 오래도록 길들여지고 관념화되어 버린 믿음이 조각나는 것, 감정과 이성을 끝없이 되뇌며 마침내 분노와 울분으로 내뱉는 말. 신화화된 관념을 깨뜨리는 일은 신화를 쌓는 일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힘들고 어렵다. 삶의 고됨이 고통이 울분에 찬 말로써 해소될 수 있을까. 갈등, 공포, 고뇌, 울분들. 그 모든 것들을 내면속에 넘치도록 담고서 삶을 지탱한 실비아의 자의식은 시대와 실비아를 둘러싼 관계들과 그녀 자신의 관념의 산물이다. 실비아가 지향하는 삶은, 자아는 어디로 향하기를 원했을까.

하얀

고다이바처럼, 나는 벗어버린다.

과거의 유물과 과거의 핍박을.

 

그리고 이제 나는

바다의 광채 같은 밀밭을 휘젓는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벽에서 녹아내린다.

그러면 나는

화살이고,

 

새빨간 눈,

아침의 큰 솥 안으로

자살하듯 돌진해서 뛰어드는

 

이슬이다.

- 에어리얼

 

   실비아의 생이 유동치지 않고 평안하게 머물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인해 못내 울분을 토하고 있을 듯하다. 남겨지게 만들어버린 실비아의 아이들과 더 풀어내지 못한 울분들. 벗어버렸을 그 에어리얼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아니, 절반만 드러낸 채 시인은 떠났다. 시인의 생애도 시인의 언어도 꽃샘추위처럼 서늘하고 매섭다. 또한 그 한기가 청아함을 비장미를 씁쓸함을 준다. 서린 말들이 한없이 이어지는 시어들 속에서 푸욱푹 눈발 속에 빠지듯 실비아 플라스의 시 속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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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 무용한 시간


 시를 읽는 즐거움은 오로지 무용하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하루 중 얼마간을 그런 시간을 할애하면 내 인생은 약간 고귀해진다.


 김연수, 우리가 보낸 순간 :시


   안도현 시인은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를 읽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된다고 했다. 김연수 소설가는 시를 읽는 즐거움은 오로지 무용하다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김연수 작가가 쓴 <우리가 보낸 순간-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은 각각 시와 소설로 나누어 시와 소설을 소개하고 있다. 시편은 시인이 읽은 시에 대해 소개하고 그에 대한 감상들을 적었다. 김연수 작가가 소개하는 시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 대한 감상을 보고 있노라면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얼핏 소개하고 있는 시와 그의 감상이 따로 논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꼭 소개한 시에 대한 감상이나 시인에 대해 아는 얘기들을 말하고 있지 않다. 마치  시를 읽는다는 것이 “무용하다”라고 말하지 않았냐는 듯 그 말을 다시 새기게끔 한다.

  그러니까 자유연상, 의식의 흐름이 느껴진다. 나 역시도 시를 읽거나 글을 읽다 보면 그것이 말하는 바와는 상관없이 나만의 상상이나 기억 속에 빠지게 되는 일이 있다. 거기에서 가리키는 것과는 상관없이 특정한 이미지, 특정한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환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작가의 그런 모습을 자주 만나다 보니 웃음이 나오면서 좀 편안해지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그러니까 시를 읽는데 “쫄” 필요가 없다라고 해야 하나.

  막상 작가들의 독서법은 다를 것이라 생각하기에 그들의 글쓰기나 독서법을 궁금해하고 읽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하는 방식은 특별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읽는 것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너무 나의 방식에 소극적이었구나, 한편 타인의 방식에 너무 민감하구나 생각하게 된다.

  타인의 독서법을 배척할 필요는 없지만 “누구의 방식”에 너무 매몰되어 매달리지 않아도 좋은 것을. 그리고 편안하게 내 식대로 읽어가며 마음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정말로 시를 읽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무용함을 달래주는 것이기도 하다. 인생이 얼마만큼 무용해야 시를 읽을 마음이 들게 될까라는 생각도 조금 하면서 김연수 작가의 말대로 그럼에도 시를 읽고 난 날이면 소설이나 다른 글을 읽은 날들보다 오히려 더 쾌감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런 것 같다. 한뼘쯤 고귀해지는 느낌. 그것은 시어를 되뇌며 조금 더 머언, 머언 시간을 돌아보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은 급박하고 여유없는 맘을 한번씩 누그러뜨리는 그런 역할을 한다.

  시에 대한 감상평을 보다가 정말로 소리내어 웃은 부분이 있다. 바로 이 부분이다.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는데 경주 양동마을 소식을 전하더군요. 기자는 올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그 조용한 시골 마을로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으나, 제대로 된 부대시설과 볼거리가 없어서 대부분 마을만 둘러보고 황급히 발길을 돌린다면서 대책이 시급하다고 진단하더군요. 옛 정취가 고스란히 보존됐다는 이유로 세계문화유산이 된 마을에서 부대시설과 볼거리를 찾는 사람들이라니. 그렇게 고요하고 적적한 마을에 가서도 그리운 사람 하나 떠올리지도 못하고 황급히 발길을 돌려야 하는 사람들이라니. 경주 양동마을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대책을 마련하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대책이 시급한 것은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분들, 정말 대책이 시급합니다. 나라에서는 그리운 사람 하나씩 만들어주세요. p72


  이것은 서안나 시인의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에 대한 감상이다. 시인은 이 시를 읽으며 경주 양동마을을 떠올린다. 하지만 병산서원은 경북 안동에 있는 곳이다. 이 시를 떠올리며 생각이 나아가 경북 경주의 양동마을로 이어지고 양동마을에 관한 기사를 떠올리고 “그리운 사람 하나씩 만들어 주세요”라는 마지막 글을 읽을 때까지 나는 계속 웃었다. 즐거운 웃음이었다.

  그렇다. 이 책을 다 덮고 나서야 무용하다와 고귀해진다의 말의 의미를 절로 실감하는 중이다. 그리고 김연수 소설가가 시들을 소개하며 적은 감상의 말들이 왜 그렇게 내 ‘갈 길로 가리오'의 형태를 띠는지도 알겠다. 이 책은 비평집이 아니니까. 문학이론 책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일상생활 속에서 시와 함께 하는 방식은 이렇게면 충분하다. 내가 시를 읽다 딴 생각에 빠져도, 그것도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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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


 

 안도현,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이란 제목이 와 닿는다. 찌질함과 함께 애잔함이 섞여 있다고 느낀다. 비오는 새벽녘 창문을 열어 들어오는 빗소리와 바람 소리를 함께 맞이할 때 떠올린 말한 제목이라고 해야 하나. 제목마저 시답다.

  이 책은 시인 안도현이 시를 읽으며 노트 한쪽에 적어 두었거나 다시 읽고 싶어 시집 한 귀퉁이에 적어둔 71편의 시를 묶은 것이다. 초판이 1999년이니 여기에 실린 시는 모두 1999년 이전 출간된 것이다. “열 몇 살 무렵 문학에 눈뜨기 시작할 때 좋아하던 시”, “스물 몇 살 무렵 문학청년 시절에 좋아하던 시”, "내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시", "내가 사랑하는 감동적인 시", "내가 사랑하는 젊은 시인들의 시"로 나누어 시를 소개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 시에는 안도현 시인이 이 시를 읽을 무렵의 감상과 이 시와 얽힌 개인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가령 청년 시절 좋아한 김경미 시인의 <비망록>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감정이 많다고. 신춘문예에 투고하고 나서 당선 소감도 미리 써 놓고 상금을 받으면 갚을 생각으로 외상 술을 마시며 신문사로부터 연락을 기다렸는데, 결과는 낙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신문에는 이 시가 실렸다. 그날 시인은 괴롭고 외로웠지만 시를 다 읽고 나서는 괴로움과 외로움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고 그날의 기억을 이야기한다.

  안도현 시인은 시인이 된다는 것은 시를 읽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이지 않아도 시를 읽는 즐거움은 있다. 다만 시는 다른 글들과 달라서 늘, 여유라는 게 있어야 잘 느껴지는 것 같다. 시행과 시어를 읊조리며 점점이 퍼지는 여운, 어느 순간 가슴에 와 닿는 문장들. 그래서 시는 각을 잡고 읽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문득 만났을 때 심장에 전달이 되고 머릿속에 남는다. 그래서인지 만나기 어려운 시들을 다른 이의 감상과 사연과 함께 소개받는 일은, 여운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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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가득한 남해 금산



이성복



  바다로부터 산으로 오르는 돌무더기를 밟으며 숨을 헉헉거릴 때도 있었지만 귓가에선 계속 이 구절이 맴돌았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 남해금산 中


  내가 밟는 어느 돌 속에 여자가 묻혀 있을까. 오랜 시간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불었으니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간 지 오래되었을까.

  그렇게 남해 금산 돌무더기를 오른 첫 해, 뒤따르는 바다 내음보다 디디는 돌에 더 깊이 마음을 새겼던 때가 있었다. 돌 속에 묻혔는지 떠나갔는지 모를 한 여자 때문에. 그 여자는 떠나갔고 돌 속에 따라 들어간 마음으로 금산을 오르면 가까이 있는 하늘과 저 멀리 보이는 바다와 함께 나 또한 푹 잠기어 있을 수 있었다.

  산 꼭대기, 반대편에 이르러서야 등산길이 아닌 찻길이 있음을 알았지만 처음부터 금산을 가리라 했다면 찻길로 바로 들어서 한뼘 한뼘 디디고 올라온 돌무더기를 잊었을 것이다. 바다로 가고, 그리고 산으로 올라 선 것이 금산을 생각하기엔 좋은 운이였다. 이후로는 찻길로 금산 보리암으로 가게 되는 걸 보면.

  이성복의 시 <남해금산>은 금산의 돌을 밟아 올라가며 느끼는 여운이 시와 맞물려 오래 각인되어 있다. 표제어인 이 시는 시집의 마지막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 때문에도 이 시를 다시 한번 더 보게 된다. 시집을 읽다 보면 반복되는 이미지, 단어들이 있다. 이 시집에선 치욕과 어머니, 누이란 단어가 그랬다. 그래서인지 시집을 덮고 난 뒤에서 쓸쓸한 정서와 막막함이 감도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치욕이여,

모락모락 김 나는

한 그릇 쌀밥이여,

꿈꾸는 일이 목 조르는 일 같아

우리 떠난 후에 더욱 빛날 철길이요!

- 치욕의 끝


  꿈꾸는 일이 목 조르는 일이 이 먹먹함이여! 우리의 삶엔 어떠한 일이 있었기에 이다지도 치욕을 떨궈내지 못하고 바스라져 가는 걸까. 그 치욕은 한 개인의 삶일까, ‘우리’의 삶이었을까.


  “삶은 내게 너무 헐겁다”,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묶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시 안개가 내렸다 이곳에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있었다 …… 이곳에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있었어! 가담하지 않아도 창피한 일이 있었어!”


  소설 테스가 연상되는 ‘테스’라는 시를 보며 “누이만 아는 비밀”을 연결지어 테스가 겪은 일과 같은 치욕을 떠올려 보았다가 결국 그것은 먹는 일, 밥이라는 문제와도 연결됨을 떠올렸다. 테스의 일생이 떠올려지면 이 이야기의 치욕과 누이와 어머니, 그리고 또 반복되는 ‘먹는’ 이미지들이 삶의 비애와 치욕의 원인이 되는 것일지 모른다. 밥벌이를 위해 참고 당해야 하는 일련의 모든 견딤과 치욕들. 결국 살아가기 위해 치욕을 견디지만 그 치욕이 더욱 치욕스러워지는 ‘삶’이라는 공간들. 


  기억에는 평화가 오지 않고 기억의 카타콤에는 공기가 더럽고 아픈 기억의 아픈, 국수 빼는 기계처럼 튼튼한 기억의 막국수, 기억의 원형 경기장에는 혀 떨어진 입과 꼭지 떨어진 젖과…… 찢긴 기억의 천막(天幕)에는 흰 피가 눈내림, 내리다 그침, 기억의 따스한 카타콤으로 갈까요, 갑시다, 가나니까, 기억의 눅눅한 카타콤으로!

 - 기억에는 평화가 오지 않고


  그래서 잊고 싶은데,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그래서 희망을 꿈꿀 것인가. 희망은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 것인지, 어떤 모습을 희망으로 불러야 할 것인지 여전히 먹먹한 채로 어머니를 찾는다. 어머니는 빗속에 젖어서도 공사장에서 못을 빼면서도 그렇게 그 자리에 묵묵히 있다.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미지(未知)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 강


  시가 입속에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각인될 때는 감각적인 한 구절 때문이기도 하다. 그 시 하나가 좋아서 한 시구를 되뇌게 된다. 하지만 <남해금산>처럼 시집 전체가 한 이야기로 엮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시집도 있다. 어렸을 때는 감각적인 구절 하나에 이게 뭐지, 이런 표현을, 이라며 쳐다보던 시구들에 이제는 이미지를 찾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을 푸욱 잠기게 하는 것이 즐거움이기보다 안개 가득한 먹먹함이라는 것을 남해금산은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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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잔치는 시작된 적이 없다


  유교의 영향일까. 우리는 ‘나이’에 관해 꽤 민감하다. 인생을 태어난 순서로 서열화하여 호칭을 만들고 예의를 강조한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다는 걸 말하는 거다. 덧붙여 인생을 돌아보는 순간들도 정해져 있는 것 같다. 내가 무엇을 느끼고 깨닫는 순간은 당연하겠지만 자동적으로 무언가를 느끼고 깨달아야 하는 ‘때’가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래서 그렇게 스물, 서른, 마흔이라는 나이에 예민해지고 그에 관한 무수한 글이며 노래며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 거다. 아니, 반대로 이렇게 쏟아져 나오니까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건가?!

  세월의 축적만큼 인생에 대한 회한과 감수성 또한 축적되어 그렇기도 하겠지만, 정신적으로 자극하는 것은 ‘나이’에 대해 각인된 의미부여 때문이다. 이것을 부추긴 대표적인 사람은 공자다.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발달의 결정적인 시기가 있다. 그것은 신체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정신적인 것에 대한 시기를 공자가 말한 나이에 대한 약칭과 더불어 어쩌면 사회가 강요하는 느낌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의 성과주의 문화도 영향이 있겠지만.

  공자는 논어, 위정편(爲政篇)에서 나이에 관해 지학(志學), 이립(而立),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 종심(從心)이로고 말했다.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고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으며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되었고

일흔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공자의 이 말은 오랫동안 회자되어 나이대에 도달할 때면 스스로를 돌아보는 강제적인 말들이 되어 버렸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으며 왈칵하면서 우리는 어느 나이에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한 것에 절망하고 지나간 세월에 아련해 한다. 다가올 세월에 대한 꿈꾸기나 희망은 약해지고 마는 감수성과 사회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시인이 「서른, 잔지는 끝났다」라는 시집을 낸 것이 1990년대. 당시에 이 시집은 후일담 문학이나 여성시의 측면으로 부각되었던 기억이 나지만 어쨌든 나는 ‘서른’이라는 제목에 끌려 이 시집을 선택했다. 거침없이 서른에 잔치가 끝났다고 말하는 시인의 언어, 그리고 끝내는 그것 무슨 상관이냐라던 시의 말. 시인은 후기에 이렇게 썼다.


  “진짜로 싸워본 자만이 좌절할 수 있고 절망을 얘기할 자격이 있고, 온몸으로 실천하지 않았지만 온몸으로 고민한 사람도 있고 어쩔 수 없이 시대의 격량에 휩쓸려 만신창이가 된 심신으로, 다가오는 봄을 속절없이 맞아야만 하는 이도 있으리라. 내 시도 그런 대책없음에서 나온 게 아닌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아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리란 걸

- 서른, 잔치는 끝났다 中


  오랜 시간이 지나 시인은 외국의 유력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의 이야기와 함께 기사에 실렸다. 근로장려금 신청자가 된 이야기를. 그것은 시인의 생애를 가난한 예술가로 보이게 했고 실제로도 이 나라 예술인들은 가난하고 이 나라 청년들도 가난하고 수많은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시대나 지금이나 여전히 격량에 휩쓸려 만신창이가 되고 마는 이들이 있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 선운사에서 中

 

  짧은 잔치라도 벌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지금은 잔치가 시작되지도 않았다.  아무도 잔치맛을 보지 못했다. 짧은 잔치를 벌인 자들도 ‘살아남은 자의 배고픔’ 속에서 살고 있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생의 격량으로 휩쓸리는 청춘의, 그런 시절의 서른들이 살고 있다.


마치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안다는 듯 완벽한 하나의 선으로 미끄러지는 새


그 새가 지나며 만든 부시게 푸른 하늘


그 하늘 아래 포스트모던하게 미치고픈 오후,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식당 입구에 줄 없이 서 있었다

 - 살아남은 자의 배고픔


 바다, 일렁거림이 파도라고 배운 일곱 살이 있었다.

 바다, 밀면서 밀리는 게 파도라고 배운 서른두 살이 있었다

 - 속초에서 中


  나의 일곱에는, 스물에는, 서른에는, 서른 둘에는 무엇을 배웠을까. 앞으로의 나날들에 나는 무엇을 배우게 될까. 시대의 언어가 나에게 가르치는 서글픈 청춘의 언어들 대신에 나는 나만의 언어들을 배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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