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핸드 타임 -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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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반인반신은 돌연변이 아닌가


세컨드핸드 타임-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이야기가있는집, 2016.


  무언가의 최후는 항상 비장하다. 사라진다는 것은 늘 그렇듯 안타까움을 준다.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라는 소제목의 이 책을 통해 여러 가지가 생각났고 몇 개의 감정이 교차되되었다. 이해의 차원과 이해하지 못함이 뒤엉켰다.

  벨라루스 출신 작가가 고국에 대한 애착을 가지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던 시대의 ‘고국’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를 알았다. 또한 이 책을 기획한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오히려 현재를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의 마음속에 호모 소비에티쿠스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라진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그 최후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살아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스베틀라나 알렉세예비치의 저서들은 한결같이 말줄임표의 문학이라 생각하는데 이 책에서만큼은 말줄임표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이야기를 더하지 못하는 것처럼 쏟아내는 말들의 향연이 인상깊었다. 감정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 속에 뿌리박힌 신념과 오래도록 길들여진 삶의 양식이 인간의 의식을, 행동을 어떻게 감싸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탄핵무효를 주장하는 사람들, 여전히 박정희는 반인반신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의 행동들을 비슷한 관점으로 쳐다보게도 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문제였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이해해서는 안되는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과 함께 이해하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는 생각을 또 하면서 호모 소비에티쿠스를 떠돌았다.  

  변화의 시대를 산다는 건, 참으로 흥분된 일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혼란스럽고 힘든 일이다. 오래동안 시멘트처럼 굳어졌던 소비에트 시대가 종결된 시대, 미국과 양강구도를 형성하던 소련의 몰락이라는 상황에 처한 소련인들의 절규와 기대, 설렘, 혼란들이 이 책속에 살아있다.

  생각해보면 공산주의가 사회주의가 뚜렷히 잘못된 체제라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역시. 각각은 장단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거기에 ‘자유와 민주’라는 부분이 어떻게 정의되고 실현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또한 그 어느 체제나 권력자의 욕망이 민중들과 얼마나 유리된 것인지 그들이 민중이란 조국이란 이름을 통해 얼마나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왔는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를 구현하는 지도자, 권력가들의 가치와 신념, 그들의 욕망이 문제의 핵심이다.

  “스탈린과 닮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운전수도 있었어.”

  대한민국에도 닮았다는 이유로 방송출연을 금지당한 연예인이 있다. 그러니 이것은 체제의 문제라고만 볼 순 없는 아주 단순한 사례다.

  지금도 빈부격차를 발생시키며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게 돈이다. 자본주의에 길들여져 살아감에도 여전히 자본에서 소외된 삶을 사는 이가 많은 까닭에 욕망과는 별개로 자본은 언제나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런데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느끼는 자본의 홍수는 극악할 세계로 느껴질 거란 생각이 든다. 수많은 소비에트들이 넘쳐나는 물질에 황홀해 하기보다 혼란과 공포를 겪는다. 그들의 공포가, 절절하게 이해가 된다.


대체 우리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유연한 사회주의, 인간적인 사회주의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얻게 되었죠? 길거리에는 잔인한 자본주의만이 팽배합니다. 총싸움, 말다툼……. 누가 가게 주인이고 누가 공장 주인인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뿐입니다. 저 위쪽 지도층에는 강도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암거래상들과 환전상들이 정권을 잡았지요. 사방에 적과 맹수들뿐입니다. 자칼들이요!


  그래서 그들은 1990년대에 대한 지독한 향수에 빠진다. 공산주의를 좋아해서, 자본주의에 길들여지지 못해서. 1990년대, 공산주의 붕괴를 원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더 나은 사회로의 희망을 꿈꾸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하나다.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것. 그러나 그 결과는 원하던 모습이 아니어서 그들은 여전히 행복한 미소를 짓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우린 정체 모를 아름다운 삶을 믿었어. 유토피아, 그건 유토피아였어. 당신들은 다를 것 같아? 당신들도 유토피아를 믿잖아. 시장이라는 유토피아를 시장 천국을…….


 스탈린, 레닌, 고르바초프, 옐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상반된 의견을 내놓는다. 각자의 생각에 따라 그들은 긍정과 부정의 이미지를 갖는다. 소련, 스탈린을 찬양하며 공산주의 시대로의 회귀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삶에 대해 적응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가치가 저하된 시대에 물질의 노예로 보이기까지 한다. 수많은 종류의 물질들이 없어도 극도로 가난하지는 않게 모두가 살았던 시대를 그리워한다.


더 이상 동화같지도 않았고, 더 이상 즐겁지도 않았어요. 자유시장을 원하십니까? 자, 원했던 대로 받으십시오! 저와 남편은 엔지니어였어요.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반 이상이 엔지니어였잖아요. 우리를 대우해주는 곳은 없었어요. “가서 설거지를 하세요!” 페레스트로이카는 우리가 이뤄낸 거였어요. 우리가 우리 손으로 공산주의를 묻었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누구에게도 필요 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어요. 어린 딸이 배가 고프다는데 집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시대가 다같이 물질을 나누어 살아가던 시대로서의 이미지만이 아니라 전쟁과 공포의 시대였다는 점이다. 강제노동과 수용소의 생활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내 가족이 내 이웃이 ‘특별한’ 이유없이 밀고하면 몇 년을 수용소에 살았던 기억들을 갖고 있지 않은가.

  지금의 혼란이 과거의 기억을 미화하는 지도 모른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과 현재 사이의 괴리는 그들에게 불안을 조장하기에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없는 그들의 지나간 시대에 대한 향수는 안타깝게 느껴진다.


문제는 옐친이나 푸틴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노예라는 게 문제예요. 노예근성! 노예의 피! ‘신 러시아인’들을 한번 보세요. 벤틀리에서 내릴 때 주머니에서는 돈이 우수수 떨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노예에요. 위에 앉아 있는 두목이 “모두 마구간으로 들어가!”라고 하면 모두 쪼르르 들어갈 거예요. 


  자유라는 것이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하면서도 가끔은 헷갈린다. 자유가 무한정 있지만 따라잡을 수 없는, 내게 주어지지 않는 자유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겠지 생각하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잃었을 때에야 그것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될 것만도 같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자본주의, 좋아요!”라고 적극적으로 외치지 못해서 안타깝다.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 강력한 차르시대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박정희 향수를 꿈꾸는 어른들을 생각했다. 그들의 향수가 진정한 향수인지를. 그들이 그 오랜 시간 길들여진 세뇌가 여전히 갈피를 못잡고 폭언과 폭력으로 나타날 때마다 이해할 수 없음에 답답했는데, 체제붕괴라는 상황에 처한 소비에트인들의 세대간 갈등을 보면서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욕망’을 감정적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벌이는 행태들은 인정할 순 없다.

  국민을 시민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권력을 잡아놓고 개인의 혼란과 향수와 욕망을 이유로 왕과 신을 만들고 거기에 세금까지 뿌리려는 시대착오적인 이 시대의 권력가 자본가들. 지금이 소비에트와 페레스트로이카의 변혁기의 시대도 아니지 않은가. 이미 오래전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나라임에도 1990년대의 소련이 겪는 혼란을 넘지 못한 이들이 나라를 이끌어갈 주체로서의 역량을 가진 자라 말할 수 있을까. 특정한 시대의 이념과 가치를 강요하는 속에 숨겨진 욕망의 내용은 무엇인지 성숙하게 변혁기를 이겨낸 이들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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