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반대하며 - 타자를 향한 시선
프리모 레비 지음, 심하은.채세진 옮김 / 북인더갭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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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로워질 수 있다면


  그곳. 지옥보다 더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그 경험을 전하는 것을 의무라 여기며 『이것이 인간인가』를 썼던 프리모 레비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지 40여 년이 지난 후였다. 그 악몽들이 잊혀지지 않고 몸에 마음에 새겨져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그 고통의 기억을 안고 살았을 시간들이 애틋하고 안쓰럽게 여겨진다.

  이 책은 그가 자살하기 두 해전 출간되었다. 1964년부터 20년 동안 이탈리아 일간지에 기고한 에세이들이다. 제목은 『고통에 반대하며』이지만 그리하여 또다시 그와 뗄 수 없는 아우슈비츠의 기억에 관한 글일 거라 예상했지만 수많은 관심을 가진 작가의 글을 만나게 된다. 그만큼 기존의 그에게 가장 많이 각인되었던 아우슈비치의 고통과 같은 음울함이 아니라 따스하고 호기심 깃든 이야기들, 냉철한 비판과 비평들이 나타나 또다시 애잔함을 더한다. 그에게, 이런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충분한 마음과 역량이 있는데 그가 써내려가고 써내려가야 했던 글들이란, 그 기억들이란. 이렇게 그의 생애를 알기에 책 처음에 나오는 에세이부터가 눈길을 끈다. <우리집>. 특징없는 집을 곱씹으며 드러나는 집과 고향, 그 지난 때에 대한 그리움과 애착이 전해진다.

  그 외 이 에세이들을 보면 화학 전공자이자 화학자로 일한 저자의 경력 때문인지 ‘화학’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 또한 거미, 나비, 귀뚜라미, 벼룩, 딱정벌레, 다람쥐 등등 생물들에 대한 이야기, 자신이 읽은 책과 작가들에 대한 비평과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타영역의 점유’, 다시 말해 타인의 직업에의 침입, 남의 사냥터에서 벌인 밀렵, 동물학·천문학·언어학 영토에서의 약탈에 다름 아닐 터인데, (체계적으로 연구한 적이 없으므로 결코 성과를 얻지 못할 것임에도) 지속적인 매력에 이끌려 영원한 애정을 쏟을 수밖에 없는 모든 학문 영역, 즉 몰래 엿보고 싶고 꼬치꼬치 캐묻고픈 충동을 자극하는 영역의 점유라 할 것이다. p6


  굳이 말하건대 화학자라서인지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비평할 때면 자신의 싫고 좋음을 확실하게 표현한다는 느낌이다. 에둘러 표현한다거나 하는 것 없이. 이런 류의 글들을 쓰게 된 것에 대해 저자는 위와 같이 말한다. 더불어 많은 이들이 화학자가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는지를 묻기에, 물론 호기심에 찬 어조이거나 거만한 태도이거나, ‘두 문화’가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수많은 문제와 위험을 내보인다 하더라도 최소한 권태롭지는 않다는 것”을 독자에게 전할 수 있기를 희망하기도 하며.

  그래서였나 보다. 이 책 속에 ‘글쓰기’에 관한 내용이 많았던 것은. 그래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서나 타인의 글쓰기에 대해서나 명확한 관점을 세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불어서, 그 자신도 글쓰기에 대한 많은 조심과 염려를 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단지 말을 하는 것과 그저 다른 표현 수단이라고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고의 힘을 보여주며 더불어 파괴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상을 더 좋게 발전시키는 방법을 '아는' 누구에게든 어떤 불신감을 갖고 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은 자기 체계를 너무 선호하는 나머지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지나치게 강한 의지를 소유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단순히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히틀러가 <나의 투쟁>을 쓴 뒤에 행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많은 다른 이상주의자들이 충분한 에너지를 갖게 되면 전쟁과 학살을 촉발하리라고 종종 생각했다. p61


  조용조용하게 다가오며 일상의 것들에 대한 과학자식 사고가 더해진 글쓰기로 보였던 글들 속에 종종 드러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작가의 고통과 두려움과 분노가 스며있는 것이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막연히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이 작가에게 글쓰기는 머릿속에 떠올려지는 그 고통의 파편들을 말끔히 지우고 싶은, 조금 더 권태로워지고 싶은 발버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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