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의 글쓰기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수유너머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고 해서인지 제목 때문인지 은유의 글쓰기 강론에선 치열함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글을 쓰고 싶은 수많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글쓰기라는 작법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의 열망엔 어느 정도 ‘미학적’인 부분에의 욕구가 있다. ‘글을 못 쓴다’라는 말 속에 잠긴 것은 그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느껴지는 은유의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삶의 글을 이미 새기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이제 몸을 움직이면 그 글들이 몸에서 빠져나와 책으로 옮겨갈 것만 같은 느낌이다.


우리 삶이 불안정해지고 세상이 더 큰 불행으로 나아갈 때 글쓰기는 자꾸만 달아나는 나의 삶에 말 걸고,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고, 살아 있는 것들을 살게 하고, 인간의 존엄을 사유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p23


  그래서 이 책은 써야 하는 이유, 쓰고자 하는 열망을 끌어내기 보다는 보다 구체적으로 종이 위에 글을 만들어 내는 법에 대한 이야기다. 총 6장으로 구성되어 6장을 제외하고 5장에서 글쓰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은유는 글쓰기는 용기라고 말한다. 솔직할 수 있는 용기라고. ‘잘’ 쓰고자 우린 많은 거짓의 감정을 쏟아내어 글을 만든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글과 다르다면 진정성 여부를 떠나, 더 이상 글쓰기가 진행이 될까.


나는 억눌린 욕망, 피폐한 일상 같은 고통의 서사를 길어 올리는 학인들에게 새 가지를 당부했다. 삶에 관대해질 것, 상황에 솔직해질 것, 묘사에 구체적일 것. 결국 같은 이야기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삶이다. 뭐라도 있는 양 살지만 삶의 실체는 보잘것없고 시시하다. 그것을 인정하고 상세히 쓰다보면 솔직할 수 있다. 상처는 덮어두기가 아니라 드러내기를 통해 회복된다. p63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면 즐겁고 좋았던 일이나 기분일 때보다 고통스러울 때 글을 찾았던 일이 많았다. 이런 일은 주위를 둘러봐도 그런 것 같다. SNS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종이 대신에 그곳에 마음을 기록한다. 그들이 마음을 강하게 표현하는 날들은 그들 신상에 뭔가 좋지 않은 변화가 있었을 때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런 것일까, 불행이 우리의 글쓰기의 욕망을 부추기는 것일까. 그래서 이때의 상황에 잘 감응하다 보면 나만의 언어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고통을 마주하여 그 고통을 끌어내는 방법으로 은유는 더 많이 생각하고 느낄 것을 권유한다. 좀더 많이 읽으면서. 그것이 “감수성의 근육을 키우고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능력”을 찾아준다고 말한다. 함께 글을 읽고 강독하며 글을 쓰고 합평하며 생각을 키우는 그것이.

  

 이 세상에는 나보다 학식이 높은 사람, 문장력이 탁월한 사람, 감각이 섬세한 사람, 지구력이 강한 사람 등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고도 많다. 이미 훌륭한 글이 넘치므로 나는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내 삶과 같은 조건에 놓인 사람,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나의 절실함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나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또 기운이 난다. p132


   은유의 글쓰기 강의는 이렇게 감수성의 근육을 키우는 방법을 함께 한다. 나만의 글쓰기에 자신감을 북돋우며 여전히 강의를 지속하고 있다. 특히 은유는 자기의 글쓰기에서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쓰는 르포나 인터뷰에 관한 글쓰기를 제안한다. 그리하여 이 책에는 실제 은유의 강의를 듣는 학인들이 쓴 글이 실려 있다. 은유는 르포나 인터뷰가 서로의 삶을 보듬는, 그리고 지탱하는 매개라고 말한다. 이들의 글을 읽으면 은유가 말한 글쓰는 방법에 대한 강의의 말들이 다시 떠올려진다. 


 약자는 달리 약자가 아니다.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할 때 누구나 약자다.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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