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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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무개 박사


밀크맨, 애나 번스, 창비, 2019.


“내게 딸이 있다면, n번방 근처에도 가지 않도록 평소에 가르치겠다. 내 딸이 지금 그 피해자라면 내 딸의 행동과 내 교육을 반성하겠다”

- 경제연구소 박사라는 자 曰. 2020년


“사진 찍어 돌린 남자가 90% 잘못한 것이지만 처음 만난 사이에 술에 취해 잠이든 여성도 10%의 잘못은 있어 보인다“  - 의학 박사라는 자 曰. 2015년


  숨쉬는 것처럼 이런 말을 들어왔다. 박사뿐만 아니라 검사, 의원, 교수, 사장, 회장, 기자 할 것 없이. 회장이 호텔방에서 검사가 별장방에서 경찰이 클럽에서 행했던 ‘그 일’에 피해자를 공격하고 탓하며 혐의없음을 만들어주니 끝없이 ‘방’들이 생겨나는 거다. 무한히 뻗어나가는 n번방. 박사가 무한 증식한다. 

  맨부커상 수상작(2018) 『밀크맨』을 생각한다. 폭력 상황에 노출된 열여덟살 익명의 소녀가 그 상황과 심정을 토로하는 소설, 특정 장소도 인물도 지칭하지 않지만 뚜렷하게 상황이 인식되는 소설, 상당한 몰입감으로 소녀의 말에 귀기울이게 되는 소설이다. 언제 우리가 피해자의 목소리에 제대로 귀 기울인 적 있던가. 지치지 않고 이야기하는 소녀의 언어는 그렇게라도 해야만 숨쉴 수 있을 거라는 외침이며 증언이기에 한마디도 놓칠 수 없다.

  소녀가 살고 있는 마을은 길 하나를 두고 대치중이다. 무장세력과 무장세력 간의 테러와 보복이 극에 달한 ‘일촉즉발인 사회’다. 북아일랜드 출신인 작가이기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세력과 저지하려는 세력이 대치했던 1970년대 북아일랜드 상황을 배경으로 생각하게 되지만 작가는 그 어떤 구체적 지칭을 하지 않는다. 길건너, 물건너, 국경너머와 같이 장소를 말하며 북아일랜드만을 한정하지 않은 확장된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한국도 떠오르고….

  십남매의 가운데아이, 열여덟 소녀는 책읽기를 좋아하며 길을 읽으면서도 책을 읽는다. 어느날 소녀에게 한 남자가 다가온다. 사람들이 밀크맨이라고 칭하는 우유배달부, 하지만 우유배달부가 아닌 마흔한살의 유부남인 밀크맨은 소녀가 있는 곳곳마다 불쑥 나타난다. 소녀는 ‘개인공간 침해’라는 게 뭔지 몰랐고 ‘불편한 느낌을 가지더라도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을 꺼리거나 거부할 권리가 있음’도 알지 못했다. ‘신체 폭력이 없는 한, 명백한 언어적 모욕이 가해지지 않는 한, 눈앞에서 조롱당하지 않는 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게 기본 원칙이었으니, 그러니 일어나지 않은 일에 피해를 당했다고 할 수도 없었던’ 소녀는 밀크맨으로 인하여 불안과 공포의 일상을 보낸다. 소녀는 밀크맨의 행동에 대해 가족에게도 어쩌면 남자친구에게도 이웃 사람들에게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만약 내가 “『아이반호』를 읽으면서 경계 도로를 따라 걷는데 그 사람이 차에 타라고 했어”라고 말한다면 “대체 왜 위험한 경계 도로를 따라 걸었고 왜 『아이반호』를 읽었는데?”라는 말이 돌아올 것이다. 만약 내가 “저수지 공원에서 러닝을 하는데 밀크맨이 나타나서 나하고 같이 달렸어”라고 한다면 “그렇게 위험하고 수상한 곳에 대체 왜 간 거고 러닝이라니 그런 걸 왜 했니?”라는 말이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제대로 알려 하지 않고 소녀와 밀크맨이 불륜관계이고 소녀가 밀크맨을 유혹한 것이라 소문을 부풀린다. 근거는 없다. 소녀가 길을 걸으며 책을 읽는 게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라 탓한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이유는 하나, 무장독립투쟁군조직의 주요 인물이라는 ‘밀크맨’이 가진 지위 때문이다. 사실과 진실에 무관하게 권력에 대한 맹목적 믿음과 충성은 열여덟 소녀의 삶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눈에 보이는 폭력이 마을 전체를 휘감은 상황에서 밀크맨과 가족과 친지와 이웃의 이 폭력까지 견디며 살아간다. 마을 사람들은 ‘정치적인 것과 무관한 죽음이 일어나면 당황하고 불안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하면서 그들이 소녀에게 가하는 이 폭력을 인지하지 못한다.

  소녀는 말한다. 밀크맨 때문에 ‘얼마나 꽉꽉 닫혀 있었는지, 얼마나 감정도 생각도 없는 존재로 굳어졌는지’를. 더불어 그것은 ’공동체 때문, 정신적 분위기 때문, 점령 상황 때문이기도‘하다고. 한 사회가 가진 의식이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 역시도 소녀가 당한 ‘폭력’의 문제를 정치적인 대립으로 이끌어 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도록 여성을 향한 폭력에 관대하게 반응한 이 사회가 이번 n번방 사건에선 다를 수 있을까. 달라진다면 그건 뚜렷하게 ’권력‘을 가진 가해자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일지, 제외하고서일지 알 수 없다. 소녀의 마을에서 보이는 분위기는 한국 사회에 흐르고 있고 수많은 밀크맨들 간 카르텔이 공고하다.

  그래서, 그렇다고, 소녀는 계속 타인의 공포 속에서 움츠리고 있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소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지, ‘자기와 대립하는 세상에서 겹겹의 장애물을 맞닥뜨리면서도 자기 방식을 고집한다면 미친 건가’를 물어보게 된다.


만약 우리가 이 빛을, 투명함을, 광휘를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그걸 즐기게 되고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익숙해지면 어떻게 될까, 그걸 믿게 되고 기대하게 되고 감명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희망을 갖게 되고 해묵은 전통을 버리고 빛에 물들고 빛을 흡수해서 우리 자신이 빛을 내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나는 소녀가 끊임없이 책을 읽는 장면을 떠올린다. 이것은 총격과 살인이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총을 든 자와 총을 따르는 자들과 대비된다. 소녀는 많은 부분을 책에서 질문을 구하고 답을 찾는다. 그래서 소녀는 마을 사람들과 ‘다르다’. 공동의 적을 향해서는 오로지 하나의 목표에 모든 것이 매몰된다. 공포와 억압으로 다양성을 통제하며 매우 중요시되어야 하는 ‘인간존재’를 무시하고 인간을 도구화시키는 까닭이다. 소녀가 폭력과 전체주의 사회에서 깨달은 것.


살다보면 많은 일이 믿음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법이다. 나는 결국 산다는 일이 믿음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일이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아무튼 밀크맨의 이름에 대한 소식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속았다고 생각했고 겁에 질렸고 당혹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밀크맨’을 가명이나 암호명이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신비스럽고 은밀하고 연극적인 가능성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 이름이 상징이 벗겨진 채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친근한 톰, 딕, 해리 같은 이름의 세계로 끌어내려지자 무장단체 핵심요원의 이름에 덧붙였던 존경심이 순식간에 줄어들더니 아예 사라져버렸다.


  익명 세상에 숨어 있던 박사가 이름을 찾았다. 이름이 드러난 순간 익명 세상에서 벌이던 행태와는 다른 행동을 보이고 사람들 역시도 다른 태도를 보인다. 박사의 실체를 찾아내는데 어느 피해자의 끈질긴 노력과 구체적인 행동이 있었다는 글을 보았다. 그 분의 노력에 빛이 들어야 한다.


타인에 대한 공포처럼 다른 사람의 심리를 장악하는 것들은 숙주가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고 숙주를 제거하면 자기도 제거될 수밖에 없다.


   ‘여성 문제는 혼란스럽고 까다롭고 아주 빌어먹게 성가신 문제이고 문제 여성들은 완전히 맛이 간 사람들‘이라는 신념을 주장하며 여성을 도구화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것들에게 『밀크맨』이 닿지는 않을 테니, 그들이 가지려 애쓰고 가지고 있는 ’권력‘을 제거하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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