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스피드
김봉곤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평점 :
품절


오토픽션을 읽을 때의 곤란함

여름, 스피드, 김봉곤, 2018.


  여섯 편의 중단편은 전체적인 틀에서 연결되게 느껴졌다. 소설에서 반복되는 단어는 사랑과 글쓰기였는데 사랑을 해서 글쓰기가 된 것인지 글쓰기를 하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인지 애매할 정도로 둘은 분리되기 어려웠다. 누구나 사랑을 하면 시인이 되고 작가가 된다고 했다. 사랑을 하면 세세한 것 하나라도 기억되고, 잊히지 않고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모든 사랑하는 자의 심리가 아닐까. 또한, 사랑하다 헤어진 이들의 마음도. 사랑과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글쓰기, ‘글을 쓰고 그를 쓰는’ 이야기라서 독립적인 서사가 애매한 모든 ‘그와 나’에 관한 이야기는 '나'를 제외한 등장인물 모두에게 몰개성이 느껴지게 했다. 

  또 이런 말들이 있다. 모든 사랑하는 연인들은 진지하고 심각하지만 보는 이들에게는 유치하고 그저 그런 연애사라고. 그래서 여기, 소설속 사랑이야기가 그저 그런 연애사로 보인다. 그 연애사를 절절하게 묘사하지 않기에 작가의 심리에 다가가지 못함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작가의 의도라고 봐야하는 걸까.

  이 소설은 제목만큼이나 스피드하게, 그리고 가벼이 읽혔다. 공부중인 '나'의 현재 고뇌는 ‘그와의 사랑'에 집중되어 있고 ‘그’와 사랑하기 전에도 사랑 중에도 사랑 후에도 '나'는 허세가득한 글에 매몰되어 있다. 섬세한 사랑의 결은 어디로 흘러가고 자의식의 과잉으로 보이는 일기 같은 기록이 남는다.


그는 나의 거짓 과제를 보고서도 나의 글쓰기에 대해 비난했다. 넌 이런 식으로밖에 쓰지 못해. 그건 너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길이야. 헛웃음이 나왔다. 미니멀리즘에 대한 신물나는 애정, 그가 말하는 글쓰기의 기본인 행동하기, 보여주기, 외화(外化).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글쓰기가 선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강요했고, 아니, 그 이전에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결코 굽히지 않았으며, 그것이 결국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다. 보여주기보다 말하는, 행동하기보다 의식을 좇는 나의 글은 그의 눈엔 그저 멋부림에 불과했다. 교수 자신은 거리낌없었던 전위나 실험을 내가 하는 것은 객기였다. 그럴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가 무릅쓴 것에 대해 그렇게 쓰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것은 분명한 오만이며 강요라고 생각했다.


  나도 일종의 ‘교수’가 되려나. 이 전위와 실험의 글쓰기를 객기로 보는. 그러나 나와 같은 ‘교수’만 있었다면 작가는 신춘문예에 당선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신춘문예 등단작 「Auto」의 심사평―“퀴어의 사랑과 이별, 기억, 시간, 장소, 글쓰기 등의 다양한 무늬를 점프 컷과 소격효과 등의 기법을 통해 노스탤지어라는 캔버스에 개성 있게 그려낸 작품”―은 여전히 이해가 쉽지 않으며, 홀로 이 소설에 대한 이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건가 싶은 생각에 두리번거리게 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내 스탈이 아냐”를, “문장과 서사들이 나에게는 맛깔스럽지 않았어”, 이런 말을 충분히 할 수 있을 텐데 이 문장 하나를 쓰기 전에 변명같은 말들을 먼저 꺼내게 되는 이유에 대해.

  소설의 차별점이 무언가를 생각한다. 사랑과 글쓰기가 소설 전반의 내용이라 했지만 그보다 이 여섯편의 소설을 지배하는 건 퀴어, 라는 단어 아닐까. 시작부터 끝까지 ‘보편적이지 않은’ 퀴어의 사랑이야기가 작가 자신의 이야기, 그리하여 자전적 체험을 소설화한 것이 차별화되는 지점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소재의 차별화라고 할 수 있지만 소설의 매력이나 색다름과는 구별되는 것이고 소재를 어떻게 ‘소설적 형상화’ 하여 독자의 마음에 와 닿는가는 다른 문제이니, 내게는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어떤 면에선 남동생의 일기장을 들여다본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오토픽션을 쓸 때의 부끄러움은 사생활이라 여겨지는 나의 내밀한 삶과 생각을 밝히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 진실된 문장과 이야기인지, 어떠한 감정을 추출하고 획득해내기 위한 작위가 없었는지―나와 독자에게 모두―에 대한 경계심에서 비롯되는 감정으로, 꾸밈을 유혹받는 데서 오는, 혹은 필연적인 착오를 무릅써야 한다는 한계에서 생기는 부끄러움이다. 또 언제나 문학과 남자로 수렴되고 마는 나의 편협함에서 생기는 가벼운 수치심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글 읽기/쓰기와 남자, 절대 끊을 수 없는 것.)


  이 소설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아라는 말을 하기에 왜 이다지 껄끄러운 느낌이 드는가 했는데 거듭 소설에서 작가를 분리하기가 어려워서인지도 모르겠다. 전혀 아는 바 없는 작가인데도 ‘오토픽션을 쓸 때의 부끄러움과 곤란함’을 느끼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오토픽션을 들여다볼 때의 곤란함이 솟구쳐서인지도. 그리하여 나는 이것이 소설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자칫 작가에 대한, 평가로 비쳐지는 건 아닌가 우려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타인의 삶을 천천히 음미할 수 없을 것이란 불안과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누군가를 한입 가득 집어넣고 게걸스럽게 해치우는 짓은 그만하고 싶었다. 그것이 쓰든 달든 아주아주 천천히, 이번에는 꼭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첫 소설집이니 다음에 작가의 소설에서는 이러한 ‘불안과 강박에서 벗어나’, ‘스피디하게 읽어 해치우는 것’이 아니라 ‘쓰든 달든 아주아주 천천히’ 읽을 수 있을까. 다음번에는 꼭,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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