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어 사전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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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록하는 또다른 언어


가족어 사전,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2016-04-15.


  많은 작품을 썼지만 국내 번역본은 이 책만 있는 이탈리아 소설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는 파시즘 시대를 살아가는 이탈리아 유대인 가족의 이야기를,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썼다. 이 이야기는 실존 인물들의 이름이 그대로 등장함에도 소설‘로 분류되어 있다. 작가 자신이 ’소설‘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굳이 작가가 ’소설이오' 외치는 이유가 무얼까 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알았다. 처음엔 그저 가족의 실명을 써가며 내밀한 그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인가 생각했는데 이런 단순하고 일차원적 생각을 하는 것이 나탈리아와 나의 차이였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제법 낯익은 이름들이라 잘 알지도 못하는 가족들에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러하기에 이들 가족이 문밖을 나서면 맞닥뜨리는, 문 안으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이탈리아의 상황이 비켜가기를 바라게 되는지도 모른다. 독재자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고 흔들던 파시즘과 인종차별의 시대. 이탈리아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시기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탈리아 현대사의 순간순간을 드러내는 증언이기도 하다.

  지식인으로 또한 독재에 맞선 반파시스트 운동을 한 나탈리아이기에 그들 가족들의 독재에 맞선 활약상이나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어떤 담론들이 경건하게 펼쳐지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 시기의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하게 내비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소설은 나탈리아 가족들의 유난스런 성격과 가족간의 대화에 집중한다.


우리 형제는 5남매다. 우리는 각기 다른 도시에 살고 있으며 어떤 형제는 외국에 산다. 만났을 때도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들끼리는 단 한마디면 족하다. 단 한마디, 한 문장, 우리의 어린 시절에 수도 없이 듣고 반복했던 그 오래된 말 한마디면 우리들의 옛날 관계를 단숨에 되찾는다.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우린 베르가모에 소풍 온 게 아니오’라든지 ‘황화수소산 냄새는 어떤지.’ 우리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는 떼려야 땔 수도 없게 이런 문장, 이런 말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문장들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존재하게 될 우리 가족 간의 연대감의 토대를 이루면서, 우리 중 누군가가 “친애하는 리프만 씨”라고 말하게 될 때, 그리고 곧 “그 이야기 좀 집어치워! 도대체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군!”이라고 말하는 성급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우리의 귀에 다시 울리게 될 때, 지구상의 이곳저곳에서 이런 말들이 다시 창조되고 살아날 것이다.


  생물학 교수인 아버지 주세페 레비는 고집불통에다가 막말도 서슴지 않는데 반해 어머니 리디아는 쾌활한 낙천가로 수다스럽고 집안일보다 다른 일들을 하기를 더 좋아한다. 오빠 셋과 언니 한명을 가진 막내 나탈리아가 ‘보는’ 가족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강하고 사사건건 주세페 레비와 대립한다. 문 밖에는 이탈리아 파시즘이 문 안에는 주세페의 파시즘이 성행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어쩌면 주세페의 아이들은 일찌감치 파시즘에 대항하는 법을 체현하여 반파시스트 운동에 적극적이고 필요성을 절감했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이 개성강한 가족은 유대계이며 억압과 차별을 겪었으리라는 점이 주요했을 것이다. 주세페 자신도 몇 번이나 수감되었고 그런 만큼 자녀들의 반파시스트 운동에 대해 자랑스러워한다. 또한 가족들이 관계하는 이들 대부분이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반파시스트 운동가였다. 그런 이들만을 만났다기보다 그저 이웃으로 친구로 같이 하던 사람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이탈리아의 독재정치에 반대하게 되었을 뿐이다.


전쟁이 모든 사람의 삶을 즉각 뒤엎고 변화시키리라 우리는 생각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항상 해오던 일을 계속해나가면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살았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결국엔 위험을 그럭저럭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이며 혼란스러운 상태는 벌어지지 않을 테고 집도 파괴되지 않고 탈출이나 고문 같은 것도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도처에서 폭탄과 지뢰가 터지고 집이 무너지고 폐허 더미와 군인과 피난민들이 길을 뒤덮었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행동할 수 있는 사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베개 밑으로 머리를 밀어넣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전쟁은 그렇게 벌어졌다.


  거대한 사건에 휘말려 하루하루가 어떤 형태였는지를 생각하지 못할 때가 있다. 전쟁에도 사람의 일상은 지속된다는 것을 잊게 된다. 거대한 사건에 영향을 받으며 세세한 하루의 삶들이 이어져간다는 것을 잊게 된다. 나탈리아 가족들의 말, 그들만이 통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작가는 이 소설을 써내려갔지만 다른 어떤 가족인들 달랐을까. 등장인물마다의 성격과 직업이 다를지언정 가족마다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가 가족문화가 있다.

  제삿날 각기 다른 곳에 사는 고모들이 모여 상차림을 두고 말들이 오갔다. 음식의 종류, 상차림 시간과 방법 등등. 그때에 고모들의 기준은, 문화는 어디였었나. 어린 시절 그네들 모두가 함께 해온 부모의 차림 예법이건만 시간이 흘러 ‘다른 가족의 문화’라고 말하는 그 지긋지긋한 수다에서 난 또다시 짜증과 함께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가족들만의 가족어로 가족 연대감과 시대의 이야기를 전했던 이 책이 생각났다. 가끔은 나도 작가처럼 가족문화에 우리들만의 충만함에 싸일 때도 있지만 때론 지긋지긋하고 연민의 감정이 느껴질 때가 있다. 열렬히 환영하고 싶지 않은 유대감, 이해하고 싶지 않은 감정에 벗어나고프기도 한 가족의 무게, 가족어 가족문화. 

  나탈리아가 자신의 가족들은 서로간 무신경하지만 단한마디만 족하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의 가족 역시도 그럴 것이다. 연이은 일들로 가족, 친척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게 되는 것은 어찌 이리도 닮았나 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머리를 내젓게 되는 어떤 것들이 있다. 가족문화는 어떤 경우엔 더욱 공고히 되기도 하고 사회에 맞부딪치며 수정되고 변화되기도 한다. 한사회도 그렇게 흘러가야 한다. 그리고 크고 거대한 사건을 기억하는 세상에서 그 사건들에 영향을 받을 수 없는 개인의, 가족의 역사는 그들의 언어와 역사로 기록되어 세상의 이야기와 맞물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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