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희와 나 - 2017 제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이기호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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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희와 재이라면 소나기는 없다


한정희와 나-2017 제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다산책방, 2018-01-22.


  2017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은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그 애틋하고 아름다운 전원과 사람의 풍경이 으스스한 풍경으로 바뀌었다. 풍경의 으스스함이 사람의 마음에도 그림자를 드리웠는지 사람의 마음이 모여 으스스한 풍경을 만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폭력이 일상의 모습이 되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노인들에게 여성에게 가족에게 가하는 이 폭력의 이야기는 또한 낯설지 않아서 놀랍지도 않다. 이런 삶을 모두 힘겨워하면서도 어째서 혐오와 폭력은 일상의 영역이 되었는가. 그것은 이해의 문제일까.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결심을 실패로 이끄는 것은 의외로 작고 사소한 일에서다. 누군가를 이해하겠다, 진정으로 대하겠다는 마음가짐은 크나큰 다짐과 의지와 결의를 필요로 하는데 비해서 훅 무너지는 것은 사소한 말, 사소한 행동 하나다. 왜 그렇게 의지를 다져야 했는지 민망하고 무색할 정도로 쉬이 무너지는 터에 이해하려 하지 않으려던 마음의 크기가 컸음을 알고야 만다.

  권여선의 「손톱」 속 소희는 오늘도 새벽부터 먼 출근길을 떠난다. 엄마와 언니에게서 차례로 버려지며 그들의 빚을 안고 사는 20대 초반의 소희가 피멍 든 손톱으로 절규하는 목소리가 아프게 다가온다. 엄마와 언니가 없어도 살아왔기에 손톱없이 사는 것쯤이야 별 거 아니라고 독하게 외치는 소희는 월급을 받으면 최소생활비를 제하고 얼마나 빚을 갚을 수 있을지 계산하며 산다. 희망어린 기대는 월세와 보증금이 오를 거라는 생각에 이르자 공포와 절망에 휩싸인다. 희망없는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소희에게도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엄마와 언니들처럼 착취하고 버리고 갈까, 아니면 함께 그 고통을 헤쳐 나갈까가 궁금해졌다.

  이기호의 「한정희와 나」에서 나의 아내는 어린 시절 집안 형편으로 다른 부부의 집에서 잠시 자란 적이 있다. 그곳에서 따쓰하고 편안하게 보냈던 아내가 그 부부가 입양한 아들의 딸, 손녀 한정희를 잠시 맡자는 제안에 그 옛날 아내를 맡아 주었던 부부처럼 되기로 한다. 기꺼이 고모부가 되어 여러 차이들을 이겨내며 적응하던 나는 한정희가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반성할 줄 모르는 자세를 보며 ‘환대’를 거둔다.


나는 어느 책을 읽다가 ‘절대적 환대’라는 구절에서 멈춰 섰는데, 머리로는 그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마음 저편에선 정말 그게 가능한가, 가능한 일을 말하는가, 계속 묻고 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 환대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정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죄와 사람은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 우리의 내면은 늘 불안과 절망과 갈등 같은 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 법인데, 자기 자신조차 낯설게 다가올 때가 많은데, 어떻게 그 상태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나는 그게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 자신이 다 거짓말 같은데……


  김애란의 「가리는 손」에서 이혼 후 아들 재이와 사는 ‘나’는 동네 청년들이 노인을 폭행하는 동영상 속에서 인형뽑기를 하고 있던 재이를 본다. 노인이 폭행을 받는 동안 신고하지 않은 재이가 동영상이 공개된 후 목격자로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받을 상처와 충격, 혐오가 만연하는 가운데 이혼가정이자 다문화가정인 재이가 앞으로 겪을지 모를 폭력에 걱정하는 ‘나’는 재이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동영상속에서 아이가 입을 가리는 장면이 폭행을 목격한 충격의 몸짓이 아니라 노인을 폭행한 이들의 혐오의 말들을 들으며 ‘웃는’ 것을 가리는 모습일지 모른다는 충격을 받는다.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오래 전 당신과 팔짱을 끼고 걸을 때,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다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 병원 어르신들을 보면 가끔 그 말이 떠올랐다.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 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폭력이 일상화된 데에는 가져본 도덕의 크기가 작기 때문이었을까. 누군가를 이해하는 방식은 ‘그가 가진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한 개인을 이해하는 일을 위해 필요한 역사가 모두가 동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갖는 이 사회적인 분위기와 구조가 개인의 특별한 상황을 따로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굳어져 버린 이 모습들은 정말로 우리가 가져야 도덕들을 물리쳐버린 결과가 아닐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을 등한시한 결과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오늘날 한정희와 재이, 이 둘이 만나 그려갈 풍경은 결코 소나기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둘은 서로 혐오의 언어들을 쏟아 부으며 기꺼이 웃어제낄 것이다. 소년과 소녀는 도시의 무법자가 될지도 모른다. 소녀의 죽음은 실제로는 폭력에 의한 살인이 될지도 모른다. 소설 속 한정희와 재이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반응하는 저 무심함과 희화화, 반성없음을 떠나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는 태도는 앞으로도 이어질 어두운 세계를 필연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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