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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달그락 > [짧은 소설] 그의 어느 하루

짧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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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망각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기억이 있으신가요주인의 유한함 속에서 홀로 영원을 지향하는 기억 말입니다아마 알지 못할 겁니다그것들은 대개 잃어버렸던 퍼즐의 마지막 조각처럼 나타나니까요.

비밀의 운명을 지닌 기억을 말하려 합니다비밀을 말한다는 건 인생을 둘러싼 장막 하나를 걷어내는 일이 아닐까요하나가 사라져도 필시 다른 장막이 거인처럼 버티고 있겠지만한 번은꼭 한 번은 걷어내야 하는 장막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인생이 지긋지긋한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듯 깨달음 또한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오죠전 강변북로에서 그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세진이 이야기입니다세진이는 어릴 적 제가 살던 동네의 약국집 딸이었습니다흔히 말하는 부잣집 딸이었죠사시사철 인중에 콧물 자국이 배겨 있던 동네 아이들과 세진이는 확연히 달랐습니다뽀얀 얼굴에 개구리 마크가 달린 흰색 원피스를 입고 다녔죠이질감 때문이었는지 동네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는 못했습니다또래 아이들이 이질감이라는 단어를 알 리가 없듯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만약 이유가 있었다면 하얗다 못해 어슴푸레 청색 빛이 도는 원피스가 더럽혀지지 않을까하는 걱정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런 세진이와 제가 가까워진 건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아버지는 모든 여자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저를 가르쳤습니다누구든 어떤 상황에서든 말이지요아버지의 말씀에 제가 알지 못한 깊은 뜻이 있었는지는 아직도 모릅니다하지만 무척 엄하셨던 아버지의 말씀이었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그 때문이었을 겁니다호기심으로 세진이 치마를 들치거나 위악적인 말들을 서슴없이 뱉던 남자아이들과 주먹다짐까지 벌였던 건 말입니다

한 번은 어느 놈이 세진이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가짜로 다리 밑에서 주워 왔는데니는 진짜로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더라맞나?”

꽤 순진했던 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어머니께 물었습니다어머니는 일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누가 그카더노니도 진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니 주워오고 나서 3일 후엔가 세진이 주워 왔다 아이가.”하고 말했습니다먼지처럼 사소한 거짓말에도 매부터 먼저 드셨던 어머니는 제가 아는 한 그때 처음으로 저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저와 세진이 모두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것도그 다리가 모두 진짜 다리라는 것도 말입니다저는 그 다리라는 존재가 두려웠습니다

어머니의 거짓말에 깜빡 속아 저는 가짜 다리를 입에 올렸던 놈을 흠씬 두들겨 주었습니다아마 세진이의 결백을 말하고 싶었을 겁니다.

6학년이 되던 해 봄변두리의 약국이 신통치 않았는지 세진이네는 시내로 이사를 했습니다. <소나기>에 나온 보랏빛 이별을 해야 했었죠물론 그만큼 애틋하지는 않았습니다세진이는 가슴이 봉긋해지기 시작한 5학년 때쯤부터 저를 멀리하기 시작했었으니까요

애틋한 듯 무덤덤한 이별 후에 세진이를 다시 본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졸린 눈으로 프로야구 개막전을 보고 있던 토요일 오후에 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세진이는 비었던 시간은 안중에 없는 듯 태연하고 나른하게 우리 벚꽃 놀이 가자.”라는 말만 했습니다신기하게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흩뿌린 봄비에 벚꽃 잎들은 뭉쳐져 길 가장자리에서 밟히고 있었고 나무는 앙상했었습니다우리는 눈부심이 막을 내린 길을 멀찍이 떨어져 걸었습니다시간이 만든 거리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얼굴이 눈에 익은 선배 하나가 우리를 향해 걸어왔습니다세진이가 ……” 하고 숨을 내쉬는 사이선배는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와 제 어깨를 툭 치며 잠깐 보자” 했습니다세진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제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하지만 어떤 상황인지 이해한 저는 따뜻했던 세진이 손을 뿌리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배는 니 세진이 하고 사귀는 거가?”하고 물었습니다흥분한 상태로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습니다저는 선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닙니다절대 아닙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제 대답을 기다리던 선배는 이미 예정된 일을 말하는 양월요일 점심시간 종이 울리면 3학년 층 화장실로 오라 했습니다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어 왜 말입니까?”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오직 선배의 선처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고 그 마음에 얼굴이 홧홧해졌습니다.

그 순간 세진이가 머릴 감싸 쥐고 허공을 향해 소리쳤습니다대상이 없는 절규 같았습니다.

아악다 사라져 버려!” 

비명은 끊이지 않았습니다자리에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서도 내리 비명을 질렀습니다마치 자궁에 들어앉은 태아처럼 동그랗게 몸을 만 세진이의 모습에 왠지 모를 슬픔이 치솟았습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비명은 선배가 사라지고 제가 세진이 옆에 섰을 때 뚝 멈췄습니다다행이라 생각했고 선배에게서 벗어나게 해 준 세진이가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세진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멀뚱히 서 있는 저를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벚꽃 놀이는 틀린 것 같다노래방이나 가자.”

지하에 자리한 노래방은 특유의 비릿함과 싸구려 방향제 냄새가 뒤섞여 있었습니다밀폐된 공간에서 냄새에 취해 어깨를 맞대고 있으니 아찔한 느낌이 들었습니다세진이는 생소한 감정을 처리 못 해 발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는 저를 옆에 두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번호를 눌렀습니다그리곤 구멍이 숭숭 뚫린 것 같은 빈약한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습니다.

강물은 흘러갑니다3한강교 밑을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마음을 싣고서…… 이 밤이 새면은 첫차를 타고 행복 어린 거리로 떠나갈 거예요.”

혜은이의 <3한강교>.
  
3학년 층 화장실에서 저는 무참한 폭력에 굴복했습니다두려움과 수치심에 몸이 덜덜덜 떨리고 이가 부딪혀 소리를 냈습니다. “왜 말입니까?”라는 말은 하지 못했습니다저에겐 용기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하염없이 무너진 끝에 얻은 선배들의 감시와 보살핌 속에 지내던 날이었습니다. <3한강교>를 부르다 펑펑 울어버린 그 날 이후 아무 연락이 없던 세진이가 삐삐에 음성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오늘 자율학습 끝나면 동네 입구 공중전화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예전처럼 인사도 없이 건조한 목소리로 남긴 메시지였습니다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자율학습이 끝나고 몸보신이나 하자며 친구들과 통닭집으로 몰려갔었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당시의 저는 무기력한 존재였습니다무기력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늦은 밤집으로 가는 길에 슬며시 바라본 공중전화 부스는 텅비어 있었습니다명백한 비어 있음에 텅텅 소리가 날 것 같았습니다배회의 흔적을 찾을수록 점점 커지는 공백의 울림에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그 날 이후 텅 빈 공중전화 부스를 바라보는 시간은 길어져 갔습니다.

그렇게 한 계절을 보냈습니다.

여름 방학 보충수업이 한창일 무렵 선배가 저를 운동장으로 불러냈습니다뛰어오느라 숨을 헐떡거리는 제게 선배는 멍한 표정으로 세진이 소식 아냐?”라고 물었습니다바보처럼양손을 세차게 흔들며 절대 만난 적 없다했습니다.

선배가 말했습니다.

세진이 죽었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고 멀리서 텅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부모님이 여행을 간 사이 목을 매었고 그 자리에는 하혈로 인한 검붉은 피가 어지러웠다고 했습니다참고인 자격으로 경찰서에 갔었던 선배는 재수가 없다 말했습니다저는 그게 할 말입니까?” 말하지 못했습니다.
  
*

제가 만약…… 건조했던 세진이의 메시지에 응답했더라면 무엇이 달랐을까요그날 밤 집으로 발길을 돌렸더라면 운명과 우연의 장난은 그쯤에서 멈췄을까요세진이는 가짜 다리를 받아들여야 하는 또 다른 생명의 운명이 버거웠던 걸까요그래서 제가 필요했던 걸까요저는 왜무엇 때문에그 부름과 기다림에 응답하지 못했던 걸까요두렵습니다이 우연과 폭력의 굴레.
  
서울 사람들도 잘 모르더군요누군가 건너고 싶어 했던 제3한강교가 한남대교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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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지끈거린다뇌가 목을 놓아버린 풍선처럼 픽쪼그라든 기분이다속은 울렁거리고 사지가 쑤신다왠지 부실하고 시시한 인간이 된 것 같다

회식 다음 날이면 늘 이런 판이 벌어진다보통의 인간이 벌이는 초라한 다툼 같은 판흔적 없는 무너짐을 감당해야 하는.

마지막 잔은 마시지 말았어야 했는데후회가 밀려든다.

*
  
입사 6개월 차인 나는 회식이 있는 날이면 분주해진다누구도 원하지 않는 폭탄주를 만든다누구도 원하지 않는다는 건 내 마음을 담은 과장이고 거짓이다어떤 이들은 열렬히 원한다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순간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마치 중세 유럽의 흑사병처럼 무서운 속도로 많은 사람이 원하게 된다.

마법에 현혹된 나는 임원의 기분에 따라 소주량을 조절하고 적당량의 맥주를 부어 폭탄주를 만든다그리곤 바로 위 대리와 함께 신나고 들뜬 표정으로 은색 쟁반 위의 잔을 사람들 앞자리에 하나하나 놓는다이건 쉬운 일이다손목이 아프고 어깨가 좀 결릴 뿐이다힘이 드는 건 다음의 일이다몇 번의 잔이 부딪치고 건배가 외쳐진 다음.

폭탄주는 만년 부장이 막내 동생뻘 임원 입 앞에 상추쌈을 대령하게 하고 간신들이 눈치껏 분위기를 조성한 임원과 여자 직원과의 진한 러브 샷 풍경을 만들기도 한다러브 샷 잔이 비워지면 남자들은 환호하고 여자들은 임원의 입 앞에 앞다투어 삼겹살을 내민다날름혀가 움직이는 순간 나이스” “간택받았네” “승진” 같은 말들이 떠돈다남자들의 아내와 여자들의 남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그 순간얼굴을 붉힌 채 고개 숙여 앉아 있는 한 여자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난 대책 없이 쓸쓸해진다.

젠장 할……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노벨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어제는 컨디션이 나빴는지 임원이 원하는 폭탄주 맛을 내지 못한 게 문제였다소주가 너무 많아맥주 거품 나면 맛없잖아같은 말들이 임원의 표정에 따라 간신들의 입에서 나왔다맛없는 폭탄주를 경건한 표정으로 연이어 들이켰더니 주위 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사람들이 검은색 에쿠스를 향해 허리를 꺾는 장면 이후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어쨌든 집에는 잘 온 것이다.
  
심한 갈증이 몰려왔다손으로 땅을 짚고 무릎으로 걸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저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우욱물컹한 덩어리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 화장실에서 속을 비웠다우아악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거북한 소리였다무른 덩어리의 자잘한 파편들을 게우고 길게 늘어진 침을 손으로 거뒀다적막한 화장실은 세상의 끝 같았다네모난 화장실 창으로 앰뷸런스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화음이 맞지 않는 소리였다

어제의 흔적이 묻은 양복을 걸쳐 입고 집 밖으로 나왔을 때 달이 떠 있었다일그러짐 없는 온전하고 풍성한 달이었다.

아직도 있구나어젯밤에도 덩그렇더니다 봤지잘 가고 있는 거냐…….”

긴 한숨으로 쪼그라들었던 뇌가 조금 부푸는 것 같았다마음은 마냥 우둘투둘했다.

구석구석 스민 쓰라림을 달래며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위아래로 내저었다성의 없는 손짓에도 지나쳐 서 있던 택시가 후진을 해왔다

감사합니다후진까지 해 주시고.”

감사한 마음을 전하려 생글거리며 말했건만 머리가 세기 시작한 초로의 기사는 낮은 음색으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니요뭘요.”

단 한마디로 피로를 생생히 전한 기사는 내가 목적지를 말하기도 전에 택시를 출발시켰다그런데 좀 이상했다택시는 크게 한번 휘청이더니 굉음을 내면서 뒤로 내달렸다멀미 기운이 느껴져 속이 뒤틀렸다-. 깊숙한 곳에서 신물이 올라와 식도가 따끔거렸다

기사는 몸을 쥐어짜듯 뒤로 틀고 얼굴에 잔뜩 힘을 준 채 핸들을 이리저리 움직였다중심이 잡히지 않는 핸들에 따라 차가 비틀거렸다.

기사님왜 후진을 하세요위험하잖아요.”

내가 끓어오른 목소리로 말하자 기사는 차를 세우고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면 어쩌라는 거요오늘부터 택시는 후진만 할 수 있는데.”

기사의 말 같지 않은 소리에 나는 한층 더 목청을 높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장난이 심하시네요.”
이보시오젊은 양반어디 외국에라도 다녀온 거요뉴스도 안 보시나오늘부터 택시들은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132조 1항에 따라 후진밖에 못 한단 말이오후진뒤로 가는 거.”

기사의 강경한 태도에 풀이 죽어 입 밖으로 내려던 말을 흡하고 삼켰지만 분한 마음은 쉽게 누그러들지 않았다마음을 다스릴 참으로 심호흡을 길게 두어 번 했을 때 길 반대편에서 갈지자를 그리며 후진하는 택시가 보였다.

내가 아직 술이 덜 깬 건가?’ 

나는 얼굴 근육이 일그러지도록 질끈 눈을 감았다자전하는 지구의 속도가 생생히 느껴졌다.

뭐 하는 거요?”

그르렁대는 기사의 가래 낀 목소리에 놀란 나는 작게 눈을 떠 여러 각도로 창밖을 훑어보았다도로 위의 택시들이 뱀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뭐지말이 되나기사의 말은 또 뭐고.’
어쩔 거요내리 실 거요뒤로 운전하느라 목에 담 오고 온몸이 틀어질 지경인데 실랑이할 힘없다오지친 거지지쳤어.”

기사는 몸과 얼굴에 힘을 풀고 잠잠히 말했다.

아닙니다죄송해요제가 아직 술이 덜 깼나 보네요.”

내가 술이 덜 깬 건가그런 건가술이 깨면 택시들은 앞으로 갈까그럴까후진하는 택시 안에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차창 밖을 내다보았다달이 보였다

뭐가 잘 못 된 걸까어디로 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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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보이지 않던 정식이 나타났다번듯한 양복을 입고였다토요일마다 흙투성이 유니폼을 입고 야구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가게를 들어서던 모습에 익숙했던 나는 입이 약간 벌어졌다.

정식은 단골손님이었다정식을 통해 인연을 맺은 학생들은 나를 형삼촌이라 부르며 설탕이 듬뿍 든 저질 양념돼지갈비를 쩝쩝거리며 먹고 가곤 했다가게 맞은편 고시원에 사는 정식은 특유의 붙임성으로 얼굴을 두 번째 마주한 날부터 나를 형이라 불렀다그런 정식을 나는 친동생과 같은 마음으로 대했다구김살 없는 모습이 좋았다고 할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했다시험에 수없이 떨어져 이제는 어느 곳에 속하지 않음이 속할 수 없음이 익숙하다고도 했다그렇다 하더라도 늦은 시간 가게에 들러 술을 청하는 정식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패배감과 지침이 묻어 있었다.

배영수가 왜 한화로 가야 하냐고요누구 때문에 어깨가 망가졌는데삼성에서 책임져야지…… 안 그래요?” 같은 현실감 없는 소리를 늘어놓다가도 돌연 하아” 거리며 체념과 발악의 중간쯤 되는 말들을 하곤 했다

앞길이 막막해요하아…… 어떡하죠해낼 수 있을까요……청춘이 담보 잡힌 것 같아 목이 조여와요.”

그랬던 정식이 한눈에 봐도 근사한 감청색 양복을 입고 나타난 것이다. “잘 지냈어?” 살가운 말투로 인사를 건네며 정식이 가게 문을 들어섰다뒤로는 친구인 듯 보이는 남자가 여행용 가방을 끌며 따라 들어왔다뭔가 모를 기대감에 부푼 표정을 하고 있었다나는 정식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친구가 머금은 어색한 표정에 홀려 그래정식아.” 하고 먼 사람처럼 말해 버리고 말았다짧은 순간이었지만 정식의 온도가 변해 있음이 느껴졌다.

눌변도 그렇다고 딱히 달변도 아니었던 정식은 출정식의 장군처럼 비장한 톤으로 알지 못할 말들을 열심히 떠들어댔다사이사이 먹어많이 먹어그래야 부자 되지같은 말들이 들려왔다한참을 떠들던 정식은 친구의 휴대전화를 빌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통화는 별 내용 없이 그럼요이제 오시면 될 것 같아요.”로 끝났다통화가 끝나고 20여 분쯤 지났을 때가르마를 왼쪽으로 단정하게 탄 30대 중반의 남자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남자가 정식과 친구를 확인하고 손을 들어 보이자 정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푹 숙였다

남자는 정식 옆에 자리를 잡고 웃음이 습관처럼 배인 부자연스러운 얼굴로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층계를 이루고 있어생존에 가장 유리한 방식이거든그 구조를 접목하니 절대 실패할 수 없는 거지.” “한마디로 우린 운이 좋은 거야.” 같은 말들을 정식의 친구에게 늘어놓았다말하는 도중 정식과 눈을 맞추며 얕은 웃음을 교환하기도 했다다른 테이블을 정리하며 흘끔흘끔 본 정식의 얼굴에 번지는 웃음은 여태껏 내가 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10인분이 넘는 돼지갈비를 먹고 나서야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계산서를 들고 카운터 앞에 선건 정식의 친구였다정식과 남자는 친구 뒤에서 서로 눈빛만 주고받고 있었다친구가 계산을 끝내고 나자 남자는 정식과 친구의 어깨에 양손을 걸치고 문을 발로 밀고 나갔다난 따라 나가 또 올게.” 밝게 인사하는 정식에게 그래연락 자주 하고.”라 답하며 그들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봤다씁쓸함이 몰려들었다.

마음속에 꽈리 튼 씁쓸함이 정리되지 않아 애를 먹고 있을 때분명 큰길로 사라졌었던 정식이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정식은 숨도 고르지 않고 …… 우리구해줘.”라 말하며 잘게 접힌 쪽지 하나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우리라니구해달라니…… 몸이 떨렸다.
  
*

동네 친구들을 모아 쪽지에 적힌 마천동의 한 다세대 주택을 찾아갔을 때 안에서는 자잘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여자와 남자의 웃음이 뒤섞인 소리였다나는 친구들을 등 뒤에 세워두고 흐릿한 반투명 유리가 박힌 철제문을 드세게 두드렸다웃음소리가 뚝 끊어지고 유리로 흐릿하게 비치던 형광등이 꺼졌다고개를 돌려 친구들과 눈을 맞춘 나는 다시 철제문의 아랫부분을 거칠게 발로 찼다가로등이 막 점등된 골목으로 철컹하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나름의 소란에도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기이하다 싶은 괴괴함만 은밀히 내비쳤다나는 마름모꼴 손잡이를 거세게 흔들어 대며 온 힘을 다해 정식을 불렀다

정식아형님 왔다정식아.”

안에서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뒤이어 불이 켜지고 반투명 유리에 검은 형체가 점점 짙어지더니 천천히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가게에서 보았던 남자가 빼꼼히 머리를 내밀었다현관의 누런빛 등에 비친 남자는 앳되어 보였다.

무슨 일이신가요?”

남자가 경계의 말투로 물었다.

여기 강정식이라고 있죠?”

나의 적의 섞인 말투에 남자의 동공이 작게 흔들렸다.

……왜 그러시죠?”
동생 보려는데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정식아형님 왔다.”

내가 목청을 높여 거듭 정식을 부르자 남자 어깨너머에서 정식이 주춤거리며 나타났다남자는 몸을 돌려 정식을 한번 보고는 밖으로 몸을 빼 문을 막아섰다.

교육 기간이라 면회는 어렵습니다…….”

등 뒤에 선 친구들을 둘러보며 말하던 남자는 말끝을 길게 늘어뜨렸다

대답이 준비되지 않은 말이었다더할 말도 뺄 말도 없었다난 이게 최선이길…….’ 하는 마음으로 남자를 옆으로 밀쳤다남자가 몸을 휘청거리며 중심을 못 잡고 한쪽으로 밀려난 사이 친구들이 집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친구들을 따라 들어선 입구에는 족히 몇십 켤레는 될 듯한 하이힐과 검은색 구두슬리퍼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좁은 거실 양쪽 벽면을 따라 신비의 옥이라 써진 직사각형의 검은 물건이 층층이 쌓여 천장에 닿아 있었다싱크대에는 솔이 낡은 칫솔 스무여 개가 어지러웠다들어서 정면으로 보이는 방에 여섯일곱의 여자들이 희멀건 죽 같은 것이 든 금색 양은냄비를 앞에 두고 숨죽여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몇몇은 잔뜩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집안을 둘러보는 사이 십여 명의 남자들이 친구들과 내 앞을 막아섰다검은 눈동자를 위로 붙이고 쏘아보는 사내들의 눈빛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정식은 한 사내의 손에 잡혀 방안에 서 있었다내가 정식아가자.” 큰 소리로 말했지만 정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식을 노려보며 발걸음을 안으로 옮기려던 순간 한 사내가 내 가슴을 밀쳤다난 힘없이 뒤로 나앉으며 신발장 옆면에 머리를 쿵하고 찍었다그 모습에 흥분한 친구들이 욕지거리와 함께 싱크대와 벽면에 쌓인 물건들을 엎기 시작했다방에서 숨소리만 내던 여자들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몇몇 사내와 친구들 사이에 작은 몸싸움이 일어났지만대부분의 사내는 어소리를 내며 흐트러진 물건들을 챙기기에 바빴다사내들은 무척 간절해 보였다.

나는 정식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아끌었다

정식아가자!”
  
*

택시는 한적한 도로로 접어들어 속도를 높였다정식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윤석아미안하다.”

내가 뒤쪽으로 얼굴을 돌리자 정식은 고개를 푹 숙였다.

바보 같은 놈고생했다근데 구해줘가 뭐냐쪽팔리게다들 밥도 잘 못 먹는지 비실비실하더구먼하긴 눈빛은 좀 무섭더라.”
죄송해요……윤석아나한테 남은 마지막 사람이 너였다.”

정식의 친구는 아무런 대꾸 없이 머리를 뒤로 젖히고 차창 밖을 바라봤다.

정식아.”
.”
나 허리 안 좋은데 옥장판 사라고 왜 연락 안 했냐섭섭하다이놈아.”
……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누구는 책임져야 하는배영수의 낡은 어깨 같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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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보 택시기사야이제 막 한 달이나 됐나손님들이 잘 모르는 목적지를 말하면 슬쩍 고백하지. “택시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요내비 좀 누르고 갈게요.”라고그러면 손님들이 길도 모르시는 분이 왜 택시를 하세요?”라고 묻곤 하는데 그 라는 말은 정말 이해가 안 가. “어떻게 하세요?”라 물으면 날 동정하는구나 생각하는데 라니왜긴 왜야먹고살려고 하지누구든 나의 생에 대한 의지를 부정하지 않았으면 해미안내가 좀 까칠해졌네손님은 왕인데.

얼마 안 된 경력 동안 나에게 바람이랄까희망 사항이랄까그런 게 하나 생겼어뭐냐고…… 택시기사가 승차거부를 하지 않으면 손님도 대화거부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거지뭔 개떡 같은 소리냐고허허뿔내지 말고.

승차거부 삼진 아웃제라는 거 들어봤지정책 명이 왜 그따윈지 모르겠어매일 야구를 하는 기분이야. LA 다저스의 커쇼 같은 선수가 줄곧 스트라이크만 던져대는 야구볼은 없어볼이 되려면 뭘 그리 많이 증명해야 하는지…….

오해하지는 말아이래 보여도 꽃담 황토색 해치택시에 대한 자부심은 있다구가끔아주 가끔교대 시간이 다가오면 반 승차거부는 한다고 해야 하나문래동 회사 가서 교대해야 하는데 마포에서 타서 태릉 가자면 많이 곤란하거든인계받을 기사는 아내가 정성껏 타 준 비싼 홍삼 원액까지 먹고 기다리는데 교대자가 자기 돈 벌기 바빠 늦게 오면 얼마나 열불이 나겠어안 그래?

교대시간 가까울 땐 빈 차 등 끄면 되지 않냐고에이왜 이러실까우리가 돈 벌려고 그래같은 방향이면 지친 하루 마무리하며 말동무나 하려는 거지좋잖아세상 사는 이야기도 하고 정치인들 욕도 좀 하고아니야아니구나미안해그래도 운수 좋은 날에 대한 미련은 버리기가 참 어렵더라고.

우리 택시기사들 말이야…… 말동무가 필요한 사람들이야신호등에서 아는 택시 서기라도 하면 창문 내리고 별말 없이 서로 웃는 거 봤지또 라디오는 왜 그렇게 허구한 날 틀어놓겠어택시 타면서 장용인가성형수술로 유명한 개그맨이 진행하는 교통방송 <추억IN가요한 번쯤은 들어 봤을 거야거기서 연결하는 교통 통신원들의 어색한 멘트에 왜 그렇게 껄껄 웃겠어

매일 사람들하고 부대끼는 직업인데 뭐가 외롭냐고허허모르는 소리 말아온종일 어디로 모실까요?” “알겠습니다.” 이런 말만 하는데밥 먹는 건 또 어떻고혹시 기사 식당에서 밥 먹어 본 적 있어가보면 섬뜩한 기분에 밥맛이 싹 달아날 거야다들 일 인분 시켜 놓고 죽을상으로 꾸역꾸역 밥 먹고 있는 걸 보면.

우리 고달프니 사정 봐달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우리도 승차거부 안 할 테니 이야기 좀 들어 달라는 말이야간혹 외로움에 찌든 기사들이 두통이 날 정도로 떠드는 거 알아나도 쉬는 날 그런 기사들과 대화하다 보면 타이레놀이 필요하더라고그런데 우리라고 왜 눈치가 없겠어대개 기사들은 오늘 날씨 참 좋네요.” 라며 슬쩍 손님의 간을 봐상처받기 싫어 생긴 방어기제의 일종이랄까간을 봤는데 먼 산만 보거나 새침한 대꾸가 돌아오면 힘이 쭉 빠져. ‘난 당신의 20분짜리 기사요.’라는 생각만 들고다툰 연인 사이도 아니고 시어머니 며느리 사이도 아닌데 말없이 뚱하게 가다 보면 라디오 소리만 올리게 되더라고.

이건 내 자랑 같아 말 안 하려고 했는데투철한 직업의식으로 연령별 이야깃거리를 골고루 준비해네이버와 다음의 정치경제스포츠연예 기사들 정독하고 20대를 위해 디스패치도 잊지 않지성의가 가상하지 않아?

그러니 우리 이야기 좀 들어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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