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였다. 캐나다 남부에 위치한 토론토 육상 스타디움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객들의 열기로 한껏 달아올랐다. 무더운 날씨 탓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데도 관객들은 곧 열릴 100미터 부문 결승전에 대한 기대감으로 흥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막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들의 불꽃 같은 이벤트가 시작될 참이었다.


단이가 뜨겁게 달궈진 트랙에 들어섰다. 관객들은 단이를 보자 환호성을 질렀다. 피부색이 밝은 탓에 단이는 흑인 선수들 사이에서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단이를 제외한 모든 선수가 흑인이었다. 육상 100미터 부문은 언제나 그렇듯 흑인들의 잔치였다.


단이는 이번 대회의 다크호스였다. 불과 열아홉 살의 나이에 9초대를 기록하며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결승전까지 올라왔다. 준결승전에서 세운 단이의 기록은 9초 88. 아시아 신기록이자 세계 청소년 신기록이었다. 자신의 종전 최고 기록이자 아시아 타이 기록인 9초 91을 1년 만에 갈아치웠다. 이 기록만으로도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권에선 이미 난리가 났고, 전 세계가 단이를 주목하게 되었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아시아의 소년이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는 선수들과 함께 몸을 풀고 있었다.


미타쿠예 오야신. 

단이는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오른쪽을 쳐다봤다. 가까운 객석에서 연아와 지태가 단이를 응원하는 모습이 보였다. 


미타쿠예 오야신. 

다시 한 번 주문을 외웠다. 연아가 알려준 주문이다. 인디언들의 인사말이라고 했다. 보다 정확히는 토착 원주민들,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리고 있는 이곳 캐나다에서는 ‘첫 번째 민족(First Nation)’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인사말로, 우리는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단이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연아가 알려준 이 인디언들의 인사말은 훌륭한 치료제가 되어줬다. 트랙 위 각자의 레인에서 100미터를 달리는 건 홀로 터널을 달려가는 일과 같다. 그 고독한 중압감에 스타트조차 할 수 없었을 때, 연아가 알려준 주문은 외로운 터널 속에서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줬다. 아니,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단이가 주문을 외울 때마다 트랙 위에는 연아와 지태가 함께 있었다. 스타트 총성이 울리면 단이는 연아와 지태와 함께 달렸다. 그 덕분에 준결승전에서 9초 88을 기록할 수 있었다. 결승전에선 더 빠른 기록을 낼 것이다. 단이는 더 빨리 달릴 자신이 있었다. 단이를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도 그가 더 빨리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1위를 할지도 모른다. 우사인 볼트가 은퇴한 이후 비어버린 제왕의 자리를 아시아의 한 소년이 차지할 수도 있었다.


선수들이 워밍업을 끝내고 각자 자신의 레인으로 가서 섰다. 곧 선수 소개를 한 후 경기가 시작될 것이다. 한 인간이 이뤄온 모든 것이 10초도 되지 않아 판가름 나는 세계. 단이는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려봤다. 


스타트 총성이 울리고 스타팅 블록을 박차고 나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0.1초. 첫 발인 오른발을 내딛고 추동력을 얻어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총 일곱 발짝 내딛으면 10미터 지점 통과. 그 뒤 20미터 지점까지는 상체를 숙이고 속도를 더 올린다. 30미터 지점부턴 상체를 펴면서 최고 속도 구간으로 진입. 오른팔, 왼팔 크게 흔들면서 발은 앞 부분 위주로 트랙 표면을 힘껏 내딛는다. 50미터를 지날 무렵 최고 속도를 낸다. 보폭도 더욱 커진다. 온몸의 근육은 터져 나갈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이제 100미터 지점까지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근육은 더욱 팽창한다. 빠른 속도로 터널의 끝이 가까워진다. 


6초, 7초, 8초……. 100미터 지점에 골인한다. 전광판에 뜨는 기록은 9초 81! 

단이는 눈을 떴다. 단이는 언제나 경기 직전에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그 경기에서 자신이 달리는 모습을 그려본다. 열에 아홉은 그 모습대로 달렸다. 정말 컨디션이 안 좋을 때 한 번 빼고는 모두 이미지 트레이닝에서의 기록 그대로였다. 지금 단이의 컨디션은 최고였다. 이미지 트레이닝대로라면 9초 81로 골인할 것이다. 하지만 1위를 할 수 있는 기록일까? 


아시아권 대회라면 분명히 우승이다. 하지만 이곳은 세계육상선수권대회다. 그 정도면 훌륭한 기록이지만, 우승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다른 선수들이 자신만의 터널을 몇 초에 달릴지 아무도 모른다. 혹 누군가 이번 경기에서 우사인 볼트가 세웠던 세계 신기록을 깰 수도 있는 일이다. 


그때였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경기장에 나타났다. 그들은 심각한 얼굴을 한 채 경기 운영진과 무언가 상의했다. 상황이 심각해 보였다. 관객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술렁이기 시작했다. 각 레인에 서 있던 선수들도 검은 양복들을 쳐다봤다. 안 그래도 극도로 예민해지는 결승전 직전에 이런 돌발 상황은 선수들을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 

단이는 그들을 보자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굳었다. 근육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체온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이런 상태로 달리면 10초대 기록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검은 양복들이 트랙 위로 올라왔다. 흑인 선수들을 지나쳐 단이 앞에 와 섰다. 단이에게 몇 마디 말을 하더니 그를 데리고 트랙을 내려갔다. 관객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전 세계로 방송을 내보내던 카메라들이 일제히 단이를 비췄다. 

단이는 검은 양복들에게 끌려 트랙에서 사라졌다. 귀가 먼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눈이 먼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트랙에서 멀어지기 전, 객석에 앉아 있는 연아와 지태의 얼굴을 봤을 뿐이다. 그리고 그 아래 스태프석에 있던 스티브. 아,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든든한 코치 스티브. 이제는 나를 파멸로 이끌 그, 스티브.   


그날 이후, 단이는 트랙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희대의 도핑 스캔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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