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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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리영희 선생을 잘 알고 있는 사람과 잘 모르는 사람으로 나눌 수도 있을 것 같군요.

리영희 선생님을 잘 아는 분은 80년대를 청년으로 보냈거나, 진보적인 영역에 관심이 많은 분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고,

리영희 선생님을 잘 모르는 분은 70년대 이후에 출생했거나, 진보적인 사회 활동에 관심이 적은 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조선시대의 양반, 또는 선비 가운데 유명한 인물을 기억하는 기준은 그의 저작물 때문입니다.

그가 쓴 글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이퇴계, 이율곡, 기고봉, 정송강, 정다산 등이 모두 그러한 인물들입니다.

결국, 지식인은 그가 쓴 글로 평가를 받게 된다는 건데, 물론, 글은 곧 자기 세계관의 반영이자 실천의 이론적 토대인 만큼

그들이 말한 논리와 행동(실천)이 다르다면 그에 대한 비판도 혹독하게 받아야 했겠죠.

‘언행일치’가 지식인의 가장 큰 덕목이었던만큼, 글을 쓴다는 것은 엄격한 도덕률을 스스로에게 부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글을 써서 감옥에 몇 번씩 들어가야 했다면, 그 지식인은 당대의 역사를 가장 비판적이고 진보적으로 기록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리영희 선생님의 저작들을 읽으면 현대 한국 사회에서 지성인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과 그 답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지식인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지성인은 극히 드물죠.

지식인과 지성인의 개념 차이는 무엇인가? 사람에 따라 내리는 정의는 좀 다르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대체적으로 ‘자신의 전문 학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의 학문적 성과를 이룬 사람’을 지식인으로 보고, 그러한 바탕을 가지고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을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나라에 지식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흔하고 널린 게 석사, 박사, 대학교수들입니다.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사회에 무슨 일이 발생하면 너도 나도 전문가연 하면서 언론을 통해 글을 쓰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작 군부 쿠데타나 군사 독재 시절에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살펴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식인들은 그들의 속성-부르주아, 또는 쁘띠 브르주아, 룸펜-상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갖기가 매우 쉽습니다.

권력에는 한 없이 약하고, 돈(물질)과 명예 따위에 쉽게 현혹되며 자신의 관심분야 외에는 무책임한 태도를 갖기 쉽지요.

진정한 지성인의 표상이 된 리영희 선생은 자신을 중도 좌파라고 했습니다.

즉,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진보적인 역사에 기여하고자 했던 것이죠.

세월이 흘러, 리영희 선생이 쓴 글들이 오늘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 빛은 바래지 않을 것입니다.

70년대부터 쓴 글들이 오늘날에도 상당히 많이 유효하며,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역사의 진실에 눈 뜨는 경험은 소경이 눈을 뜨는 것과 같은 말로 표헌하기 힘든 감동과 환희입니다.

리영희 선생의 글을 통해 우리들은 그런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을 토대로 80년대를 살아왔습니다.

앞으로 많은 시간이 흘러도 리영희 선생님의 삶과 저작은 우리에게 소중한 자산으로 남을 것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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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살 인생 - 개정판
위기철 지음 / 청년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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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철씨가 쓴 ‘아홉살 인생’을 읽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이미 저 멀리 아득한 추억의 숲으로 사라진 나의 아홉살 때 기억을 되살렸다. 나는 아홉살이 되어 그 책을 읽었고 마음에 잔잔한 슬픔이 고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아홉살은 슬픈 나이일까.

아니다. 아홉살이 슬퍼서가 아니라 힘겨운 나날을 살아온 우리의 아홉살은 모두 슬펐을 것이며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민이는 – 주인공의 이름이 백여민이라는 사실이 더욱 나의 이야기같기도 했지만 – 건강하고 밝게 자란다. 나의 아홉살은 어떠했던가. 수줍음과 부끄러움으로 맞은 2학년 시절, 내 짝은 여자아이였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앉은 여자아이. 그 여자아이의 이름을 나는 지금도 잊지않고 있다. 아주 가끔씩 졸업앨범을 펼치면 거기에는 그 시절의 나와 그 아이가 들어있다. 비록 반은 달랐지만 그 아이는 아주 예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나는 뭐가 못마땅한지 잔뜩 인상을 쓴 얼굴로 들어있다. 여민이가 장우림과 사귀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내 짝과 사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수줍을을 너무탔고 열등감이 심했다. 나는 자라면서 서른이 되어서도 부끄러움과 수줍음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지를 못했다. 나의 국민학교 2학년 짝이었던 여자아이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우습지 않은가. 이미 많은 것이 변한 세월을 살면서 이제 그런 과거의 추억을 들쳐내어 아파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때는 꿈이 있었다. 나는 조금도 허황된 꿈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가장 큰 꿈이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선생님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홉살 인생’에서도 나오지만 바로 그 선생님때문이었다. 나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행운을 얻지 못했다. 왜 우리의 스승들은 제자들 보기를 돌이나 돈으로 생각했을까.

내가 성적이 나쁘고 공부를 점점 못하게 된 이유를 겨우 선생님을 잘못 만났다는 핑계로 대신할려고 그러는 것이나 아닐까. 어쨌거나 나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신기종이 처럼 발이 까마귀 발처럼 새까매도, 공부를 지지리 못해도, 가난때문에 육성회비를 제 때에 못내도 매를 들거나 욕을 하거나 인간적으로 무시하거나 경멸하거나 부자집 아이들과 차별하지 않는 그런 선생님이고 싶었고 그런 선생님을 정말이지 만나고 싶었다. 학교에서 선생님은 공납금이 밀렸으니 집에 가서 가지고 오라며 나를 되돌려 보냈다.

나는 집으로 향하면서 매우 우울했거나 어쩌면 조금은 울었을 것이다. 무엇이 나를 우울하게 했는지, 나를 울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아홉살의 나이에 무엇을 알겠는가. 하지만 나는 열 네 살이 되어 같은 경험을 했다. 비록 학교는 아니었지만 가난때문에 울어야 했던 그 기억들……

아홉살 인생은 나를 아홉살에만 묶어두지는 않았다. 산꼭대기 동네, 가난한 이웃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삶들은 지금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음을 본다. 그리고 내가 세 번의 아홉살을 겪는 동안 그런 막연한 슬픔의 정체를 알았다는 것이 시간의 변화라면 변화일까.

위기철씨의 ‘아홉살 인생’을 읽으면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깨달았다.

사실은 나도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고 조금 시작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너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지금은 중단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도 나의 어릴적 이야기를 쓰고 싶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나의 살아온 삶을 한번쯤은 뒤돌아 보고싶은 생각에=서 이다.

위기철씨는 ‘아홉살 인생’을 아마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나 ‘어린왕자’ 등을 염두에 두고 쓴 듯한 생각이 든다. 특히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와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은 나의 주관적인 생각일까. 그리고 이건 읽으면서 느낀 것인데, 문체가 마치 번역된 외국 소설을 읽는 듯 했다. 이것도 내가 뭘 모르기 때문일까. 과장된 표현과 말투들에서 그런 것을 느꼈는데, 이것은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느낀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아주 조금 위기철씨를 알고 또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제는 이야기 작가로 나선 위기철씨에게 격려의 말을 전하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어디있을까.

나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아직은 먹는 것보다 굶는 것이 더 많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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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
업튼 싱클레어 지음, 채광석 옮김 / 페이퍼로드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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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작가입니다만, 그의 작품은 미국내에서 대단히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정글]은 미국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품인데, 시카고 육가공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현실을 수준높게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소설로 인해 지금의 ‘식품의약품안정청(FDA)’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정말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벌써 15년 전후의 일이 되었지만, 지금도 그 책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을 번역한 사람이 ‘채광석’ 씨여서 더욱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처음 출간되었을 때는 책의 일부분을 의도적으로 번역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정글]의 주인공인 노동자가 나중에 사회주의자로 변신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서였는데, 얼마 전에 다시 나온 완역본에는 그 내용이 다 들어 있다고 하는군요.

완역본은 사 놓고 아직 다 읽지 못했습니다. 이제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이제는 낡은 이데올로기라고 말하지만–는 반드시 사라져야 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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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전집 1 - 시
이승훈 엮음 / 문학사상사 / 198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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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箱-김해경-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유명한 인물이죠. 하지만, 이상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수수께끼의 인물이죠.

이상을 처음 만난 것은 10대 후반이었습니다. 그후 지금까지 이상은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침탈이 가장 극심했을 때, 모더니스트 이상은 그 식민지 내부에서 한 발 쓱 뒤로 빼고 세상을 바라본 것 같습니다.

20년대부터는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히 퍼져나갈 때였고, 민족주의와 독립운동이 활발하던 때였음에도 많은 작가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외면하게 되는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라고 할 수밖에 없을 듯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상 역시 자신의 시대에 대해 무책임한 지식인이었고 성실하지 못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유독 ‘이상’에게는 애정이 있는 걸까요? ‘이상’은 이를테면 ‘문제적 인간’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많은 작가들이 있었고, 그들 가운데는 친일파가 되었거나 해방 후에 북한으로 넘어갔거나-납북된 경우도 있지만-남한에 남아서도 대부분 체제에 순응하는-그들이 식민지 체제에 순응했듯이-인물로 남았지만, ‘이상’은 죽음을 택했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입니다.

‘이상’은 봉두난발에 백구두, 단장을 짚고 기생집에서 ‘창부가’를 잘 부르는 퇴폐적인 부르주아 인텔리의 인물이기도 했고, 애인과 멀리 중국으로 몰래 떠난 어린 동생에게 눈물이 쏙 빠질만큼 감동적이고 애틋한 편지를 쓰던 정 많고 다감했던 오라버니이기도 했고, 두 아버지를 모셔야 했던 장남의 고뇌를 늘 품고 살았던 미리 성숙해버린 어른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시가 난해하다고 하지만, 그의 시에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회의하고 자신과 시대에 대한 관계를 회의하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그의 수필은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작가의 글보다 재미있고, 아름답고, ‘맛’이 있는 글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자신을 일컬어 스스로 ‘박재가 되어 버린 천재’라고 했던 ‘이상’, 안타깝고 애틋한 마음으로 언제나 내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의 전집은 문학사상사에서 4권으로 정리되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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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1 (양장) - 제1부 개미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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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에서 나온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를 읽었다. 400쪽에 가까운 책을 반나절이 넘게 쉬지않고 읽으면서 개미의 세계를 넘어 지구와 우주에 대한 신비에 새로운 눈을 뜨는듯 했다. 이 책은 그동안 나온 독특한 소설들 가운데 하나로, 움베르토 에코, 파트리크 쥐스킨트 등과 함께 읽는 즐거움을 주는 소설이다.

소설의 구성도 매우 독특하게 꾸며져 있다. 전혀 관계가 없는 두 개의 이야기가 끝까지 가서는 하나로 만나도록 해놓았다. 추리소설의 기법을 도입한 것도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데 효과를 보이고 있다. 작가는 소설가이기 전에 で개미박사と여서 개미의 생태학적 보고가 매우 정밀하고 풍부하며 뛰어난 상상력과 함께 개미의 삶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전문가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생물학적 내용들이 문학과 만날 때, 작품은 뼈와 살을 얻는 것이다.

불가사의한 개미의 집단적,사회적 생활이 인간의 삶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으며 또한 오래도록 살아남으리라는 것은 일종의 예언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지만 지구에서 살다가 사라지는 포유류의 한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개미]는 깨닫게 한다. 인간은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에 도전을 하는 능력있는 존재이긴 하지만, 정작 지구의 표면에 가까이 살고 있는 수천억의 곤충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인간만큼이나 다양한 사회성을 가지고 있는 개미를 통해 인간과 대비시키며 공존을 해야하는 당위성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다른 어떤 생물과의 대화를 시도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였지만, [개미]에서처럼 과학적이고 구체적인 대화는 없었다.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은, 다른 생물들이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인간이 먼저 생물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는 것이다.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이 시도는 사실 전부터 있어왔다. 돌고래의 음파를 분석해서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지능있는 동물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도 인간이다. 이처럼 인간들은 인간들끼리 나누는 상호소통의 기능을 확대하여 다른 생물들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 소설은 아직은 미래를 가상하고 있지만 어쩌면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개미의 생활은 매우 치밀하고 적확해서 독자가 마치 개미굴에 들어가 살고 있는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은 그 이후로 나온 책들도 몇 권 읽었지만, 더 이상은 읽지 않게 되었다. [개미]를 능가할 만한 작품이 없었기도 하거니와, 그의 상상력과 작품 수준이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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