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피노자 자신이 쓰지 않은 용어를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왜곡이나 변형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인데, 2부 정리7을 워낙 평행성 명제라고 부르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물론 모든 철학자들이 평행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고 부적절하다고 말하는 철학자들도 상당히 많다.

 

2부 정리73부 정리2와 연결이 되어있다. ”신체는 정신이 사고하도록 규정할 수 없고 정신은 신체가 운동하거나 정지하도록 또는 그 이외에 (만약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다른 어떤 것을 하도록 규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정신과 신체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나 상호 작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신과 신체가 전혀 별개의 존재인 것은 아니다. 실체가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을 통해 표현되듯이, 그리고 동일한 실재들의 질서 또는 연관이 때로는 사유속성 안에서 때로는 연장속성 안에서 표현되듯이, 인간이라는 통일체 역시 때로는 정신을 통해 그리고 때로는 신체를 통해 표현된다. 정신과 신체의 존재론적 동일성이 함의하는 것 중 하나는, <윤리학> 2부 정리7의 주석이 말하듯이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를 표현한다는 점이다.

 

3부 정리2의 주석 이 점은 2부 정리7의 주석에서 말한 것, 곧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때로는 사유속성 안에서 인식되고 때로는 연장속성 아래에서 인식된다는 점으로부터 명료하게 이해된다. 그리하여 자연이 이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아니면 저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간에 실재들의 질서 또는 연관은 하나다. 결과적으로 우리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는 본성상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하나를 이루고 있다., 신체가 능동적일 때 정신도 능동적이고, 신체가 수동적일 때 정신도 수동적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다르다. 5부 서문에 가면 그 이야기가 나오는데 데카르트는 신체의 힘이 너무 강하면 정신이 약해진다고 이야기한다. , 신체가 능동적일 때 정신은 수동적. 반면에 정신이 강해지면 신체가 약해진다. 의지력이 강해져서 신체가 통제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 정신이 능동적이면 신체가 수동적. 반비례 관계라고 생각한다.

 

2부 정리7을 평행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관념과 관념의 대상 사이에 상응 관계가 있다, 관념A는 관념의 대상이 되는 사물A와 일치하고, 관념B는 관념의 대상이 되는 사물B와 일치한다

는 관점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보게 되면 물체의 질서는 평행한데-> 평행하다는 것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인데-> 이 말은 정신과 신체 / 관념과 그 대상은 독립적이고 외재적이라는 말인데-> 이게 평행론적인 해석에 함축되어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관념과 그 대상이 어떻게 상응하는가. 그 근거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설명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라이프니츠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 더 정확히 말해서 서로 독립적인 정신과 신체가 어떻게 일치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시계의 비유를 든다. 라이프니츠가 1695년에 짧은 글을 하나 쓰는데, 그 중 하나가 <실체들 사이의 소통에 관한 새로운 체계>. 정신이라는 실체, 신체라는 실체 사이에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일치가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조화가 이루어지는가를 설명하는 새로운 체계에 대한 글이다. 이 글을 두고 여러 사람이 반론을 제기하니까 거기에 반해서 라이프니츠가 몇 차례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해명을 쓰는데, 그 중 하나의 해명이 동일한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개의 시계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동일한 두 개의 시계는 평행성에 대한 비유다. 하나의 시계는 관념의 질서에 속해있는 시계, 다른 시계는 사물의 질서에 속해있는 시계. 이 시계가 똑같은 시간을 가리킨다는 것은 상응한다는 이야기.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몇 가지 모델이 있다.

 

1) 두 개의 시계가 서로 연동하여 작용하게 만드는 방식. (데카르트주의)

하나의 시계가 작동하면 다른 시계도 따라서 작동하도록 연결을 만들어놓은 시계

2) 두 개의 좋지 못한 시계가 서로 항상 일치하게 만드는 길은, 능력 있는 시계공이 두 시계를 조정해서 그들이 매 순간마다 서로 일치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 이것은 니콜라 말브랑슈가 제시한 것이다. 17세기의 프랑스의 사제이며, 포스트 데카르트주의자라고 불리는. 하지만 데카르트에게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노선은 조금 다르다. 그가 제시하는 것이 바로 occasionalism 기회원인론. 기회라는 말을 썼냐면, 예를 들어 내가 손을 든다고 하면 그에게는 내가 손을 드는 것이 하나의 occasional, 내가 손을 들 때, 이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고, 나 자신이 원인이 돼서 손을 든 것도 아니고, 나로 하여금 신이 손을 들게 하도록 원인으로서 작용을 미친 것이다, 라는 의미다. 어떤 기회에 어떤 작용이나 사건, 어떤 행위가 일어나면 그 모든 것의 진정한 원인은 신이라는 것이 기회원인론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굉장히 재미있다. 마치 구조주의 같은 느낌. 이 두 번째 방식은 기회원인론적 방식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두 개의 별로 좋지 못한, 자꾸 느려지거나 해서 오차가 나는 시계는 방향이 안 맞을게 분명한데, 이 두 시계의 방향이 계속 일치하도록 아주 능력이 뛰어난 시계장인이 매 순간마다 두 시계를 조절한다는 것이다. 내가 손을 들 때 신이 나를 통해 작용하듯이 시계에도 매번 시계공이 작용해서 시간을 일치시키는 것. 엄청 바쁘겠죠ㅋㅋㅋ

*** 말브랑슈 malebranche: 기회원인론 occasionalism

- 유한한 인간을 비롯한 유한한 사물들이 행위하고 작용하는 모든 것은 신에 의해서다. 내가 이렇게 손을 든다면, 내가 손을 드는 이것이 바로 오케이션, 이 기회의 원인이 신이다. 말브랑슈 철학에서는 개인과 개체는 꼭두각시다. 신에 의해 규정되어 움직이는. 하지만 생각보다 미묘하다. 손을 드는 원인은 신인데, 말브랑슈 이야기는 이 근육의 운동, 인간이 가지고 있는 팔근육의 작용방식, 그러니까 팔을 들 때 근육이 이완되고 팽창되고 하는 방식, 이것을 신이 정해놓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라고 봤다. 인간의 신체를 규정하는 생리학적인 법칙. , 내가 움직이는 것은 임의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체를 규정하는 근육의 운동 패턴에 따라 움직인 것이다.

 

3) 두 시계를 처음부터 대단한 기술과 정교함으로 제작하여 그것들이 이후에 서로 일치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방식.

- 이게 라이프니츠 자신이 제시하는 방식이다. 예정조합. 아주 완벽하게 만들어서 알아서 둘이 일치하게 만드는 것.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설명에 제일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스피노자는 어떻게 했을까?

 

19세기 후반 독일의 아주 유명한 학자 게오르그 페히너 georg fechner, psychophysics라는 학문을 만든 사람이다. 심리물리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개척한 사람. 오늘날식으로 말하면 뇌과학? 신경생리학? 같은 것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사람이다. 프로이트 초기저작에서 페히너에 대해 얼마나 대단한 존경심을 갖고 있는지를 여러 대목에서 볼 수 있듯이 프로이트에게도 대단한 영향을 준 사람이다. 심리물리학. 그냥 psychology도 아니고 physics도 아니고 psychophysics 학문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ㅋㅋㅋ 이 결합된 이름 자체가 심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이 일치하는, 이것을 통합적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페히너가 라이프니츠에게서 parallelism을 가지고 온다. 평행성, 평행론이라는 모델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심리물리학에 저것의 기본원리들을 채택했다. 심리적인 사건과 신체적인 사건이 일치하는 이유, 그 매커니즘을 밝히려는 학문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면서 페히너가 라이프니츠가 이야기한 이 두 개의 시계의 세 가지 모델을 이렇게 언급한다.

 

라이프니츠는 세 개의 방식만 이야기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방식들 이외에 네 번째 방식이 있다. 그 네 번째 방식이 바로 스피노자의 방식이다. 스피노자의 방식이란 무엇일까? 페히너의 답은 두 개의 시계가 사실은 하나다“ ”두 개의 동떨어진 시계가 아니라 하나의 같은 시계다“, 그러니 당연히 시계가 일치한다. 이게 스피노자의 방식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페히너의 취지는 이해가능 하지만, 사실 이게 스피노자의 2부 정리7이나 3부 정리2에 나오는 스피노자 이야기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라고 보기에는 좀 어렵다. 어떻게 보면 정신과 신체의 관계, 또는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 관계를 두 개의 떨어져있는 시계라는 모델이 어떻게 일치하는지의 틀로 스피노자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라이프니츠가 여기에 스피노자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도 뭔가 스피노자의 철학, 2부 정리7이나 3부 정리2에 나오는 설명이 자기 모델에 맞지 않고 부적절해서였을 수도 있다.

 

<라이프니츠의 스피노자 비판>

 

[보편정신 학설에 대한 고찰]은 그가 1702년에 쓴 짧은 글로 상당부분이 스피노자에 대한 반박으로 이루어져있다.

 

나는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것과 물체 안에서 발생하는 것 사이에 완전한 평행성parallelism을 확립해놓았다(<- 이게 바로 parallelism의 유래다. 예정조합.) ....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정리2의 주석에서 영혼과 신체가 동일한 것이며, 단지 두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표현될 뿐이라고 말하며 2부 정리7에서는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가 하나의 동일한 실체, 곧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거나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라고 말한다 ... 나는 이점(<- 정신과 신체가 하나의 동일한 것)에 반대한다. 영혼과 신체는 능동의 원리와 수동의 원리가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서로 동일한 것이 아니다. ... [“모든 것이 정신화되어있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정신이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것이다(2부 정리13에서 스피노자는 정신을 신체의 관념이라고 이야기한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라이프니츠 비판의 또 다른 논점은 관념과 정신, 관념과 영혼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영혼(정신) 안에 관념들이 담기는 것이고 영혼(정신) 안에서 관념들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그에게 스피노자는 너무 이상한 것이다. 정신을 관념이라고 생각한다니.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수 있지?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도 담겨있다.

 

심리학 또는 심리철학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 19세기 말, 20세기 전반기까지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 인간의 심리적인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이다라는 것은, 과학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여겨지니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과학적으로 법칙화하거나 계량화하거나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철학이나 심리학에서 introspection이라는 말을 한다. 내성. 자기성찰. 어떤 심리주체가 자신의 마음 안을 들여다보는 것. 이런 시기에는 내성의 방법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20세기 중반쯤 미국에서 행태주의라는 게 나오면서 심리적인 것을 어떤 외재적인 행동처럼 평가하고 측정하는 방식들이 나왔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두 사람이 인간의 심리, 정신에 대해 평가하는 방식을 보면, 라이프니츠는 전자의 방식, 스피노자는 후자의 방식인 것이다. 라이프니츠에게 정신, 심리적인 것은 굉장히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 말하자면 창문이 없는 것. 그러나 스피노자에게는 정신이라는 건 관념이고, 나중에 정리11에 가게 되면 정신은 무한지성의 일부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서 정신이라는 건 전혀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열려있고 개방되어 있는 것. public한 것. 그러니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의 생각은 참 이상했을 것이다. 스피노자를 반박한 이 글의 제목에 보편정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 철학에는 개별적인 정신, 마음, 이런 것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이다. 무한지성 같은 보편적인 정신만 있지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그런 정신은 없는 것이다. 개채성.

 

어쨌든 우리가 라이프니츠 인용문에서 보듯이 라이프니츠가 parallelism을 쓰는 맥락을 보면, 이 말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우호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쓴 말이 아니라 스피노자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스피노자 철학과 구별되는 자기 철학을 말하기 위해 쓴 용어다. 이 용어를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고 이론화하기에는 이 용어의 출발점에서부터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 다시 강조하면, 물체와 실재를 구분하는 게 정리7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실재는 관념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실재다. 관념들 자신도 실재의 하나다. 형상적 실재로서의 관념도 있고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도 있다. 그러니까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에서 관념이라는 말을 형상적 실재와 실재에 대한 표상, 이렇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관념을 형상적 실재로 본다는 말은 관념을 양태로 본다는 말이다. 하나의 어떤 속성에 속해있는 양태. 그러니까 형상적 실재의 특징 중 하나는 원인이 된다는 점, 어떤 것의 원인이 되고 작용을 하고 작용을 받는. 반면에 표상적 실재라는 것은 이 형상적 실재에 대해 내가 표상을 갖는 것. 자동차에 대한 표상을 갖는다, 신호등에 대한 표상을 갖는다, 더 나아가서 이런 외부 물체뿐만 아니라 관념도 표상적 실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 평행론을 현대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평행론이 하나도 아니고, 적어도 두 개의 평행론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스피노자가 정리7, 따름정리, 주석에서 말하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주장인데, 표현들은 약간 다르지만 요점은 이거다. 1) 존재론적 평행론이 있고 2) 인식론적 평행론이 있다. 존재론적 평행론이란, 하나의 동일한 질서와 연관이 모든 속성에 걸쳐서 펼쳐지고, 각각의 속성에 따라서 때로는 연장속성 아래서 때로는 사유속성 아래서 표현된다는 바로 이 부분. 평행론을 주장하는 주석가들은 이걸 존재론적 평행론이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하나는 관념과 그 관념의 대상 사이의 일치를 설명하는 문제이고, 이것을 바로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본다. 스피노자의 2부 정리7에 두 가지 상이한 쟁점이 다 들어있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데, 두 측면이 다 가능한 것 같다.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이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다고 했을 때 우리가 이 관념들을 형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존재론적 평행론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관념들을 표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일치하는 대상으로서의 실재가 2부 정리 7에 들어가 있는 것.

 

2부 정리32의 증명을 보면 왜냐하면 신 안에 있는 모든 관념은 그 대상이 되는 것들과 완전히 합치하며(2부 정리7의 따름정리에 의해) 따라서 (1부 공리6에 의해) 이 관념들은 모두 참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7의 따름정리를 혼용하는 방식이 관념과 그 대상 사이의 합치다. 그러니까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표상의 대상과의 일치. 그래서 이것을 두고 어떤 주석가들은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부른다.

 

*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관념이다. 우리는 보통 사물에 대한 표상을 관념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점에서 표상적 실재라는 말은 상당히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의 독특성은, 우리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냥 하나의 독자적인 실재,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실재, 사물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인과작용을 할 수 있는 것,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념a는 관념b를 낳을 수 있고 관념b는 관념c를 낳을 수 있고... 이런 게 바로 형상적 실재다. 관념을 하나의 사물처럼 생각하는 것. 이게 스피노자의 특징이다. 우리는 자동차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달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그러니까 모든 사물에 대해 관념을 갖는,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관념을 이렇게 표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에게 반론한 게 바로 그것이다.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으로만 생각한 게 아니라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무언가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작용할 수 있고 작용 받을 수도 있는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그래서 정신도 관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 정신이나 관념이나 다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관념이라는 것을 표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 형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으로 구별한다. , 스피노자의 철학의 독특성은 관념이라는 것을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독자적인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사물처럼 제시했다는 것, 그러니까 형상적 실재로서 제시했다는 것이다. 관념이 하나의 사물이니까 이게 당연히 표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처럼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면, 관념이든 정신이든 사적인 것이 아닌 게 된다. 관념이라는 것이 public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3부에 가서 정서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감정을 굉장히 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 대한 나의 애틋한 사랑, 누군가의 비극에서 내가 느끼는 슬픔, 이런 건 나만이 알 수 있는, 나만의 고유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감정을 우리 개개인의 굉장히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신이라는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밀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정서라는 것을 그렇게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굉장히 퍼블릭한 것으로 여겼다. 이게 나중에 모방의 문제로 이어진다. 모방 욕망. 뒤에 가면 자세히 나올 것이다.

 

*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한다. A속성에서는 a가 따라나오고 B속성에서는 b가 따라나오고 연장속성에서는 물체가 따라나오고, 사유속성에서는 관념이 따라 나오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속성들은 동등하다. 그런데 우리가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을 생각해 보면, 저기서 물체에 대한 표상으로서의 관념이 있을 테고, a에 대한 관념도 있을 테고 b에 대한 관념도 있을 테고. 게다가 또 관념 자신에 대한 관념도 또 있을 것이다. 관념1에 대한 관념2, 관념2에 대한 관념3, 관념3에 대한 관념4..... 그리고 저 관념에 대한 관념은 분명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이고, 관념이니까 다 사유속성에 속할 것이다. 게다가 관념1에 대한 관념에 대한 관념에 대한 관념에 대한.... 이런 식으로 나가다보면 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보다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이 다 있으니까 + 게다가 각각의 관념이 형상적 실재가 될 수 있다면 계속해서 관념에 대한 관념으로 배가가 될 수 있으니까 다른 속성에 비해 사유속성이 훨씬 더 커지지 않는가. 이런 문제제기.

 

스피노자는 여기에 대해 특별히 이야기하는 바가 없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아니, 어차피 무한한데...ㅋㅋㅋㅋ 무한 곱하기 9를 하나, 무한 곱하기 30000을 하나 다 무한한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라고 생각할 수 있다ㅋㅋ 1부 정리15의 주석에 무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는데(“무한 양을 가정한 것에서부터 이런 부조리한 결론들이 나오기 때문에“), 누군가 직접 스피노자에게 저 질문을 던진다면 스피노자가 뭐라고 답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물체에는 이런 경우가 전혀 없지만 관념들의 경우에만 무엇에 대한 무엇에 대한 무엇에 대한..... 관념의 관념의 관념의.... 이게 생겨나니까, 다른 속성에 비해 사유속성은 뭔가 다른 점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속성들 사이의 동등성, 평등 이런 것을 유지할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을 주장했고 데카르트 철학에서는 정신이 속해있는 질서와 신체가 속해있는 질서는 별개의 질서다. 데카르트는 철학자 이전에 과학자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는 수학과 물리학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긴 후, 그 과학적 수학적 발견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형이상학자가 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철학에 관심이 많기는 했지만. 데카르트는 17세기의 과학혁명이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세계관을 배격하고 대신에 근대의 새로운 과학혁명을 이룩한 사람 중 하나다. 갈릴레이와 뉴턴의 중간 시기에 있었던 사람. 갈릴레이, 뉴턴, 데카르트들의 공통점은 자연을 수학적으로 인식하려고, 수학의 논리를 가지고-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기하학적인 방식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했던 점이다.

 

뉴턴 이전에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인식하다는 말은 자연으로부터 원인의 힘을 박탈하겠다는 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이 자연에 내재해있는 걸로 생각했던 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원인은 굉장히 목적론적인 원인인데- 원인으로서의 힘을 자연으로부터 박탈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사물을 원이나 삼각형이나 원통 같은 도형처럼 환원했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운동이란, 물체가 자기의 내적인 원인으로서의 힘을 가지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저 위치 이동일뿐이다. 다른 어떤 것에 밀려서 움직이는 것. 이렇게 자연을 수학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은 굉장히 피동적인 세계가 된다. 어떤 내적인, 인과적인 힘이 없는. 외부에서 충격을 주는 대로 움직이는. 그게 관성의 원리 inertia (, 관성의 원리가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자연을 수학적으로 해석한 결과는 자연으로부터 운동능력, 역량을 다 빼앗아간 것이었다. ? 이 시기에는 이 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방법을 몰랐다. 라이프니츠나 뉴턴 때에 와서 미분적분법을 가지고 와서 운동에너지, 힘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어서야 자연의 사물들이 피동성에서 벗어나서 원인으로서의 힘을 부여받게 됐다. 하지만 그 이전, 갈릴레이 데카르트까지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대가로 자연으로부터 힘을 다 박탈했다. 데카르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데카르트의 초기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작업을 가지고 이 복잡한 것처럼 보이는 자연 사물들을 환원해야할 텐데,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방법을 나름 탐구한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신체가 속해있는 물리적인 세계는 완전한 피동성의 세계다. 능동성이나 자발성이 전혀 없는 세계.

 

그러면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 인간의 신체가 물리적인 세계에 속한다고 하면, 인간으로부터 뭐가 빠져버린 거지? 요즘식으로 말하면 주체성, 자발성, 의지, 이런 것들이 빠지는 것인데, 데카르트 입장에서는 그 또한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데카르트의 신학적 관점에서도 그렇고, 그리고 데카르트는 인간의 제일 고유한 점이 의지라고 봤기 때문에 인간에게 뭔가 의지의 여지를 남겨줘야만 했다. 벌써 데카르트의 물리학이나 수학의 세계에서는 신체에게 그런 여지를 남겨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남아있는 것은 결국 정신. 그러니까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데카르트의 학문적인 관점(학문적인 맥락)에서 보면 필연적이다. 물리학자로서 보면 신체의 질서는 완전히 수학적으로 양으로 환원된 사물들의 질서인데, 거기서 그대로 놔두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의지라든가 자유가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어지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정신과 신체를 분리시킨다.

여기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정신과 신체가 분리가 되고, 정신이 속해있는 사유의 질서와 신체가 속해있는 연장의 질서가 완전히 다른데, 그럼 자연의 통일성, 우주의 통일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게 굉장히 수수께끼처럼 남는다. 또 하나,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면 데카르트에 따르면 정신과 신체는 서로 상이한 질서에 속해있기 때문에 상호작용 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 우리 정신과 신체가 하나를 이루고 있는, 합일되어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 데카르트의 질서에 따르면 이 두 가지는 분리되어야 마땅하고 다른 질서에 속해있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는 정신과 신체가 합쳐져 있다는 것을 일상경험에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걸 두고 우리는 맨날 속고 있는 것이다라고 우길 수도 없고. 그래서 데카르트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에 대한 난감한 문제에 봉착한다.

 

데카르트가 1649년에 쓴 마지막 책인 <정념론>, 영혼의 정념이라는 책의 중요한 주제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 이후 서양근대철학자들,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말브랑슈 등이 제일 고심했던 주제도 바로 정신과 신체의 관계였다. 라이프니츠가 두 개의 시계의 세 가지 모델을 제안했을 때 첫 번째 모델은 바로 데카르트주의에 입각한 설명이었다. 두 번째가 말브랑슈고 세 번째가 자기 자신. 그러니까 심신 문제는 당시 철학자들에게 굉장히 견고한 논의주제였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신체는 다르다, 분리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에 반하여 스피노자는 2부 정리7에서 정신과 신체는 같은 것이다로 출발한다.

 

정리8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continentur) 것과 마찬가지로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함/파악되어(comprehendi) 있어야 한다.“

증명 이 정리는 앞의 정리로부터 명백하지만 앞의 주석으로부터 좀 더 명료하게 이해가 된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 실존하는 동안에는, 그 실재들의 표상적 존재 또는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이 실존하는 한에서만 실존한다. 그리고 독특한 실재들이, 단지 신의 속성 안에 파악되어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또한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도 실존하는 경우, 이 실재들의 관념들 역시 그것들이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실존을 함축한다.

- comprehendi 해석하기 참 까다로운 단어다. 이해된다, 파악된다/ 포함된다 포괄된다, 이렇게 두 가지 뜻이 있어서. 스피노자가 여기서 continenturcomprehendi, 이렇게 다른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데 맥락상으로 보면 이 양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냥 같은 단어를 쓰지 다른 단어를 써서 차이가 있을까 고민이 계속 되지만 맥락상 비슷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 우리가 정리7에서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이 같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게 초점이었다면, 여기서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이 초점이 된다.

정리9로 가게 되면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이 초점이 된다.

정리7에서 8, 9로 가면서 조금씩 초점이 변하고 있다.

 

- 정리8을 보면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 사이에 마찬가지로라는 말이 들어갔으니 전자와 후자에 상응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 독특한 실재들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

- 2부 정의2에서 본질에 대한 정의를 살펴봤었다. 실재가 주어지면 본질도 주어지고, 그 본질이 주어지면 그 실재도 주어지고, 그 실재가 제거되면 그 본질도 제거되고 본질이 제거되면 실재도 제거되는 현행적 본질actual essence . 그리고 이 정의의 본질과 상응하는 것이 3부 정의7의 코나투스.

- 저기서 코나투스를 그냥 본질이라고 하지 않고 현행적 본질이라고 했지만, 정리8에서는 형상적 본질formal essece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이 스피노자 주석가들 사이에서 크게 논쟁이 되는 부분이다. 논문 쓰기 굉장히 좋은 문제ㅋㅋ actual하고 formal하고 달라?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거지?에 대한 문제로.

 

- 본질에 대한 아주 독특한 정의다. 스피노자의 본질은 종적 본질또는 여러 개체들이 공유하는 형상으로서의 본질이 아니라 매우 개체적인 본질이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을 가진 말을 할 줄 아는 동물이다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동물의 한 으로서 인간의 본질은 이성을 가진’ ‘말을 할 줄 아는에 있다고 보는 것. 곧 여러 동물들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이성을 가지고 있고 말을 할 줄 알며 이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고유한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 개념에 입각해서 생각하면, 인간 중 어떤 한 사람이 사망한다고 해서 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반면 스피노자의 본질 개념에 따르면 실재와 그 실재의 본질은 둘 중 하나가 정립되면 다른 것도 정립되고,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 개념의 구체적인 사례는 3부 정리7에 나오는 코나투스’, 정리9에 나오는 욕구내지는 욕망이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현행적 본질 essentia actualis actual essence라고 부른다.

- 2부 정리40에서 스피노자는 ‘ ’을 상상적인 관념/통념으로 규정하며 비판한다. 스피노자는 인간 전체‘ ’돌고래 전체같은 집합적 를 비판하고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의를 불신한다.

 

- 그러면 스피노자에게는 이런 개별화된 본질개념 말고 다른 본질 개념은 없는가. 이를테면 종적인 본질같은 것. 있다. 1부 정리8의 두 번째 주석에 나오는 형상개념. forma. 여기에 깔려있는 생각은 어떤 특정한 개인만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부르는 전체가 forma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 이 말은 forma라는 것이 우리가 방금 정의2에서 본 것처럼 개체화된 본질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공유하는, 종적인 성질의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forma 개념에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종적인 본질 개념이 녹아들어있는 것. (이 주석에서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다. ”정서를 갖는다라는 성질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갖고 있는데 이건 다른 종끼리 forma를 공유하는 것 아닌가. 아니다. 인간도 정서를 갖고 동물도 정서를 갖지만 이것 역시 forma가 다른 것이다. 인간과 고양이는 forma가 다르니까 인간이 갖는 정서 forma와 고양이가 갖는 정서 forma는 다른 것이다)

 

-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4부 서문. ”변형된다“ mutetio mutation. 여기서 스피노자가 변형된다는 말을 어떻게 쓰냐면, 말의 고유한 form이 있는데 이게 벌레의 고유한 form으로 바뀌게 되면 말의 고유한 form이 해체되니까 파괴된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하나의 form이 다른 form으로 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 스피노자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이 종적인 형상, 종적인 본질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 본질 개념을 가지고서는 개별적인 본질, 개체적인 본질을 설명하기 적절하지 않으니까 2부 정의2에서는 바로 개체화된 본질을 정의로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 그러나 들뢰즈 같은 경우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한다. ”짐 끄는 말하고 경주용 말 사이의 차이가 짐 끄는 말과 짐 끄는 소의 차이보다 더 크다그러니까 들뢰즈는 form의 차이보다 무슨 일을 하느냐-들뢰즈는 이것을 affect의 차이라고 하는데-의 차이가 종적인 형상의 차이보다 더 크고 중요하다, 말과 소라는 form의 차이보다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affect를 갖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스피노자 생각과 가깝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다. 스피노자는 그렇게까지는 확실히 이야기 하지 않았다.

 

이것은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본질과도 또 다르다.

 

<<<<<<<<<<<<<<<<< *** 현행적 본질 VS 영원진리로서의 본질

 

-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가면 재미있는 논의로 이어지면서 어떤 문제가 제기가 된다. 한번 2부의 정의2로 가보자. 2부의 정의2는 실재의 본질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본질개념을 정의해놓은 것이다. 나는 어떤 실재의 본질에는, 그것이 주어지면 그 실재가 필연적으로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실재도 필연적으로 제거되는 것이 속한다고, 또는 그것이 없이는 실재가, 역으로 실재가 없으면 그것이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 속한다고 말한다.

- 그러니까 여기에 따르면 A라는 사물이 있고 A라는 사물의 본질이 있다. 그러면 이 A라는 사물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이 성립하면 A도 성립, 이것이 사라지면 A도 사라지는. 반대로 A가 성립하면 A의 본질도 성립하고 A가 사라지면 A의 본질도 사라지는. 이게 바로 사물의 본질이다.

- 그런데 이 정의2에 나오는 이 본질개념의 아주 독특한 특징은, 이 본질은 굉장히 개체화된 본질이다. A라는 개체, A라는 사물과 뗄레야 뗄 수 없게 긴밀하게 연결된 본질. 이게 정의2에 나오는 본질이다.

- 그런데 우리가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 사람의 본질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정리해보자. A라는 사람이 생겨나서 살다가 사라졌다. 2부 정의2에 따르면 이 A라는 사람의 본질은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1부 정리17의 주석에 따르면 A라는 사람의 본질은 남아있어야 한다. 영원본질이니까. 그런데 2부 정의2를 따르면 A라는 사람이 성립하면 A의 본질이 성립하고 A라는 사람이 사라지면 A의 본질도 사라진다. 그러니까 상호관계가 성립. 그러나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는 이러한 상호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 그리고 아까 1부 정리17의 주석에 삼각형의 본질 이야기도 나온다. 삼각형A의 본질이라고 안 하고 삼각형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본질은 보편적인 본질, 류적인 본질, 종적인 본질이다. 어떤 특정한 개체와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있는. 삼각형의 본질은 삼각형A 하나가 없어져도 남아있다. 사람의 본질도 사람 하나가 없어져도 남아있다. 그런데 2부 정의2에 나오는 것은 A가 사라지면 이 본질도 당연히 사라진다. 뭐지?????

 

- 3부 정리7로 가보자. “각각의(each)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conatus)은 실재의 현행적 본질(actual essence)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코타투스를 현행적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 현행적 본질이 바로 2부 정의2에서 내리는 이 본질이다. 이것은 그 사물이 성립하면 이 사물의 코나투스도 성립하고 이 사물의 코나투스가 성립하면 이 사물도 존립하고, 이 사물의 코나투스가 없어지면 이 사물도 없어지고. 그러니까 이 사물과 이 사물의 본질 사이에는 상호성, 상호전제관계가 성립한다. 이걸 스피노자가 actual essence라고 부른다.

- 그러니까 2부 정의2는 사실은 3부 정리7의 코나투스를 염두해두고 제시된 정의다.

 

- 그럼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이 본질은 현행적 본질인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영원진리로서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럼 영원진리로서의 본질과 현행적 본질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이 답은 나중에 5부에 나온다. 그것도 아주 첨예한 문제로 나온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는 사람과 관련해서 영원성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안 하는데, 지금 영원한 것은 다 신, 속성 이런 것들인데, 5부에서는 인간 같은 유한한 것과 관련해서 영원성을 이야기한다.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본질: 영원진리로서의 본질 VS 2부 정리2에 나오는 본질: 현행적 본질) >>>>>>>>>>>>>>>>>>>>>>>>>>>>>>>>>>

 

- 여기서 1부 정리13의 따름정리를 다시 보자. 이 정리에서 신이 물체라면, 신도 분할될 것 아니냐, 물체는 분할되니까라는 적수들의 반론에 스피노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물체의 분할은 실체로서의 분할이 아니라 양태로서의 분할이다. 모든 물체가 분할하는 것은 아니다. 양태적으로 구별되는 것들로 물체를 이해할 때만 물체는 분할된다. 하지만 연장속성, 물질전체로서, 실체로서의 물체는 분할되지 않는다 (다시 들어도 딱 떨어지는 멋진 반박이다)

 

- 스피노자의 현행적 본질과 형상적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일치한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이라고 한 것이 무엇인지 삼각형의 예를 들어보자. 삼각형을 독특한 실재의 사례라고 본다면, 삼각형의 형상적 본질이 있을 것이고, “내각의 합이 두 직각과 같다가 바로 형상적 본질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은 신의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형상적 본질에서 특성들이 따라 나온다. , 삼각형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성질들이 따라 나온다. 그것들 역시 신의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 정리7과 정리7의 주석에서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형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이지만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고 말했다. 원과 원의 관념은 사유속성에 따라서 표현되기도 하고 연장속성에 따라서 표현되기도 하고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상이한 속성들에 의해 설명된다스피노자는 정리8에서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는데 정리7의 논법대로 하면 이것들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이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것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괄되어(comprehendi)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관념들, 이때 관념들은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들이라는 말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이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에는 뭐가 있을까. 우리는 2부 공리1에서 신/실체는 본질적으로 실존을 함축한다고 했지만,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 곧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 실존하거나 실존하지 않는 일이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기원인과 다르게 인간은 본질상 실존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본질과 실존 사이의 존재론적 괴리가 인간을 포함한 유한한 것들의 특징이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의 사례로 생각되기 쉬운, 이를테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 아직 출시되지 않은 아이폰 13 같은 것들은 정리9에 나오는 사례들이다. 정리8의 따름정리를 보면 명확해지는데, 따름정리에서 두 가지를 구별하고 있다. 1)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이게 정리8에서 이야기하는 것), 2)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만 실존하는 것. 이때 지속이라는 것은 우리식으로 좀 더 풀어서 말한다면, 시공간적인 어떤 개채성을 갖고 있는 어떤 것이다. 아이폰13이라든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아직 실존하고 있지 않지만,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보면 지속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들 모두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그게 어떤 것인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그게 시공간적인 개체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정리8에서 이야기하는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와는 다른 것이다.

- 지속 개념은 3부의 코나투스와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2부 정의2와 연관 지어 보면 실존하는 사물이 있어야 코나투스가 존재하고 실존하는 사물이 없으면 코나투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코나투스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이 존재할 때만 함께 존재하는 현행적 본질이다. 3부 정리8을 보면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은 유한한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을 함축한다라고 하는데, 코나투스의 시간은 무한정하다= 그 사물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 그럼 코나투스의 시간은 지속이다= 하지만 영원은 아니다

- 그러니까 지속이라는 것은 정의상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정확히 말하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이게 그냥 쭉 계속 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무한하지는 않고, 또 영원하지도 않은. 그래서 무한한이라고 하지 않고 무한정한이라고 한 것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을 수 있지만 무한하다, 영원하다라고 얘기할 수 없는 실존의 차원을 스피노자는 지속이라고 한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란 가령 인간의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인간은 본질을 갖고 있고 여러 가지 특성들, 웃을 수 있다/직립할 수 있다 같은 득성들을 갖고 있다. 그럼 여기서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란 직립할 수 있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웃을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말할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는데 앉아있다는 특성만 갖고 있는 소크라테스같은 그런 것. 이런 것들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이다. 이것들은 지속을 갖고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있을 수 없다. 다른 건 아무 것도 없고 말할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같은 것. 그렇다고 이게 아주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말할 수 있는 특성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갖고 있는 특성이니까. 그러니까 한 가지 특성으로만 파악된 독특한 실재,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이다.

 

- 그렇다면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의 의미는, 직립하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웃을 수 있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이것들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고, 또한 우리가 실존하는 개체로서 개별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니까 오직 무한지성 안에만 있다는 그런 의미다.

- 스피노자가 정리8에서 이런 사례들을 든 이유는 그래야 정리8과 정리9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정리8지속의 차원에 속하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체적인 개체라고 상정할 수 있는 어떤 실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정리8과 정리9는 구별되어야 하고, 정리8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존하지 않는 현행적 실재라는 것은 아직 지속의 차원이 들어가지 않은, 구체적인 개체성을 갖지 않는 그런 독특한 실재다.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허구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런 것.

- 스피노자의 주석을 보면 그림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예시하는 이 원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3권 정리35에 증명의 대상으로 나오는 도형이다. 수직으로 교차하는 선을 가진 원. 스피노자는 여기서는 이렇게 두 개의 선만 존재하지만 이 원 안에는 무수히 많은 다른 선 또는 직사각형이 있을 수 있다, 그게 실존하지 않는 어떤 독특한 실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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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7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ordo et connexio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

 

증명 이는 1부 공리4로부터 명백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원인지어진 것에 대한 관념은, 이것이 그 결과가 되는 그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 현대 주석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아주 분분한 중요한 정리. 자세히 파고들자면 한 달 동안 다뤄야할 정리이다

- 정리5: 관념에 대해서만. 관념/사유속성을 한정해서 이것들이 신을 원인으로 삼듯이-

- 정리6: 양태들(사유+연장+속성abc등등)도 실체로서의 신을 원인으로 삼고 있다. 사유속성은 사유속성으로 표현되는 실체로서의 신을 원인으로 삼고 있고 연장속성은 연장속성으로 표현되는 실체로서의 신을 원인으로 삼고 있고.

- , 정리5가 사유속성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정리6은 이것을 모든 것으로 확장했다

- 정리6의 따름정리가 곧 사유의 양태들이 아닌 실재들의 형상적 존재가 신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면, 이는 신이 실재들을 미리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보여준 바, 관념들이 사유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과 동일한 방식, 동일한 필연성에 따라 이 실재들이 그것들 자신의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오고 도출되기 때문이다.“ 정리7로 직결

 

* 주석을 보면 어떨 때는 질서만 언급하고 어떨 때는 연관만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왜 질서만이 아니고 연관만이 아니고 왜 질서와 연관이라고 했을까? 왜 이 문장에서만 질서와 연관인 걸까? 질서나 연관이 아니고 질서와 연관인 걸까. (누가 편지로 질문 좀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 Martial Gueroult (1890-1974) 아주 중요한 주석서를 쓴 프랑스 철학사를 대표하는 마샬 게루. 그가 스피노자 윤리학에도 두 개의 주석서를 썼다. 1부에 대해 한 권(1968) 2부에 대해 한 권(1974). 사실 세 권으로 기획했는데 3권 서문만 쓰고 세상을 떠났다. 아마 3-4-5부는 한 권으로 묶어서 써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1권은 거의 600페이지가 넘고 2권은 더 두껍다. 마샬 게루가 질서와 연관에 대해 사변을 쓴 것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연관: 사물의 본질의 질서, 질서: 사물의 실존의 질서>를 표현한 것으로 연관이 질서보다 수준이 높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는 어디 있는가? 없다ㅋㅋㅋㅋ 딱히 근거가 없다. 어쨌든 스피노자가 서로 다른 단어를 쓰고 있으니까, 이것을 스피노자 철학 체계에 맞춰서 어떻게든 대결을 시켜야 속이 풀려서ㅋㅋㅋ

 

- comexio verum 이라는 표현이 있다. 상당히 오래된 표현이다. 고대 스토아학파 이래로 계속 전승되어 내려온 용어다. connection of things 저게 뜻하는 바는, 만물은 다 연결되어 있다. 만물의 연관, 만물의 연관성. 실재들의 연관. 사물의 연관. 그래서 매우 익숙한 표현인데 17세기는 과학혁명이 일어난 시기이고, 자연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이 생긴 시기인데, 새로운 과학 혁명의 요체는 기계론적 세계관, 질적으로 상이한 사물들을 양으로 환원해서 통일된 법칙을 부여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역학적 세계관. 이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보면 만물의 연관은 아주 시대착오적 생각이었다. 만물의 연관은 모든 사물을 한데 끌어 모았다가 퍼지게 하는, sympathy로 모였다가 antipathy로 헤쳐졌다가 하는, 밑바닥에 우리가 모르는 숨은 원리가 있고, 우리가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현상 밑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사물을 움직이는 기운이 있다는 것까지 이어진다. 이를 테면 동양의 5부 서문에 나오는 오컬트 퀄리티 같은. 기계론적 세계관은 저것을 거부한다. 스피노자는 과학혁명을 환영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인데 그런 그의 철학에 만물의 연관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이 단어를 쓰고 있지만 아마 새로운 세계관에 입각해서 새롭게 쓰고 있는 것일 확률이 훨씬 높다.

 

* 정리7은 이른바 평행론paralleism 명제라고 불린다. 이때 평행론 또는 평행성이 가리키는 것은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이 평행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평행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평행론이라는 개념이 정리7을 규정하기에 적절한 용어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리7 자체에는 평행하다는 말이 없다. ”같은 것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이걸 왜 평행론이라고 할까?

- 사실 이 용어 자체는 스피노자가 사용한 말이 아니라, 라이프니츠가 처음 사용한 것이다. ”나는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것과 물체 안에 발생하는 것 사이에 완전한 평행성을 확립해놓았다따라서 라이프니츠가 사용한 말을 스피노자 철학에 적용하는 것이 적합한가에 대해 여러 의문과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그냥 대세에 따라ㅋㅋㅋ 평행론이라고 부른다. 마샬 게루도 평행론 명제라고 부르고 들뢰즈도 그렇다. 들뢰즈는 박사학위논문에서 스피노자의 정리7 평행론에 대해 무려 두 챕터에 걸쳐 서술한다.

- 이 두 사람뿐이 아니다. 최근 들어 약간 엉뚱하게 스피노자 학계에서 평행론 논의에 매우 공을 많이 들이며 설왕설래중이다. 그 중 가장 주목받는 사람이 Yitzhak Melamed. 요즘 영미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스라엘 출신의 스피노자 연구자이다. 박사논문으로 평행론 문제를 다뤘고 그것을 발전시켜서 책을 냈다. 재작년에는 한국에서도 평행론 문제를 가지고 박사논문을 쓴 철학자가 있었고, 그 외에도 상당히 많은 연구자들이 평행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평행론을 현대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평행론이 하나도 아니고, 적어도 두 개의 평행론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스피노자가 정리7, 따름정리, 주석에서 말하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주장인데, 표현들은 약간 다르지만 요점은 이거다. 하나는 존재론적인 평행론이 있고 다른 하나는 인식론적인 평행론이 있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정리7에서 말하는 평행론은 다중적인 평행론이다.

- 어쨌거나 여러 주석가들이 평행론이라는 말을 쓰기 때문에 쓰지 않을 수는 없는데 약간 이상하다. 스피노자가 평행론이라는 말 대신 같다라는 말을 썼는데 우리가 꼭 평행론이라는 말을 써야할까. 어떻게 보면 평행론의 논의가 복잡한 이유는, 스피노자가 쓰지 않은 단어로 스피노자 철학을 설명하려고 하니까 자꾸 뭔가를 덧붙이게 되고 왜곡 변형하게 되면서 그런 게 아닐까.

 

* “실재들의 연관에서 우선 실재들이라는 개념에 주의해야 한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말하는 실재res는 연장속성에 속하는 물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것을 물체라고 혼동하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제시될 수밖에 없다

 

1) 실재들 = 물체들이므로 관념들은 실재들이 아니다.

2) 따라서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A라고 하자)실재들의 질서와 연관”(B라고 하자)과 같은 것이라면, 이때 같음AB라는 서로 상이한 연관 사이의 일치 내지 상응의 문제가 된다

3) 이렇게 되면 이러한 일치와 상응이 어떻게 가능한지 수수께끼로 남게 되며 이를 서로 무관한 두 질서 내지 연관 사이의 평행의 문제로 이해하게 된다. 스피노자의 말에 따르면 관념은 사유속성이고 물체는 연장속성인데 1부 정리2(상이한 속성을 지닌 두 물체는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는다)에서 관념은 물체를 상정할 수 없고 물체도 관념을 상정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하나의 속성은 다른 속성과 독립적인 것. 한 속성에 속해있는 양태가 다른 속성에 속해있는 양태와 인과관계가 있을 수 없다는 것. 관념이 속한 사유속성과 물체가 속하는 연장 속성은 인과적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독립적이다. 그러니 관념과 물체가 절대 같을 수 없다. 논리적으로 인과적으로 관념과 연장은 합치하지 않는데 이게 어떻게 합치한다고 하는 걸까.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다. 그러니까 정리7의 실재를 물체로 해석하면 안 된다.

 

4) 따라서 왜 스피노자가 정리7에 대한 증명에서 1부 공리4(결과에 대한 인식은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며 그것을 함축한다)를 제시하는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서로 독립적인데 왜 원인과 결과야,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5) 더 나아가 뒤에서 보겠지만 스피노자가 따름정리에서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표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을 동일한 연관, 동일한 질서라고 말하는 것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정리7이 스피노자 체계에서 지닌 중요성에 비하면 이 정리에 대한 증명은 너무 간단하다. 1부 공리4로부터 명백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공리4의 논점이 원인지어진 것”, 결과원인사이의 관계를 제시한다는 점에 유념해야한다. 이는 곧 스피노자가 AB같은 것이라고 할 때 AB의 관계가 원인과 결과라는 점을 가리킨다.

6) 따라서 같은 것이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하는데, 같다는 것은 서로 외재적이고 (존재론적이거나 논리적으로 무관한) 두 개의 질서 내지 연관 사이의 일치 내지 상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그러니까 실마리는 실재라는 단어다. 물체만이 아닌, 관념도 실재, 신도 실재,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실재다. 물체로 한정짓지 않아야 한다.

 

* 2부 정리7은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자연의 인과적인 동일성을 표현한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정리6에서 신을 절대적 존재자, 곧 각자가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로 규정한다. 속성들 각자가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한다는 것은 속성들 각자가 자율적이라는 것(스피노자의 전문적 표현에 따르면 자신의 유안에서 무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성들은 외부의 어떤 것에도 제약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작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속성들은 서로 동등하다. 곧 속성들 중 하나가 다른 것에 비해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 가령 사유속성은 연장속성에 비해 우월하지 않으며, 반대도 마찬가지. 그리하여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정신을 비롯한 관념들)도 연장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신체를 비롯한 물체들)에 비해 우월하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실체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스피노자가 말하듯 신 또는 실체의 절대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절대성이란 모든 것을 포함함을 뜻한다. 곧 신 또는 실체가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다는 것은 실체가 각자 무한한, 각자 다른 것에 의해 제약되지 않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표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체의 절대성은 실체의 절대적 동일성을 함축한다. (1부 정리11 신 또는 각자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한다)

 

그러나 이때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체나 신을 하나의 개체, 더 나아가 인격적 개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에게 실체 또는 신은 자연 전체이지 이러저러한 개별적 존재자가 아니다. 그리고 실체를 구성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은 각자 자율적인 인과 연관 내지 질서이기 때문에,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은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생산해내는 인과관계들 전체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2부 정리7이 의미하는 바는 자연을 구성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은 동일한 하나의 연관 내지 질서를 표현한다는 점이다. 2부 정리7의 주석, ”우리가 자연을 연장의 속성 아래 인식하든 아니면 사유 속성 아래 인식하든 또는 그 어떤 속성 아래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를 발견한다 이 점은 3부 정리3의 주석에서도 다시 긍정된다. 자연이 이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아니면 저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간에 실재들의 질서 또는 연관은 하나다.“

 

2부 정리7의 또 다른 논점은 속성들 사이의 실재적 구별이라는 논점이다. 스피노자가 자연의 인과적 질서과 연관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속성들 사이의 구별을 배재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사유와 연장 같은 속성들이 각자 자신의 유안에서 무한하고 따라서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되지 않는 자율성을 유지하는 한에서, 사유와 연장은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된다. 곧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상호 제약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런 인과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과 관계는 오직 각각의 속성 내부에서 전개될 뿐이다. 사유 속성에 속하는 양태인 정신과 연장 속성에 속하는 양태인 신체 사이에도 아무런 인과관계 내지 상호작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3부 정리2 신체는 정신이 사고하도록 규정할 수 없고 정신은 신체가 운동하거나 정지하도록 또는 그 이외에 (만약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다른 어떤 것을 하도록 규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정신과 신체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나 상호 작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신과 신체가 전혀 별개의 존재인 것은 아니다. 실체가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을 통해 표현되듯이, 그리고 동일한 실재들의 질서 또는 연관이 때로는 사유속성 안에서 때로는 연장속성 안에서 표현되듯이, 인간이라는 통일체 역시 때로는 정신을 통해 그리고 때로는 신체를 통해 표현된다. 정신과 신체의 존재론적 동일성이 함의하는 것 중 하나는, <윤리학> 2부 정리7의 주석이 말하듯이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를 표현한다는 점이다.

 

들뢰즈는 평행성내지 평행론이라는 말을 라이프니츠가 처음 사용했지만 이 개념은 스피노자 철학에 더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3중의 평행성

1) 양태들의 평행성 (관념과 그 대상(가령 물체)의 평행성) <- 이것이 평행한 이유는 2)

2) 속성들의 동등성/상동성 (사유속성, 연장속성...) <- 이것이 동등/상동하는 이유는 3)

3) 존재의 동일성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신의 사유역량은 신의 현행적인 행위 역량과 동등하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곧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 동일한 연관에 따라 신 안에 있는 신의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

 

행위역량“. 연장속성에 포함되어 있는 물체들의 역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유속성에도 적용된다. 신의 행위역량을 신체적인 또는 물리적인 행위역량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행위 역량이라고 부른 것은 연장 속성을 통해 발휘되는 물리적인 행위 역량= 인과 역량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사유속성을 통해 발휘되는 인식 역량을 가리키기도 하며, 더 나아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 다른 속성들을 통해 발휘되는 또 다른 행위 역량들을 가리킨다. 곧 이러한 행위 역량은 모든 속성들을 통해 표현된다.

 

이렇게 이해할 때 그 다음 문장처럼 이야기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연장 속성 안에서 물체로 나오는 모든 것, 사유 속성 안에서 관념으로 나오는 모든 것, 알 수 없는 속성abc...등등에서 나오는 모든 것, , 이 모든 각각의 속성에서 신이 행위적으로 결과로 산출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문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형상적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 표상적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 형상적 실재성은 어떤 사물을 그 자체로 고려했을 때 그 사물이 지니고 있는 실재성을 가리킨다. 반면 표상적 실재성은 정신 안에 재현된 것으로서의 실재성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우리는 태양으로부터 두 가지 실재성을 갖는다. 태양 자체의 실재성(태양계에서 제일 큰 항성 등등의 특성을 갖는 연장의 양태), 우리가 태양에 대해 갖는 관념의 실재성(정신 안에 재현된 것으로서의 태양). 전자가 형상적 실재성이고 후자가 표상적 실재성이다.

 

하지만 또한 관념들 역시 두 가지 실재성을 갖는다.

관념의 형상적 실재성 : 사유 속성 내의 한 양태로서 고려되었을 때의 관념

관념의 표상적 실재성 : 다른 관념에 의해 재현된/표상된 것으로서의 관념

 

따라서 마지막 문장이 의미하는 것은 신은 자신이 자신의 행위역량을 통해 산출한 모든 실재(이 실재는 형상적 실재를 의미)에 대하여 완전한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 곧 모든 형상적 실재는 신의 관념 안에 그것과 일치하는 표상적 실재로 표상/재현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신은 자신이 절대적인 행위 역량을 통해 산출해내는 모든 형상적 실재들을 동시에 신의 관념 안에서 표상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사유 역량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동일한 질서 내지 연관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래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32에서 이런 말을 한다. 왜냐하면 신 안에 있는 모든 관념은 그 대상이 되는 것들과 완전히 합치하며(2부 정리7의 따름정리에 의해) 따라서 (1부 공리6에 의해) 이 관념들은 모두 참되기 때문이다.“ idea 관념 ideatum ”그 대상이 되는 것관념의 대상이 되는 관념이 표상하는 것.

 

, 정리7의 따름정리의 마지막 문장에서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려는 것이 2부 정리32의 증명도 따르면 신 안의 모든 관념은 그 대상이 되는 것들과 완전히 합치한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신이 형상을 산출할 때 그에 대한 표상도 같이 산출하고, 신 안의 모든 관념은 그 대상과 합치한다. 신은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통해 형상적 실재를 산출하면서 동시에 모든 것의 표상적 실재도 산출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동일한 방식, 동일한 연관에 따라 합치한다 (adaequatio 아다이콰치오 일치 상응. 지성 바깥의 관념과 사물이 딱 일치할 때 그것이 진리다) 그러니까 ideaideatum이 일치하면 진리다.

 

신의 사유역량은 신의 현행적인 행위 역량과 동등하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동등하다도 참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다. aequalis 아이콸리스 영어로 equal 인데, 평등하다, 동등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같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니 여기의 동등하다는 것을 좁은 의미의 동등함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넓은 의미의 동등함, 수학에서 이야기하듯이 equal, 같다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스피노자의 논점과 부합하는 것 같다.

 

주석 좀 더 진행하기 전에 앞에서 우리가 보여준 것을 여기에서 상기해봐야 한다. 곧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그리하여 연장의 양태와 이 양태의 관념 또한 하나의 동일한 것이지만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어떤 히브리인들이 신과 신의 지성 및 신이 인식한 실재들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구름 사이로 보듯이 보았던 게 바로 이 점인 듯하다. 가령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이것 역시 신 안에 존재한다)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상이한 속성들에 의해 설명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causarum connexionem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동일한 실재들이 서로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신은 오직 그가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만 어떤 관념, 가령 원의 관념의 원인이며, 오직 그가 연장되는 실재인 한에서만 원의 원인이라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니라 원의 관념의 형상적 존재는 가까운 원인으로서의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지각될 수 있고, 이 다른 사유 양태 역시 또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그럴 수 있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재들이 사유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동안에는 우리는 자연 전체의 질서, 또는 원인들과의 연관을 사유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해야 하고, 그것들이 연장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한에서는 자연 전체의 질서는 마찬가지로 연장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되어야 하며, 다른 모든 속성들에 대해서도 나는 이처럼 이해한다. 그리하여 신은 사실 그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한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로의 실재들의 원인이다. 지금으로서는 이를 더 명료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1부 정의4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를 조금 더 정확히 제시하고 있다. 곧 여기에서는 1부 정의4에 나오는 지성이 무한지성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 무한한 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하는 것은 바로 속성이다. 그리고 연장과 사유는 각각 신의 속성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유이한 속성들)이다. 스피노자는 연장과 사유를 때로는 연장되는 실체사유하는 실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1부 정의6 및 정리11에 따라) 모든 속성은 독자적인 실체를 구성하지 않고 유일한 절대적 실체로서 신에게 속하기 때문에, 연장되는 실체와 사유하는 실체는 동일한 하나의 실체이며, 이 동일한 실체는 때로는 사유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연장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고 할 수 있다.

 

연장 속성과 사유 속성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두 개의 속성이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우리가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 가운데 연장 속성과 사유 속성만 알고 있는데 우리가 과연 신을 인식한다고 할 수 있을까. 무한하게 많은 속성 가운데 두 개의 속성이면 표본이 너무 작지 않은가. 여론 조사 할 때 5000만 인구 중에 두 명을 표본으로 삼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데 5000만도 아니고 무한하게 많은 속성 가운데 우리가 두 개의 속성만 알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신의 본질을 알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스피노자의 답이 정리7인 것이다(ㅠㅠㅠㅠ)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신을 인식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여론조사와는 다르다ㅋㅋ 사유속성과 연장속성만 알아도, 혹은 사유 속성 하나만 알아도 우리는 신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연장의 양태와 이 양태의 관념 또한 하나의 동일한 것이지만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 앞 문장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의 동일한 실체가 사유속성으로도 표현되고 연장속성으로도 표현되는데, 이것은 양태도 마찬가지다.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가 동일한 하나의 실체이듯이, 연장에 속하는 양태와 그 양태의 관념 역시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곧 이것은 때로는 연장을 통해 표현되고 때로는 사유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단 이것은 실체가 아니라 양태다.

 

더욱이 연장에 속하는 양태와 그 양태의 관념 사이의 동일성은, 하나의 개별 양태에 속하는 어떤 특별한 성질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사이의 같음또는 동일성으로 인해 생겨나는 결과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2부 정리13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인간은 신체와 신체에 대한 관념으로 이루어진 양태고, 인간은 때로는 사유속성 안에서 정신으로 때로는 연장 속성 안에서 신체로 표현되기도 한다는 것.

 

이것은 3부 정리7로 가면 코나투스로 표현된다. 3부 정리9의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코나투스가 정신과 신체로 동시에 표현되는 것이 욕구이고, 정신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 의지라고 한다. 하나의 동일한 코나투스, 인간적 본질로서의 욕구가 신체를 통해서 표현이 되기도 하고 정신을 통해서 표현이 된다, 즉 때로는 연장 속성 아래서 때로는 사유 속성 아래서 표현되는 것이다. 이때 스피노자가 코나투스라고 부르는 것은, 따름정리의 표현대로 하자면, 바로 행위역량, 또는 동일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이다

 

정리7의 주석의 저 문장을 잘못 읽게 되면 굉장히 삼천포로 빠지게 된다. 이것을 가령 인간의 정신과 신체와 연결시켜서 생각하면 우리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은 사건과 그 사건에 상응하는 정신 안의 관념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테면 신체라고 하지만 신체의 수준이 다 다른데, 아주 미시적인 수준으로 들어가면 세포가 있겠고, 그렇다면 이 세포가 죽으면 정신 안에 이 세포의 죽음을 인식한다거나 이 세포의 죽음을 애도하는 관념이 있다는 말인가, 라는 의문에 봉착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세포가 죽는지 사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의 저 문장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모든 것에 다 1:1 상응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하나하나가 다 상응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스피노자가 하려는 말은 그것과는 다르다.

 

주석의 두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을 이어서 다시 보면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그리하여 연장의 양태와 이 양태의 관념 또한 하나의 동일한 것이지만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존재하는 모든 양태는 일종의 관념을 다 갖고 있다. 인간이 신체와 더불어 정신을 갖고 있고, 이것이 하나의 동일한 양태를 구성하는 것처럼, 자연 안에 실존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관념들을 다 갖고 있다. 생명체뿐만 아니라 무생명체도. 스피노자가 2부 정리13의 주석에서 다른 개체들-이것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정신화 되어 있다-’라고 말하는데, 그러니까 인간을 제외한 다른 개체들, 무생명체까지도 상이한 정도이기는 하지만 모두 정신화되어있다는 말이다. 무생명체가 과연 어떤 식으로 정신화되어 있는지, 스피노자의 정신화가 뜻하는 바가 뭔지 논쟁이 분분하지만, 2부 정리7에 따르면 저럴 수밖에 없다. 왜냐면 실재가 때로는 연장 속성을 통해 표현되기도 하고 사유속성을 통해 표현되기도 하고 다른 속성들을 통해 표현되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동일한 실체, 또는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이듯이, 자연의 통일성이 그렇듯이, 양태들의 경우에도 하나의 동일한 양태가 때로는 연장속성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유속성으로 표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한 양태도 때로는 정신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신체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하나의 동일한 코나투스, 욕구를 갖고 있듯이 다른 사물들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양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나의 동일한 인과연관을 포함하고 있으니까. 스피노자가 정리6의 따름정리에서 속성으로부터 양태들이 따라 나온 방식은 동일하고 동일한 필연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정리7에서도 하나의 동일한 욕망, 하나의 동일한 질서에 대해 이야기하니까 어떤 면에서는 일양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어떤 히브리인들이 신과 신의 지성 및 신이 인식한 실재들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구름 사이로 보듯이 보았던 게 어떤 히브리인: 그냥 마이모니데스가 그랬다고 말해도 될 텐데ㅋㅋ

 

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causarum connexionem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동일한 실재들이 서로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 : 스피노자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내지 연관을 더 정확히 원인들의 연관이라고 제시한다. 여기에서 스피노자가 염두에 두는 질서와 연관은 원인들의 질서내지 원인들의 연관이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

 

따라서 실재들이 사유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동안에는 우리는 자연 전체의 질서, 또는 원인들과의 연관을 사유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해야 하고, 그것들이 연장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한에서는 자연 전체의 질서는 마찬가지로 연장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되어야 하며, 다른 모든 속성들에 대해서도 나는 이처럼 이해한다. : 이것은 유일한 실체로서의 신이 때로는 연장속성 아래에서 표현되고 때로는 사유속성 아래에서 표현된다고 말할 때 스피노자가 염두에 두는 것은 한편으로 인과 관계는 각각의 속성 내에서 그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 사이에서 전개된다는 점(관념은 관념끼리, 물체는 물체끼리 등).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원인들의 연관은, 신이 동일한 하나의 실체이기 때문에 모두 동일한 연관 내지 질서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결과로 신은 사실 그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한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로의 실재들의 원인이다.

 

스피노자는 2부 정리7에서 1부 정의1의 자기원인 개념을 풀어쓰고 싶었던 것 같다. 1부 정리25의 따름정리 특수한 실재들은 신의 속성의 변용들과 다르지 않다. 곧 신의 속성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되는 양태들과 다르지 않다. 이점에 대한 증명은 정리15 및 정의5로부터 명백하다.” -> 신이 만물을 생산하는 인과작용은 신이 자기원인이라고 규정하는 것과 같은 작용이다. = 신은 만물을 생산할 때 만물을 제약하거나 한정하지 않았다. 만물을 원인으로써 산출한다(만물에게 원인으로서의 역량이 있게 산출한다) 만물이 능동적인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만물에게 능동적인 주체로 행동할 수 있는 달란트를 주었다 정도의 표현이 되겠다.

 

사유속성의 관념a 관념b 관념c .......

연장속성의 물체a 물체b 물체c ..........

A속성의 Aa Bb Cc ...........

B속성의 Ba Bb Bc...........

-> 관념abc의 연쇄, 물체abc의 연쇄, Aabc, Babc의 연쇄, 이 모든 연쇄들은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다. 상이한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의 연쇄이기 이전에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다. 그러니까 원인들의 질서와 연관은 한 속성 안에서가 아니라 모든 속성안에서를 의미한다. 들뢰즈의 3중 평행성의 표현을 빌면 평행론의 근거는 존재의 동일성. 실체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이 존재하기 때문에 속성들 사이에 동등성과 상호성이 성립하고, 속성들 사이에 동등성이 성립하기 때문에 양태들이 관념A-물체A 관념B-물체B가 상응하면서 양태들의 평행성도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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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4에서 신의 관념에 대해 따라 나온다라는 표현을 쓴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애매한 표현이다. 이걸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있냐면, 구약성경에서 누가 누구를 낳고 그 누구가 누구를 낳고 그 누구가 누구를 또 낳고... 이런 식의 기원, 기원을 따지는 단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기원이 없다고 말하는 스피노자의 근본철학과 맞지 않는다. 신의 관념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건 창조론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신의 관념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 나온다는 말을 마치 시간적으로 어떤 큰 강의 원류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스피노자의 의도라고 하기는 조금 어렵다. 그렇다면 따라 나온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을 소쉬르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구조언어학의 창시자인 소쉬르는 뭔가 책을 써서 유명한 게 아니라 강의록 때문에 유명해진 사람인데(그는 박사학위 논문을 제외하면 생전에 한 권의 저서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강의가 끝나면 자신의 강의 노트를 잘게 찢어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습관마저 지니고 있었다고) 그의 사후에 제자들이 스승의 강의노트를 모아서 책으로 냈다. 소쉬르가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부각된 것이 <일반 언어학 강의>인데 소쉬르가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하려고 했던 작업을 두고 보통 사람들이 처음으로 구조 언어학을 만들려고 했다라고 말한다. 이 구조언어학을 다른 말로 하면 자율적인 학문으로서의 언어학/기호학이다. 그러니까 소쉬르는 언어학/기호학을 자율적인 학문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자율적인 학문으로서의 언어학.

 

<일반언어학 강의>를 보면 소쉬르가 언어학/기호학을 자율적인 학문으로 만드는 데 가장 장해가 되는 것으로 꼽았던 것이 언어의 목록주의적 관점이다. 언어를 마치 목록처럼 사고하는 것. 그 목록이라는 것은 사물들에 대한 명칭의 목록. 언어를 마치 사물들을 지칭하는 목록들의 집합처럼 생각하는 것이 바로 목록주의다. 왜 목록주의가 근본적인 장해물일까.

 

언어가 목록의 집합이라고 했을 때 거기 깔려있는 생각은 언어는 사물들을 지칭하는 기호, 명칭이라는 것이다. 언어를 이렇게 기호나 명칭으로 본다는 것에는 또 무슨 생각이 깔려있냐면 언어보다 사물이 앞선다’, ‘언어 이전에 사물이 미리 있다라는 것.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원래 있는 거 맞지 않나? 원래 미리 있잖아? 대상의 질서가 인식 주관의 질서에 따른다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떠올리게 하는 전환인데, 예전에 칸트에 대한 학위논문 심사를 할 때 교수들이 실제로 그런 질문을 던졌었다. 아니 근데 밖에 이미 진짜 있잖아? 주관 이전에 실제 세계에 있는데 무슨 소리야. 근데 맞다. 실제로 있다ㅋㅋㅋ 언어 이전에 사물이 있다.

 

소쉬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언어 이전에 사물이 먼저 있고, 언어라는 것을 이미 존재하는 사물을 지시하는, 인간이 서로간의 약속에 의해서 이것은 산이라고 부르자, 이것은 달이라고 부르자 라고, 사물의 질서를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는 목록주의적 관점으로 보면, 언어는 학문이 될 수 없다. 언어는 필요에 따라 만든 도구, 기술일 뿐인데, 그런 도구에 학문이라는 게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소쉬르가 자율적 학문으로 언어학을 구성하려고 할 때 이 목록주의가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소쉬르의 주장은- 언어 이전에는 질서가 없었다. 카오스였다. 언어 이전에는 산, 바다, 달로 구별해서 지각할 수 없었다. 우리가 언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물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언어가 사물의 질서를 만든다. 이런 관점에서야 언어학이 비로소 학문이 된다. 왜냐면 이것을 통해 세계의 질서, 사물의 질서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소쉬르는 언어 기호는 하나의 이름에 하나의 대상을 연결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과 하나의 기호를 결합하는 것으로 보고 이것을 시니피앙과 시그니피에로 구별했다. 매우 간단한 구별 같지만 굉장히 대단한, 언어에 대한 새로운 정리다. 시그니피앙은 청각이미지, 시그니피에는 관념. 내가 나무(시니피앙)“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관념(시니피에). 정리18의 주석에 가면 소쉬르랑 아주 비슷한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기호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사물 같은 것은 없다. 소리와 소리를 들으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관념이 결합하는.

 

더 나아가 소쉬르는 기호라는 것은 하나하나가 따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쉬르의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 체계라는 개념인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호라는 것은 체계다. 우리가 목록주의적인 관념을 벗어나면 당연히 기호나 언어는 하나하나 성립하는 게 아니다. 다른 것과의 차이를 통해서 구성되는, 변별적 차이가 낳는 것이 언어랑 기호다. 우리가 나무라고 할 수 있으려면 일반 개념으로서의 나무(참나무도 있고 너도밤나무도 있고), 풀하고 구별되는 개념어로서의 나무, 또 동물과 구별되는 나무가 있는 것처럼.

 

그 결과 구조언어학에서는 당연히 통시성이 아니라 공시성의 측면으로 언어를 보게 된다. 공시성synchrony은 같은 시간, 일정 시점에 존재하는 언어의 상태와 구조, 통시성diachrony은 시간에 따른 언어의 흐름. 그러니까 구조언어학에서는 언어의 기원을 이야기할 수 없다. 언어가 대체 어떻게 생겨나는지 같은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 아동심리학자가 아니라서 정확히는 말 못하겠지만, 그래서 적절한 예일지 모르겠지만, 아이가 말을 배울 때 단어를 하나, 두 개, 세 개 이렇게 순차적으로 배울지, 언어를 형성하는 어떤 규칙이나 체계를 동시에 배울지, 그런 것도 생각해볼만한 것 같다. 어쨌든 구조언어학에 의하면 언어의 기원 같은 것은 있을 수 없고 언어는 동시에 생겨날 수밖에 없다. 소쉬르는 이런 공시적인 언어의 집합을 랑그langue’라고 불렀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공시적인 집합.

 

구조언어학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 이유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의 관념이 말하자면 랑그와 비슷해서다. 스피노자의 따라 나온다는 말은 신의 관념이 기원이라든가 최초의 원인이라든가 시원이라는 게 아니라 모든 개별적인 관념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런 틀이라는 이야기다. 신의 관념으로 인해 모든 관념이 가능하다. 신의 관념을 통해 모든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신의 관념 없이는 우리가 어떤 관념을 가지고 인식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연장의 경우에는 운동과 정지의 법칙이 이렇다. 운동과 정지의 법칙 없이는 신체나 물체의 작용이 가능하지 않다. 운동과 정치의 법칙에 의해서 물체가 행위를 하고 서로 작용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관념들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신의 관념이라는 사고의 틀, 인식의 틀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의 관념이다. 그러니까 따라 나온다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최초의 원인에서 무언가 흘러나온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이것으로 인해서 모든 관념들이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게 스피노자 철학의 성격에 잘 맞는다.

 

그럼 스피노자는 17세기의 구조주의인가ㅋㅋㅋ 스피노자는 구조주의보다 훨씬 역동적인 철학자다. 스피노자는 신의 관념만 이야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원인, 사유의 역량 등의 이야기를 하니까. 이 이야기가 바로 정리5와 정리7이다. 스피노자는 신의 관념이라는 관념이 성립할 수 있는 틀, 그 틀에서 이루어지는 인과작용, 아주 역동적인 인과작용이 존재한다고 봤다. 아무튼 신의 관념이라는 게 17세기 철학의 문법에서는 굉장히 생소해보일 수 있지만 따져보면 굉장히 현대적인 아이디어와 통하는 바가 있다.

정리5 ”관념들의 형상적 존재는, [사유 이외의] 다른 속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단지 사유하는 실재로 고려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인정한다. 곧 신의 속성들 및 독특한 실재들에 대한 관념은, 관념의 대상들 자체, 다시 말해 지각된 실재들을 원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는 실재로서의 신 자신을 원인으로 인정한다.“

 

- 관념들의 형상적 존재: 관념들이 표상하는 대상으로서 보는 게 아니라,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들로서의 관념.

- 사유속성. 신이 원인이지 대상은 원인이 아니다. 사유속성을 통해 나타나는 신이 바로 관념들의 원인이다.

 

증명 이는 2부 정리3으로부터 명백하다. 우리는 정리3에서 신은 그가 자신의 관념의 대상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단지 사유하는 실재라는 사실로 인해, 그의 본질 및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에 대하여 관념을 내릴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념들의 형상적 존재는, [사유 이외의] 다른 속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의 신이 이나라 단지 사유하는 실재로 고려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인정한다. 이는 다른 식으로도 증명된다. 관념들의 형상적 존재는 사유의 양태다(자명한 것처럼). (1부 정리25의 따름정리에 의해)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의 신의 본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며, 따라서 (1부 정리10 ”하나의 실체의 각 속성은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에 의해) 다른 어떤 신의 속성의 개념도 함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1부 공리4에 의해) 그것은 다른 어떤 속성도 아닌 오직 사유 속성의 결과일 뿐이다(관념들끼리의 인과관계는 사유 속성 안에서). 따라서 관념들의 형상적 존재는 [사유 이외의] 다른 속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단지 사유하는 실재로 고려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인정한다.

 

- 신이 원인이지 대상은 원인이 아니다.“ : 대상이 우리를 자극해서 관념이 생겼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내가 눈앞의 컵을 인식한다. 컵이라는 물체/대상에 대한 관념을 형성한다. 컵이라는 대상이 여기 있으니까. 컵이라는 대상이 촉발돼서 내가 이것을 지각한 것. 그렇다면 컵이라는 대상이 원인이 될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게 되는 원인은 컵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신이라는 것.

 

- ”[사유 이외의] 다른 속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단지 사유하는 실재로 고려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인정한다.“/ 사유속성의 실재로 고려되는 한에서의 신.“ : 1부에서 봤듯이, 스피노자에게 있어 인과관계라는 것은 같은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끼리만 가능하다. ,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은 관념끼리, a속성은 a속성끼리 인과관계가 있다. 속성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없다. 즉 신체는 정신의 원인이 될 수 없고, 정신은 신체의 원인이 될 수 없다.

형상적 존재로 고려된 관념들을 생산해내는 것은 신

다른 관념들을 생산해내는 관념들 (= 신의 속성 안의 관념들)

 

* 스피노자는 왜 자연법칙이라고 쓰지 않고 이라고 썼을까.

 

스피노자가 기독교신학적인 용어법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을 두고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철학적인 게릴라 전술이다라고 말했다ㅋㅋㅋ 적진에 들어가서 적으로 단장하고 적의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운다. 만약 스피노자가 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자연법칙’ ‘자연적인 사물이라는 어휘를 갖고 이야기했으면, 스피노자 적수들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쟤하고 나는 어차피 노선이 다르니까, 쟤는 아예 신을 무시하는 사람이니까 각자 갈길 가자. 그런데 스피노자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신이 무한하시고, 신이 전능하시고, 모든 것이 신에 의지하고, 마치 교조적인 독실한 신자인 것처럼, 아주 철저한 신학적인 어휘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신학하고는 매우 다르다. 그래서 알튀세르가 스피노자가 게릴라 전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적의 진지 속에 들어가서 파괴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가 신학의 어휘를 쓰지 않았다면 스피노자의 철학을 이해하기 훨씬 쉬웠을 텐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기 논쟁의 맥락에서 보면 스피노자가 신학적인 어휘를 쓰지 않기가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다. 논쟁의 목적, 논쟁의 효력을 생각해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이 쓰는 어휘를 같이 써야 논쟁이 될 테니까. 스피노자는 신조어를 거의 만들지 않은 사람이다. 물론 무한양태, 직접적 무한양태, 우주 전체의 모습, 이런 말들은 다른 철학자들은 쓰지 않았던 어휘니까 하나도 안 썼다고 할 수는 없지만, 스피노자가 쓰는 대부분의 개념들은 다 다른 철학자들이 썼던 것들이다. 데카르트라든가 홉스라든가 스콜라 철학이라든가. 그들의 언어들을 가져다 쓰면서 그 의미를 뒤집어 버리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가 대체 신을 찬양하기 위해 쓴 건지 헷갈리게 썼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스피노자는 아주 효과적으로, 적수들의 언어로 적수들의 철학적 틀을 흔들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의 구조주의 철학자들 가운데 스피노자에 주목한 사람들이 꽤 있다. 대표적으로 들뢰즈. 들뢰즈는 구조주의를 한편으로는 높이 평가하지만 그 구조주의를 좀 더 다이나믹하게 변형시키고 싶어 했었다. 알튀세르. 그 역시 구조주의의 중요한 문제의식에 동의는 했지만, 구조주의가 너무 형식주의적이고 정태적이니까 만족하지 못했다. 그걸 가지고 역사를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을 가져온다.

 

알튀세르의 제자 중에 나중에 라깡의 사위가 되는 자크-알랭 밀레도 그렇다. 자크-알랭 밀레는 라깡의 <세미나>를 비롯한 라깡의 모든 지적 성과를 관리하는 책임자이기도 해서 다른 나라에서 라깡의 책을 번역하는 것을 허락할지 말지도 관리하고, 한국어판 책을 낼 때도 다 직접 감수하고 있다. 그 말은 자신의 제자 아니면 번역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자크알랭 밀레는 알튀세르의 제자였는데 라깡이 프랑스 정신분석학계에서 쫓겨나 오도갈 데 없는 시절에 알튀세르가 라깡을 초빙해서 강의를 하도록 해준다. 이때 라깡이 했던 첫 번째 강의가 그 유명한 세미나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기본개념에 대한. 이 세미나 강의를 할 때 자크알랭 밀레가 단연 눈에 띄었다. 라깡이 다른 데서 강의할 때는 들어보지 못한 질문을 하는 걸 보고 강의를 마친 라깡이 알튀세르에게 편지를 쓴다. , 네 제자 되게 똑똑하다ㅋㅋㅋ 그래서 알튀세르가 라깡에게 자기 제자 몇 명을 붙여주는데 그 중 하나가 자크알랭 밀레였다. 자크알랭 밀레는 60년대에 이런 개념을 쓴다.

 

구조의 작용/ 구조의 행위

구조화하는 작용/ 구조화되는 작용

 

스피노자의 철학의 용어법, 산출하는 자연-산출되는 자연을 가지고 와서 구조주의의 핵심개념인 구조 개념에 적용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원인과 결과가 들어가면서 가령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의 구조 개념이라든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구조 개념이 굉장히 다이나믹해진다. 60년대에 이런 시도들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전에는 그리 주목 받지 못했지만 1960년대-70년대 프랑스 철학에 굉장히 중요한 사상적인 원천을 준 것이 스피노자 철학이다.

 

정리6 ”각 속성의 양태들은, 신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고려되는 한에서가 아니라, 이 양태들이 그것의 양태를 이루는 바로 그 속성 아래에서 고려되는 한에서만 신을 원인으로 갖는다

 

- 각 속성의 양태들: 가령 사유 속성의 양태들로서의 관념

- 다른 어떤 속성: 가령 연장 속성

- 이 양태들이 그것의 양태를 이루는 바로 그 속성: 가령 관념은 사유속성의 양태를 이루므로, 관념들은 사유 속성 아래에서 고려되는 한에서만 신의 원인을 갖는다.

 

증명 왜냐하면 각각의 속성은 다른 것들 없이 자기 자신에 의해 인식되기 때문이다(1부 정리10에 의해). 따라서 각 속성의 양태들은 다른 속성이 아니라 자신의 속성의 개념을 함축한다. 따라서 (1부 공리4에 의해) 이 양태들은, 신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고려되는 한에서가 아니라, 이 양태들이 그것의 양태를 이루는 바로 그 속성 아래에서 고려되는 한에서만 신을 원인으로 갖는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곧 사유의 양태들이 아닌 실재들의 형상적 존재가 신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면, 이는 신이 실재들을 미리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보여준 바, 관념들이 사유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과 동일한 방식, 동일한 필연성에 따라 이 실재들이 그것들 자신의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오고 도출되기 때문이다.

 

사유의 양태들이 아닌 실재들의 형상적 존재: 가령 연장속성에 속하는 물체들

 

* ”신이 실재들을 미리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

- 신의 지성은 창조적 지성이 아니라 무한 양태라는 것, 곧 사유속성의 결과라는 것(1부 정리17의 주석 만약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

- 1부 후반부에서 비판 했던 창조적 지성을 다시 한 번 비판하는 것이다. 제빵사가 미리 이걸 만들어야겠다고 구상-> 창조, 이런 식으로 미리 한 구상에 따라 물질들을 구성하는 것이 창조적 지성이다. 이것은 따라 나온다를 기원의 의미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 스피노자는 이게 아니라고 다시 한 번 비판하는 것이다.

- 동일한 방식, 동일한 필연성에 따라: 가령 사유 속성 안에서 관념들이 생산되는 방식은 연장 속성 안에서 물체들이 생산되는 방식과 동일한 필연성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뜻

 

- 따름정리는 매우 중요하다. 사유속성에서 양태가 따라 나오는 것처럼 동일한 필연성과 동일한 방식으로 다른 속성에서 다른 양태가 따라 나온다는 이야기다. ”따라 나온다는 말이 앞에서처럼 기원에서 따라 나온다는 말이 아니다. 관념들의 인과관계를 규정하는 법칙, 물질들의 인과관계를 규정하는 법칙, 속성a에 속하는 a들의 인과관계를 규정하는 법칙, 이 모든 게 동일하다. 동일한 인과관계, 동일한 산출의 방식.

- 그러니까 신이라는 것은 동일한 인과 법칙에 따라서 무한하게 많은 것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산출한다는 것이다.

- 정리5가 사유속성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정리6은 이것을 모든 것으로 확장했다

 

- 1부 정리17의 주석 중 만약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 신의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서의 지성은,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지성, 곧 만물을 창조하는 것으로서의 지성, 창조적 지성이라는 뜻. 이러한 창조적 지성의 관념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중세철학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전해 내려오는 생각이며, 근대철학에서는 니콜라 말브랑슈에 의해 계승되는 생각이다.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오직 신만이 존재했으며, 신은 인식 및 관념들 없이 창조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신이 갖고 있던 관념들은 신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다 <진리 탐구>

 

- 정리31에서 주목할 만한 두 번째 지점: ”지성이라는 게 산출된 자연이다라는 것. 스피노자는 이미 정리17의 주석에서 지성도 의지도 신의 속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못 박듯이) 이야기 했다. 신의 지성과 의지를 신의 본질과 동일시하지 말라고, 상당히 긴 주석에서 이른바 창조적 지성 창조적 의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아우구스티누스에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 니콜라 말브랑슈까지해서,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이런 관점에 반대하는 것. 그리고 정리31에서 그는 유한한 지성만이 아니라 무한한 지성까지도 신의 절대적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산출된 자연에 속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 정리17의 주석 강의 노트 일부분:

 

2) 신의 지성과 의지는 신의 본질이 아님

- 스피노자가 논박하고 싶어하는 적수들의 주장: 인간이 가진 것 중 가장 완벽한 것이 의지와 지성이다 > 그러니 신의 그것은 그보다도 더욱 무한할 것이다 > 그러니 신의 무한한 의지와 무한한 지성이야말로 신의 본질이다!

- 신의 지성과 의지, 곧 무한지성과 무한의지는 신의 본질이 아니라, 그 본질에서 따라 나오는 특성이라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나중에 가면 나오지만 스피노자에게 지성과 의지는 무한양태이다)

 

2-1) 신의 지고한 의지야말로 신의 전능함의 표현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

 

- 지금은 아무것도 수행하지 않지만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자체는 가진 사람: 잠재적 인식자

지금 인식하는 것을 수행중인 사람: 현행적 인식자

- 신을 옹호하는 스피노자 적수들의 주장: 신은 (무한지성을 통해) 무한하게 많은 것을 현행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무한의지를 통해) 그걸 하나하나 다 창조해서 실존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게 신의 전능함을 인식할 수 있는 증거이다. ? 신이 인식하는 대로 모든 것을 계속 창조해야한다면, 당연히 지성보다 우위에 있어야할 신의 자유의지가 제한을 받는다는 말이다. ”인식하는 대로 다 창조해야한다는 당위에 제한을 받는 자유의지는, 이미 자유의지가 아닌 게 되어버리니까. 그래서 그들은 신은 무한하게 많은 것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걸 다 창조해서 실존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 게다가 그들의 관점에서 신이 인식하는 대로 계속 창조를 한다면, 남아있는 비장의 뭔가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건 신의 전능함에 위배되는 것이고, 신의 전능함을 폄하하는 것 아닌가. 신은 인식하는 대로 다 하는 게 아니라 창조해야 되겠다고 의지하는 것만 창조하신다(결국 의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의지가 없을 때는 필연적 법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무관심함도 전능함에 들어가고, ”의지로서 필연적 법칙을 위배하고 거스르는 것도 전능함에 들어가니, 의지의 힘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지하는 것만 창조한다고 주장)

 

-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신의 전능함은 여분을 남겨두고 부분만 수행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현행적으로 발휘되는 능력이다. 신이 무한하게 많은 것을 인식해놓고 나서는 무언가는 창조하고 무언가는 창조하지 않고 남겨두면 그거야말로 신의 전능함을 깎아먹는 것 아닌가. 신의 잠재적 역량, 현행적 역량을 나누는 것을 스피노자는 견디지 못한 것이다. 아니, 그게 무슨 전능함인가. 발휘되지 않는 능력이 있고, 발휘되는 능력이 있는 게 무슨 전능함이야.

- 스피노자에게 전능함이라는 것은 막 흘러넘치는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넘쳐서) 본성적으로 필연적으로 산출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것이야말로 진짜 풍부함이고 전능함이지 뭐가 부족해서 아껴뒀다가 나중에 꺼내 쓰고ㅋㅋㅋㅋ 이런 게 무슨 전능함이냐는 이야기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롤로그에서 짜라투스트라가 10년 입산수도를 하고 어느 날 해 뜨는 아침에 나와 해를 보면서 , 풍요로운 태양아, 너 어떻게 그렇게 나랑 비슷하냐ㅋㅋ 너 넘치도록 풍요로운 태양아 세상만물을 다 너의 열기로 빛으로 넘치도록 가득한 빛으로 비추는 태양아, 나의 지혜가 바로 그렇다. 내 지혜가 너무 넘쳐서 주체할 수 없으니 사람들에게 이제 나눠주러 가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전능함은 이렇게 넘치도록 주체할 수 없이 매순간 발휘되는 것이다. 넘치도록 만들어내는 게 전능한 거지, 아껴놓다가 나중에 풀어주고 그런 게 무슨 전능한 것인가. 그러니 그렇게 말하는 너희들이야말로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전능함은 영원히 현행적이었으며, 영원히 같은 현행성 속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해서,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신의 전능함에 대해 훨씬 더 완전한 관념이 확립되게 된다. 더욱이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이들은 바로 반대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이 무한하게 많은 창조 가능한 것들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을 창조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곧 만약 그가 자신이 인식하는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그들에 따를 경우, 신은 자신의 전능함을 모두 소진시키고 자신을 불완전하게 만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이것은 신의 전능함에 대한 너무 소심한 생각이다. 다 써버리고 고갈된다는. 상당히 생태주의적인 생각. 신의 전능함이라는 건 너무 넘쳐서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매순간 만들어내는 것인데 너희들은 그게 고갈될 까봐 두려워하다니 신의 전능함에 대해 못 믿는 건 혹은 반대하는 건 너희들 아니냐) 따라서 신이 완전하다는 점을 확립하기 위해서 그들은 동시에 신은 자신의 역량이 미치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없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나는 사람들이 이보다 더 부조리한 것 도는 신의 전능함과 더 양립불가능한 것을 꾸며낼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2-2) 신의 지성과 의지는 인간의 지성과 의지와 다르다

 

왜냐하면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지성과 의지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야 하며, 이 후자의 것들과는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늘에 있는 개의 별자리와 짖는 동물인 개 사이에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 이름만 같을 뿐, 우리가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지성과 의지라고 지칭하는 것과 신의 지성과 의지를 지성과 의지라고 지칭하는 것은 다르다.

상당히 재미있는 주장이다

- 스피노자가 초기에 썼던 <정신교정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이것도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다. 원은 둥글지만, 원에 대한 인식인 원의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말이다. 이 말은 (2부에 가서 보게 되겠지만) 스피노자가 신체와 정신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과, 앞서 봤던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의 맥락이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과 연장속성에 속하는 신체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 , 원이라는 연장에 속하는 도형은 둥근 모양을 갖지만 관념은 둥글다 네모나다는 모양을 갖지 않듯이, 관념과 관념의 대상이 되는 무언가는 전혀 다르다.

- 여기서도 그렇다. 신이 갖고 있는 지성과 의지와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비교하고 있다. 양자가 천양지차로 다르다는 것.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 적수들이 하는 주장)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 ”신의 지성은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아까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 이야기를 하면서 창조는 신이 의지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중세철학 근대철학의 또 다른 신학자들은 신의 지성이라는 것 자체가 창조적인 지성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의미냐면-

- 그러니까 인간이 인식한다= 인간이 관념을 갖는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지성/정신 바깥에 있는 어떤 현실적인 사물을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이야기다. 그게 우리 인간들의 인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인식한다= 인간이 관념을 갖는다에는 항상 사물/대상이 전제되어 있다. 사물/대상이 먼저 존재하고, 이 사물이나 대상을 인간이 나중에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논리적 시간적 선후관계로 보면 인간의 인식은 항상 지성보다 먼저 있는 사물을 전제한다.

- 이것을 현대적 용어로 하면 representation. 인식이라는 것은 representation의 성격을 갖고 있다. 다시 프리젠테이션한다, 무엇을? 여기 present에 있는 presence, 현존하고 있는 사물이다. 대상을 우리의 지성 안에서 다시 representation 재현하는, 다시 현존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인식이다. 인간의 인식의 성격.

 

- 그렇다면 신의 지성은 어떨까.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이 만약 인간의 그것과 같다면, 신이 인식하기 전에 인식할 사물이 있어야한다. 그러면 그 사물은 누가 갖다놓은 것인가, 신 이전에의 문제에 부딪힌다. 이건 말이 안 되니까, 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이 없는 인식이다. 그러니까 원형으로서의 관념이다. 원형으로서의 관념에 입각해서 신의 의지가 창조를 하는 것이다. 신학자들마다 차이는 좀 있지만 원형으로서의 관념은 일종의 모델이다. 우리가 건물을 짓거나 어떤 것을 만들 때 모형을 만들 듯이,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 신이 관념을 갖는다는 것은 이 세계의 모형, 이 시계의 원형으로서의 관념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신의 의지. 그러니까 신의 관념= 신의 인식이라는 것은 미리 전제하는 대상이 없는 인식.

-스피노자가 여기서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실재라는 게 먼저 있고-> 실재 다음에 지성이 인식하고-> 그래서 실재는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사물이 먼저 있고 지성의 인식이 있다)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뭔가를 새롭게 처음으로 구상하고 처음으로 원형을 만드는 것이 신의 지성이니까 신의 지성자체가 창조적이다)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

 

-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라는 테크니컬한 텀이 쓰였는데

- ”형상적 본질이라는 것은 인식과 지성과 독립해서 미리 존재하고 있는 사물의 본질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 인간이 인식한다 = 인간이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인식한다는 것. 즉 리프리젠테이션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데카르트나 스피노자는 표상적으로 인식한다“ ”표상적 본질을 갖는다라고 표현한다. 이때 표상적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오브젝티바. 뜻은 by representation. ”리프리젠테이션을 통해서 이것의 본질을 지성 안에 담는다라는 맥락에서. 영어로는 objective지만 흔히 쓰는 객관적인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 , 오브젝티바=표상적: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다는 뜻.

- 이게 바로 objective essence라는 말의 스콜라철학적 용어법. <에티카> 영역본에 objective essence라고 나오지만 이것은 객관적 본질이 아니라 표상적 본질이다.

 

- 인간의 인식의 경우 이런 순서: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사물이 갖고 있는 형상적 본질이 먼저 있고) -> 그 다음에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 <- 이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objective essence라고 부른다. objective essence = 머릿속에서 재현된 사물의 본질.

-그러니까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 관념을 통해 재현되는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나중에 있는.

 

- 그런데 신의 경우에는 관념이 먼저 있다. 원형으로서의 관념이 있고 그 관념으로부터 신이 사물들을 창조하는 거니까.

-, 신의 경우: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먼저 있고-> 그것에 입각해서 신이 자신의 의지를 통해 그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에 합치하는 사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나중에 온다는 것.

-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는 이런 이야기다. 신의 지성 안에서 신의 관념으로서(원형의 관념으로서= 표상으로서) 미리 존재했기 때문에 그걸 모델 삼아서 사물이 형상적 본질을 가지게 될 것이다.

 

*** 요약

왜냐하면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지성과 의지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야 하며, 이 후자의 것들과는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늘에 있는 개의 별자리와 짖는 동물인 개 사이에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점을 나는 다음과 같이 증명해보겠다.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 적수들이 하는 주장)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

=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질에 속한다면, 그 지성은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지성과 이름만 같지, 본질은 전혀 다르다. ? 우리 인간의 지성은 사물이 먼저 있고 나중에 그 사물의 표상이 있으니까. 사물의 재현을 통해서 사물에 대한 표상적 본질을 갖는 것이 인간의 인식이니까. 하지만 신의 경우, 원형으로서의 관념이 먼저 있고 여기에 입각해서 사물들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관념이 먼저 있고 거기서 formal essence를 가진 사물들이 창조된다, 이 이야기다.

따라서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인식되는 한에서의 신의 지성은 사실은 실재들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다.“ <- ? 이때 신의 지성은 사물들을 창조하는 지성이니까.

 

- 이러한 창조적 지성의 관념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중세철학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전해 내려오는 생각이며, 근대철학에서는 말브랑슈 Nicholas Malbranche에 의해 계승되는 생각이다.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오직 신만이 존재했으며, 신은 인식 및 관념들 없이 창조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신이 갖고 있던 이 관념들은 신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다.“ <진리탐구>

 

- 이어지는 스피노자의 논점. 신의 지성이 실재들의 본질과 실존의 원인이기 때문에 신은 본질과 실존에서 필연적으로 실재들과 달라야한다. 왜냐하면 원인지어진 것(결과)은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것이 원인으로부터 얻는 것으로 인해 원인과 다르기 때문이다 , 원인이 되는 것과 그 원인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전혀 달라야 한다는 말.

- 이것은 정리29의 주석과도 연결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은 다르다. 소산적 자연은 항상 능산적 자연의 결과지 원인이 될 수 없다. 능산적 자연은 항상 원인일 수밖에 없다. 원인-결과의 측면에서 보면 두 자연은 전혀 다르다.

- 그러니까 정리17의 주석에서 만물이라는 것이 산출된 자연을 가리킨다면 신은 산출하는 자연인 것이고, 이 경우 만물과 신의 관계는 매우 비대칭적인 것이다.

- , 신의 지성은 우리 지성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며, 따라서 신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서의 신의 지성은 이름 말고는 우리의 지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는 의지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논점이다, 땅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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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스피노자 철학에 관심이 많아지다 보니 사회과학에서 이 포텐시아를 가져다가 역능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그냥 능력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말인데, affection정동이라고 한다든지 하는 것처럼 한국의 사화과학자들은 신조어 만드는 걸 너무 좋아하는데.... 새로운 개념이나 용어가 수입될 때 흔히 그렇듯이 포텐샤라는 스피노자 철학 개념의 번역어도 아직 확립되지 않은 가운데 이 두 가지 번역어가 서로 경쟁하듯 사용되고 있다. ”역능“”이라는 단어는 우리말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라는 점에서 일차로 포텐샤의 번역어로 부적합하다. 그렇다고 해도 이 단어가 특별히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의 의미와 용법을 잘 표현해준다면 사용을 고려해볼 수 있겠지만, 이 단어는 내용상으로도(이 점에 대해 곧 살펴볼 것이다)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을 제대로 표현해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번역어를 굳이 사용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이렇게 신조어로서의 역능을 남용할 경우의 문제는, ‘말의 계보의 측면에서의 혼돈이다. 스피노자만 포텐시아를 쓴 게 아니라 다른 철학자들도 이 단어를 다 썼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랬고, 니체의 Wille zur Macht를 불어로 쓰면 volonté de puissance, 여기서 ”puissance“가 바로 불어로 포텐시아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의 포텐시아에서 가져간 개념이다.

 

*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번역 문제에 부딪혔을 영어권의 예를 보자. potentia는 불어로 puissance 이탈리아어로 potentia, potestas는 불어로 pouvoir 이탈리아어로 potere, 이렇게 유럽어들은 라틴어의 개념을 살릴 수 있는 언어지만, 영어 같은 언어들은 그렇지 않다. power라는 단어 한가지 밖에 없다.

 

Edwin Curley<The collective words of Spinoza>(1985) 1권에는 <에티카>,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편지들이 실려 있다. 작년에 2권이 나왔다. 1권과 2권 사이에 30년이 걸린 것인데... 2권에는 <신학정치론>, <정치론>, 편지들, 스피노자가 쓰는 히브리어 문법 등이 들어있다. 아마 이 두 권을 다 번역하는 데에는 50년 가까이 걸리지 않을까... 그런데 컬리는 1권에서 포텐시아와 포테스타스를 일괄적으로 ”power“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이 번역에 대해 유럽철학자들은 포텐시아와 포테스타스를 구별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다, power면 충분하다.’라고 뒤에 덧붙였다. 그런데 <신학정치론><정치론>이 없었던 1권과 달리, 2권에서 이것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학술대회에서 [troublesome term]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언급했다.

 

Antonio Negri <The Savage Anomaly>. 한국에는 <야만적 별종>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제목부터 이미 잘못 번역했다. 이 책은 네그리가 당시 스피노자의 철학은 서양 근대 철학계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별종 같은 철학이다, 정해진 틀로 설명이 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느낌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savage라는 말을 붙인, 그러니까 한국말로 번역한다면 야생의가 훨씬 적합한 번역인데 이걸 야만적이라고 번역해버렸다. 네그리의 철학에서 포테스타스와 포텐시아의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네그리는 <포테스타스: 지배권력, 맑스 입장에서 보면 부르주아 권력 / 포텐시아: 다중, 민중, 민중의 해방된 힘>으로 해석한다.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가서 서양철학 전체가

 

*** 포테스타스 노선: 부르주아 자본가의 질서를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철학

-> “제국을 정당화하는 사상이 되는.

대표적인 사람들: 홉스, 루소, 헤겔

*** 포텐시아 노선: 자본주의 질서를 전복하고 변혁하려는 철학 > 다중 노선

대표적인 사람들: 마키아벨리, 스피노자, 맑스

 

이렇게 두 개로 분리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네그리 사상 전체를 뒷받침하는 핵심개념이 포테스타스, 포텐시아이기 때문에 그에게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할 수밖에 없었는데, 네그리의 이 책을 영어로 번역한 Michael Heart도 아마 이 단어를 어떻게 구분해야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아마 한국의 학자들이였다면 신조어를 막 만들어냈을 텐데, 유럽이나 미국 학자들은 그렇지 않다. 그렇게 함부로 하지 못한다. 하트는 고민 끝에 포텐시아와 포테스타스를 어떻게 구분하냐면 포텐시아의 power를 대문자 Power로 쓰는 방법을 택했다.

 

그럼 컬리는 어떤 해법을 제시했을까? 컬리는 apostrophe 아포스트로피를 붙인다. 포테스타스에 아포스트로피를 붙여 power’라고 표현.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이 저것들을 보면 얼마나 답답할까. 말 하나 그냥 만들어내면 되지, 신조어 하나 만들어서 영어를 풍부하게 만들면 되지, 이렇게 생각할 듯...ㅋㅋ 

 

아무튼 포텐시아라는 말에는 네그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해서 굉장히 긴 역사가 있는데 저걸 이상한 신조어로 다 번역해버리면 같은 포텐시아가 다른 말의 갈래로 나뉘면서 말의 계보파악하기 어려워진다. 이게 오래된 용어라는 것도 모르고 스피노자만 쓰는 단어라고 착각하기도 쉬워진다. “말의 계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인데 말이다.

 

스피노자는 신조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데카르트 철학이나 스콜라 철학에서 쓰던 용어를 그대로 가져와서 새로운 의미의 말로 바꾸어낸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역량 potentia과 권능/권한/권력 potestas>

 

존재론-신학적 의미

 

존재론-신학의 영역에서 두 개념은 대립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곧 포텐샤는 합리적으로 인식된 신의 본성을 나타내며, 포테스타스는 신의 본성에 대한 상상적이고 미신적인 견해를 타나낸다.

 

* 포텐샤

 

1) 첫 번째 규정은 포텐샤를 잠재력, 실행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여 항상 현행적인 힘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 신이 역량을 갖고 있는데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다면 기존의 역량을 되풀이 한다는 의미 아닌가. 그럼 신이 퇴보하거나 적어도 정체되어 있다는 말 아닌가. 신에게는 잠재태가 없으니까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 정확히 말하면 신에게는 새로운 것이라는 게 없다. 1부 정리16에서 봤듯이 신의 본성으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는데, 그 무한하게 따라 나오는 것들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파악할 수가 없다. 신에게서 새로운 것이 나온다면 그것이야말로 잠재태가 있었다는 말인데 VS 신에게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미 다 했으니까 잠재태가 없다는 것인데,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스피노자가 보는 신의 능력이다.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나온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세계 모든 우주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 우리가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이미 신에게서 나왔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니까, 인간은 시공간의 한계가 있는 곳에서 사니까 시공간을 따지는데 신은 그런 걸 따질 수 없다. 스피노자가 상정하는 신의 차원에서는 논리적 가능성과 시공간의 한계 사이에 아무런 괴리도 생겨나지 않는다.

 

2) 두 번째 규정은 신과 피조물 또는 자연 실재들 사이에 초월적인 거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모든 실재들의 실존 및 행위의 내재적 원인이라는 점을 주장

 

만물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 따라서 신은 항상 능동적일 뿐 수동적일 수 없기 때문에 신에 의해 실존하고 행위할 수 있 역량을 부여받은 모든 자연 실재는 항상 최소한의 포텐샤, 곧 원인으로서의 능동성을 지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윤리학 1부학 1부가 본성으로부터 아무런 결과도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정리로 끝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 따라서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표준화된 현실태-가능태의 구분법을 해체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 포테스타스

 

- 초월자(이는 초월적 인격신을 의미하지만 바로크 시대의 절대군주를 함축하기도)의 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거나 할 수 있는 능력. 포텐샤 개념의 경우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인과관계에 그 작용을 가리키는 데 반해, 포테스타스는 이러한 인과적 필연성을 초월하는 어떤 목적을 전제하거나 (초월적) 의지의 무한성에 의존한다는 점.

- 스피노자는 이를 매우 신랄하게 비판한다 모든 것을 신의 어떤 무관심한 의지에 종속시키고 모든 것을 신의 기분에 의존하게 만드는 이런 의견이 신은 모든 것을 선을 고려하여 실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진리에서 덜 멀어진 것 같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1부 정리33 주석2

- 신의 포텐시아를 자유의지로 이해하는 것은 신의 임포텐시아를 인정하는 것이다.

 

2. 인간학적-윤리학적 의미

 

- 인간학-윤리학의 영역에서 두 개념의 용법이나 관계는 존재론-신학의 경우와 좀 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인간학의 영역에서는 유한한 자연 실재로서 인간이 문제이므로(존재론-신학의 영역에서는 주인공이 신이었다면), 포텐샤 개념이 항상 능동적이고 현행적인 의미를 갖기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포텐샤는 코나투스로 표현되며, 이러한 코나투스는 모든 자연 실재의 현행적 본질로 정의된다. 그리고 인간의 경우 코나투스는 욕구 또는 욕망으로 제시된다. 이처럼 코나투스나 욕망으로 규정되면 포텐샤는 항상 능동적인 힘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능동성과 수동성의 경향적인 차이를 통해 표현된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는 대부분의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수동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능동성을 얻는 길이다. <윤리학> 3부 이하의 논의는 이처럼 인간이 수동적인 정서 또는 정념들에 종속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인간학-윤리학의 영역에서 포텐샤-포테스타스의 관계는 상이한 쟁점을 갖게 되는데, 핵심적인 것은 정신 또는 의지에 대한 신체 활동의 종속이라는 문제다. 이는 특히 윤리학 3부 정리2의 주석과 5부 서문에 잘 나타난다.

 

스피노자는 3부 정리2의 주석에서 두 가지 대립항을 설정하고 있다. 하나는 스피노자 자신의 관점으로서,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재이며, 이것은 때로는 사유속성 아래서 또는 연장 속성 아래서 인식된다. 이로부터 실재들의 연관과 질서는 자연이 이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저 속성 아래서 인식되는 간에 하나이며, 따라서 우리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는 본성상 우리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함께 간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그러니까 정신이 능동이면 신체도 능동, 정신이 수동이면 신체도 수동으로 같이 비례해서 간다는 것.

 

반대로 스피노자의 가상의 적수들은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가 상반되며 더 나아가 말을 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정신의 포테스타스에만 달려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하며, 따라서 다른 많은 것들은 정신의 결단에 달려있다고 믿는다그들은 신체의 힘이 너무 커지면 정신이 압도된다고 생각했다. 의지력 같은 정신이 커져서 신체를 통제한다는 개념으로 이해 <- 반비례 관계. 데카르트가 특히 이렇게 주장했다. 그러니까 누가 너무 수다스럽거나 비밀을 지키지 못한다면, 데카르트 입장에서는 정신의 포테스타스가 약한 것이다. 정신이 신체를 통제 못하는 상태.

 

그런데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후자의 관점은 자신의 행동은 의식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결정하는 원인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자유롭다고 믿는사람들의 일반적인 가상에서 유래한다. 곧 정신이 내리는 결단이나 신체의 행동이나 모두 하나의 동일한 코나투스 또는 인간적 표현인 욕망에서 생겨나지만, 가상에 빠진 사람들은 이러한 인과관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이를 정신에 고유한 포테스타스, 또는 의지의 권능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신랄한 표현에 따르면, 젖먹이는 자유 의지로 젖을 원한다고 믿고, 겁쟁이는 자유의지로 도망친다고 믿고, 술주정뱅이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유의지로 지껄이고 있다고 믿는 것.

 

스피노자는 5부 서문에서 스토아학파 및 데카르트, 특히 <정념론>의 데카르트 역시 이러한 가상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곧 이들은 정서들이 절대적으로 우리의 의지에 의존하고 우리는 정서들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믿고있으며 데카르트의 경우는 송과선(뇌 안에 존재하는, 정신과 신체가 결합하는 부분)이라는 은밀한 성질로 정서들에 대한 정신의 지배력, 포테스타스를 확립하려고 시도하도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러한 가상 또한, 우리의 신체와 정신의 작용을 규정하는 것은 동일한 코나투스이며, 우리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는 본성상 우리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함께 간다는 점을 인식한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학-윤리학에서 포텐샤-포테스타스 관계의 쟁점은, 신체에 대한 정신 내지 의지의 권능으로 표현되는 포테스타스의 관점이 우리의 인간학적 조건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가로막고, 이에 따라 윤리적인 능동화의 과정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 어떻게 수동성을 줄이고 능동성을 높일 것인가, 윤리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정신과 신체의 역량을 어떻게 확장시키고 능동화시킬 것인가. 스피노자의 중요한 화두

 

3. 정치학적 의미

 

앞에서와 달리 정치학의 영역에서 두 관계는 대립의 관계로 나타나지 않고 비제도적인 또는 선제도적인 행위 능력으로서 포텐샤와, 법제도에 의해 부여받은 권력 또는 권한으로서 포테스타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 곧 정치학의 영역에서 포텐샤는 법적 제도적 질서의 존재론적 기초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 제도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정치적 행위의 자연적 시초를 표현한다면, 포테스타스는 법제도에 따라 규정된 행위 능력이나 권한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권력 내지 권한으로서 포테스타스는 자연 상태에서는 성립할 수 없으며, 오직 주권이 존재하는 국가에서만 부여받고 행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도로를 걸어갈 수 있는 자연적 역량, 포텐샤를 지니고 있지만 교통법규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권한, 포테스타스는 갖고 있지 않다.

 

국가 전체의 차원에서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사이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대중들의 포텐샤와 주권, 곧 최고의 포테스타스(summa potestas) 사이의 관계로 표현된다. <정치론>32.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 인도되는 듯한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따라서 둘 사이의 관계는 존재론-신학, 인간학-윤리학의 영역과는 달리 대립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법과 제도가 없이는 역량이 제도화되거나 공동의 정치권력으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포텐샤의 철학, 곧 역량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편으로는 매우 적절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포텐샤-포테스타스의 관계를 일의적인 대립 관계로 파악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이처럼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의 관계를 일의적인 대립관계로 해석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 그가 저술한 <야생의 별종- 바루흐 스피노자에서 권력과 역량에 대한 고찰>은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걸작 중 한권으로 꼽힌다. 그 이유는 처음으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다중 multitudo이라는 개념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해명했으며(‘다중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별도의 항목으로 다룰 것이다), 스피노자의 정치학을 스피노자 철학 체계의 핵심으로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책의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이 책에서 역량과 권력 사이의 대립을 스피노자 철학, 더 나아가서 근대 사회 자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축으로 삼는다. 네그리는 한편으로 권력의 노선, 곧 홉스에서 루소를 거쳐 헤겔로 이어지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노선과 다른 한편으로 역량의 노선, 곧 마키아벨리에서 스피노자,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다중의 역량의 노선을 대립시킨다. 네그리에 의하면 근대성이라는 것은 서양 합리주의의 선형적 발전도, 서양적 이성의 운명도 아니, ”자유로운 생산력의 발전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지배 사이에 항상 양자택일이 존재해 온 모순적인 전개과정이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대중의 자유로운 생산력과 자본주의적인 지배관계 사이의 또는 역량과 권력 사이의 대립 노선이 서양의 근대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공간을 구조화한다. 스피노자 철학의 중요성은 다중의 역량의 존재론과 정치학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이론화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네그리 해석의 문제점은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의 관계, 또는 다중의 역량 대 지배 권력- 또는 구성/제헌 권력(constituent power) 대 구성된 권력(constituted power)의 관계를 일의적인 대립관계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외재적 대립관계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이는 스피노자 철학에 낯선 관점일 뿐만 아니라 제도 바깥의 대중운동과 제도적인 정치영역 사이의 갈등적/변증법적 관계를 파악하는 데도 적절치 못한 관점이다.

 

* 구성/제헌 권력 대 구성된 권력 pouvoir constituant VS pouvoir constitué

 

그러니까 구성/제헌 권력 대 구성된 권력. 이게 바로 정치학적인 의미에서 콘티스타스의 용법이다. 스피노자가 최고의 포테스타스(summa potestas)는 다중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라고 했는데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가 바로 숨마 포테스타스다.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 인도되는 듯한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다중의 역량 대중들의 역량 power of multitude(multitudo)

 

pouvoir constituant

pouvoir constitué

 

이것은 현대법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개념인데,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신부인 시에예스 Emmanuel Sieyes17892, 그러니까 프랑스 혁명의 해에 발표한 [3신분이란 무엇일까]라는 논문에서 도입한 구별이다. 100쪽 남짓 되는 얇은 책인데, 여기서 시에예스 신부는 제3신분이야말로 진정한 권력의 주체라고 주장하고, 신부가 이 책을 딱히 혁명적인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은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프랑스 혁명의 아버지가 된다ㅋㅋ 여기서 도입한 굉장히 중요한 구별이 바로 저 두 가지.

 

영어나 불어에서 constitution이라는 말은 중의적이다. 구성이라는 뜻과 법학적인 의미에서 헌법이라는 뜻,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 constituant은 제일 일반적인 뜻으로 이야기하면 구성하는 권력, 구성하는 힘이지만 이 단어에는 헌법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이중의 의미가 다 들어가서 헌법을 구성하는 힘, 헌법을 구성하는 권력이라는 말이다. 말 그대로 제헌권력.

 

시에예스가 여기에 쌍으로 쓰는 것이 pouvoir constitué이다. 이건 과거분사형으로 썼는데 영어로 하면 constituded power. 그러니까 이미 헌법이 제정되고 난 다음에 헌법에 따라 실행되는 힘, 권력이라는 의미다. 구성된 헌법적인 힘.

 

이를테면 촛불 시위에서 표현되는 것이 말하자면 pouvoir constituant. 기존체계를 무너뜨리고 무언가를 설립하고 제정하는 그런 힘. 반면에 이렇게 해서 새 정권이 들어서고 개헌을 해서 새로운 헌정질서가 만들어진다고 하면 그게 바로 pouvoir constitué. 새롭게 국가가 수립되면 그것을 보존하고 유지하려는 힘. 518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새로 들어선 문재인 정권은 촛불집회 정신에 입각했다라며 촛불집회의 의미를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었다라고 했는데, 사실 헌법 12항에 보면 주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그렇다면 문재인이 말한 국민주권의 시대를 연 국민’, 헌법 12항에서 말하는 국민constituant로서의 국민일까 constitué 일까.

 

법학적인 의미에서 보면 후자다. 제정된 헌법에 입각한, 거기에 기초를 둔 권력. constituant는 아주 이상한 개념이다. 이것은 헌법에 표현될 수 없는 권력이다. 정의상 헌법보다 상위에 있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헌법을 세울 수도 있고 무너뜨릴 수도 있는, 그래서 헌법으로 포괄이 안 되는 힘. 그러니까 헌법 입장에서 보면 유령 같은 힘이다. 헌법을 가능하게 한 힘이지만 헌법으로는 표현이 안 되는. 저걸 표현하는 순간 헌법은 자기의 외부, 자기의 바깥을 자기 안으로 들여와야 하니까. constituant 해당하는 것이 혁명같은 것이지만 헌법이 그것 자체를 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완결성인데, 완결적이고 내재적이어야 하는데 법이 저것을 담게 되면 자기의 완결성을 부정하게 되는 셈이 된다.

 

스피노자의 포텐시아라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대중들의 역량, 다중의 역량이라는 게 바로 constituant.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다중의 포텐시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루소식으로 말하면 인민, 일반의지, 인민주권 같은 것이다. People's sovereignty. 여기서 “people”이라는 말이 참 애매한 말이다. constituant의 주체일 수도 있지만 constitué의 주체일 수도 있는.

 

아무튼 네그리는 이 포텐시아를 민중의 해방적인 힘이라고 부르고 포테스타스를 지배권력이라고 했는데 스피노자의 용법과는 다르다. 스피노자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스피노자의 구별법은 오히려 세이예스의 구별법이랑 비슷하다.

 

시에예스의 구별법을 가져다가 발터 벤야민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라는 초기 논문에서 법 정초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이라고 변형해서 쓴다. 이때 폭력이라는 단어는 gewalt. 게발트는 한국어의 폭력보다는 뜻이 더 많다. 이 게발트는 스피노자식으로 하면 포테스타스이기도 하고, 교회가 갖고 있는 영적인 권능이라고 할 때도 게발트를 쓰고 법적인 권한을 말 할 때도 게발트라고 쓴다. 물론 벤야민의 저 구별법이 시에예스의 구별법과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법 정초적 폭력

법 보존적 폭력

 

벤야민 논문을 보면 이 구별은 벤야민의 여러 구별 중에 그냥 한 가지 구별이다. 사실은 벤야민은 글의 뒷부분에 가서 신화적 폭력/ 신적인 폭력을 다시 구별한다. 그에 따르면 신화적 폭력이라는 것은 권력을 목표로 하고 신적인 폭력이라는 것은 정의를 목표로 한다. 이런 구별을 염두에 두면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인 폭력이라는 것은 법 정초적 폭력 중에서도 신화적 폭력을 제외한 순수하게 정의로운 폭력, 순수하게 정의로운 힘, 그것만 표현하는 것이 바로 신적 폭력이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는데ㅋㅋㅋ 하여간 이것은 뭔가 새로운 권력, 새로운 법질서를 구현하려고 하기보다는 오로지 정의를 추구하는 힘이다.

 

그러니까 벤야민에게 법 정초적 폭력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혁명적인 어떤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 정의로운 어떤 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2차 세계대전 끝나고 나서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많은 신생국들이 생겨났다, 민족의 해방운동을 통해서.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지에서. 그게 어떤 의미에서 보면 법 정초적 폭력이다.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등장한 힘. 여기서 비극인 것은, 제국주의를 무너뜨린 이 민족해방운동, 독립투쟁의 영웅들이 새로운 나라를 구성한 뒤에는 대개 독재자로 변모했다. 거의 예외 없이. 그래서 신생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독립국가들이 독재국가로 변질되거나 아주 오랫동안 내전을 경험하게 된다. 대표적인 나라가 알제리. 알제리가 프랑스에게서 반 식민투쟁을 해서 힘겹게 독립을 했는데 독립하자마자 20년 넘게 내전에 들어가서 독립투쟁 당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만 봐도 법 정초적인 폭력이 해방적이거나 긍정적인 힘이다, 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다.

 

그런데 네그리는 이런 걸 너무 무시한다. 포텐시아, 그것을 그 자체로 해방적인 힘이라고 이야기 해버리기 때문에 포텐시아와 포테스타스 사이의 변증법이 들어갈 여지가 네그리 철학에서는 많지 않다.

 

* 다시 번역에 대하여-

 

우리가 포텐샤를 역량이라는 말로 번역한 것은 스피노자 당대의 과학적 세계관의 변화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시대는 거대한 과학혁명의 시기였고, 이러한 혁명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양화하는 데 있었다. 자연적 실재들이 제각각의 고유한 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 자연 전체를 일양적인 법칙에 따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자연의 인식 가능성을 얻기 위해서도 무엇보다도 각각의 개체나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질이나 특성을 양적인 차이들로 환원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능성이나 실재성” “완전성이나 우리의 주제인 포텐샤 같이 형이상학 영역에서 사용되는 통념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또는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우리는 실재성의 정도완전성의 정도또는 포텐샤의 차이”(힘의 양의 차이”) 같은 표현들을 접하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철학적인 어휘에서 배제되는 경우도 목격하게 된다(스피노자의 형이상학에서는 가능성같은 관념이 그렇다. 하지만 이는 윤리의 영역에서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포텐샤는 각각의 자연적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나 비교 불가능한 힘을 가리키기보다는 양적으로 측정될 수 있고, 따라서 상호비교할 수 있는 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포텐샤라는 용어는 역량이라는 말로 옮기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정리4 ”그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는 신의 관념은 유일할 수밖에 없다.“

 

- 2부 정리3과 정리4는 스피노자 철학의 용법대로 하면 무한양태에 관한 이야기다. 특히 사유속성에 속하는 무한양태에 대한 이야기

- 스피노자가 편지에서는 무한 지성이라고 썼는데 에티카 정리4에서는 신의 관념“ idea Dei 이데아데이 idea of God이라고 썼다. 이것도 번역할 때 조심해야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갖는) 신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는 신의 관념을 말한다.

 

정리4을 풀어서 이야기하면, ”신의 관념이라는 것은, 그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관념으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이 따라 나오는 이것은 무엇일까.

- 스피노자 용법대로 하면 신의 관념은 직접적 무한양태니까 다시 바꿔서 말해보자. ”직접적 무한양태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이 따라 나오는 이것은 무엇일까

-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에티카 원문을 봐도 대명사로 표현되어있지 지정이 되어있지 않다. 일단 1) 상위개념인 실체나 속성은 아니라는 것, 2) 양태로부터는 양태만 나올 수 있다, 그런데 무한한 것은 무한한 것으로부터만 따라 나오기 때문에 유한양태도 아니라는 것(무한한 것에서 유한한 것이 나온다라고 하면 이건 그 이전의 창조론으로 가야한다ㅋㅋ)

- 그렇다면 무한양태인가? 그런데 그러면 또 이상한 결과가 나온다. 무한양태가 무한하게 많다는 결론이니까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이상하다

 

* 첫 번째 이상한 점

 

- 1부 정리21의 증명을 보자. 사유속성 내의 신의 관념을 예로 들어보자 <- 여기서 벌써 사유속성 안에 있는 신의 관념을 직접적 무한양태의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신의 관념은 사유속성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다.

- 문제의 그 슐러의 편지. 슐러에게 보내는 스피노자의 답이 스피노자 입으로 직접적 무한양태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답하는 유일한 대목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도 불확실하다. 무한양태에 이것만 있다고 말하는 건지, 무한양태에 다른 어떤 사례들이 더 있는데 이것만 예로 들어 이야기한 건지 여부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다.

 

- 스피노자가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온다라는 말을 쓰는 경우인 1부 정리16을 다시 보자. 신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무한하게 많은 것들(곧 무한 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와야 한다.“ 무한하게 많은 것들에는 사유속성에 속하는 것들, 연장속성에 속하는 것들, 그 밖의 속성a 속성b 속성c... 등등에 속하는 것들이 다 들어간다(모든 속성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 신의 절대적 본성에서부터 따라 나온다“)

- , ”무한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들신의 본성으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온다는 것은 같은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 무한하게 많은 것들에는 사유속성, 연장속성,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a b c 속성들도 다 들어가고, 이것들이 다 신의 절대적인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그래야 신의 역량이 절대적 역량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게 신 자체인 경우에는 이해할 수 있는데, 정리4에서는 신 자체가 아니라 신의 관념만이 문제가 된다는 것. 사유속성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가 문제가 된다는 것. 어떻게 한 속성에 속하는 양태로부터 어떻게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온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 다시 말해서 1부 정리16에서 벌써 무한지성 안에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무한지성 안에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은 사유속성, 연장속성, 속성 abc... 등등. 그러니까 신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올 수 있는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 지성 안에 들어올 수 있다. 그리고 신의 관념은 사유속성 안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이다. 그러니까 이상한 것이다. 이것은 한 속성 안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인데, 어떻게 한 속성 안에 속하는 이 양태 안에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들 많이 아니라 연장속성에 속하는 것들, 속성 a,b,c... 등등에 속하는 것들까지 다 여기 이렇게 들어온다, 따라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인가.

- 그렇다면 우리가 사유속성에 속하는 신의 관념이라는 직접적 무한양태 대신에 연장속성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인 운동과 정지를 놓고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러면 운동과 정지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온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 벌써 관념들이 연장속성에 속하는 이 물체들이 따라 나오는 운동과 정지의 법칙에 종속되지 않지 않나. 그러니까 운동과 정지로부터 따라 나올 수 있는 것은 오직 물체들만이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유속성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인 신의 관념으로부터는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온다. 1부 정리16에서도 그렇게 이야기를 이미 했고 정리4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속성은 아닌데 사유속성만 대체 왜? 왜 신의 관념에 대해서만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올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왜 사유속성만 이런 특권을 누리는가? 다른 속성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에 대해서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는데 왜 신의 관념만.

 

* 두 번째 이상한 점

 

- 1부 정리2123에서 알게 된 것은 무한한 것에서는 무한한 것만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신의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은, 신의 관념이 무한양태니까 무한한 것이 따라 나올 것이고, 신의 관념이 양태니까 무한하게 많은 속성일 수는 없고 무한하게 많은 양태가 따라 나올 것이다. 무한양태. 그런데 지금 무한양태가 무한하게 많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무한양태는 무한하게 많다고. 그냥 무한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다고. 이것도 이상하다.

- 슐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딱 세 가지만 예로 들고 있다. 직접적 무한양태로 신의 관념, 운동과 정지, 우주 전체 이렇게.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걸 두고 스피노자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은데, 스피노자 연구자들의 이런 논의의 전제는 무한양태가 딱 네 개있다, 세 개 아니면 네 개 있다인데ㅋㅋㅋ 그런데 지금 정리4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마치 무한양태가 3, 4개가 아니라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무한하게 많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사유속성, 연장속성, 속성a, b, c... 등등의 속성이 있고, 거기에도 각각 직접적 무한양태 매개적 무한양태가 있을 테니까. 그래서 무한하게 많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런데 스피노자는 그냥 무한하게 많다고 하지 않고,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다고 하니까 그것은 연장속성과 사유속성에도 스피노자가 사례로 들지 않은 무한양태의 종류가 더 있다, 그것도 몇 종류 더 있는 게 아니라 무한하게 많이 더 있다, 이런 말인데, 아니 그게 대체 뭐지... 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 실마리 <소론>

  

스피노자가 초기저작에서 신의 관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하나 있다. <소론>.

소론의 거의 마지막에 나오는 부록을 보면 스피노자가 신의 관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연 또는 신은 1), 그에 대하여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말해지고, 그 자체로 창조된 실재들의 모든 본질을 포함하는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에 2), 이 모든 것 3)에 대하여 사유 속성 안에서 무한한 관념 4), 곧 자연 전체를 존재하는 그대로 표상적으로 그 자체 안에 포함하는 관념이 산출되는 것이 필연적이다.“

1) 에티카에서는 신 또는 자연이라고 하는데 소론에서는 자연 또는 신

2) 여기서도 신은 하나라고 말하며 신을 정의한다.

3) 이 모든 것 :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과 창조된 실재들의 모든 본질

4) 이 무한한 관념은 이 모든 것에 대한 관념, 여기서대로 하면 신의 관념

 

- 신의 관념은 이 모든 것에 대한 관념이다. 이 모든 것무한하게 많은 속성들과 창조된 실재들의 모든 본질을 다 포괄한다. 여기서 주목할 말, 2부 정리4에는 나오지 않지만 소론에는 나오는 말 표상적으로“ 1부에서 여러 번 봤던 표상, objectiva. 그러니까 우리가 1부 정리16에서 무한지성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라고 표현했을 때 이 들어온다는 말이 소론에서는 표상적으로 그 자체 안에 포함된다로 표현되어있다. 그러니까 무한지성 안에 들어온다는 이야기는, ”표상적으로 들어온다라는 이야기다, 이 표현법대로 하면. 소론의 그 다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때문에 나는 또한 이 관념을 1) 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창조된 피조물 2)이라고 불렀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그 자체 안에 모든 실재들의 형상적 본질을 누락이나 추가 없이 표상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3)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단지 하나만 존재하는데,4) 속성들의 모든 본질 및 이러한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 양태들의 본질들이 단 하나의 무한한 존재의 본질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5)

 

1) 무한한 신의 관념을

2) <소론>에서는 아직 창조“ ”피조물이라는 창조론의 용어를 쓰는 흔적이 남아있다. <에티카>에서는 따라 나온다“, 편지만 봐도 산출된이라고 말하는데. 아무튼 저 창조적 피조물이 가리키는 것은 직접적 무한양태라는 말이다.

3) 다음 시간에도 보겠지만 2부 정리7과 그 이후부터 형상적, 표상적이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용어다. 여기서도 말한다. 신의 관념은 그 자체 안에 모든 실체들의 형상적 본질을 누락이나 추가 없이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의 관념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포함하냐면 표상적으로포함한다. 더 풀어서 이야기하면, 표상으로 포함한다-> 관념으로 포함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관념으로서 포함한다.

4) 즉 신의 관념은 하나만 존재하는데

5) 왜냐면 그것은 속성들의 모든 본질들이 신이라는 단 하나의 존재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을 표상적으로 포함하는 신의 관념은 단 하나다, 이런 이야기다.

 

2부 정리4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는 신의 관념은 유일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도 신의 관념은 단 하나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2부 정리4<소론>과 달라진 점이 뭐냐면 표상적으로라는 말의 여부다. ”그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표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신의 관념은 유일할 수밖에 없다.“ 라고 표상적으로를 넣으면 소론의 이야기하고 거의 똑같다. 표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관념으로서 따라 나오는. 그러니까 형상적으로 볼 때는 모든 것이 신으로부터 따라 나오지만, 표상적으로 보면 모든 것은 신의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온다는 이야기다.

표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관념으로서 따라 나오는. 이렇게. 그러니까 형상적으로 볼 때는 모든

 

- 신의 관념이 모든 것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포함한다

- 무한하게 많은 것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신의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라고 할 때는 그건 형상적으로 따라나온다기 보다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사실 정리4 이하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이 바로 형상적, 표상적의 용어의 의미와 용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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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1 사유는 신의 속성이다. 또는 신은 사유하는 실재다

정리2 연장은 신의 속성이다. 또는 신은 연장되는 실재다

 

- 1부에서 신이 무엇인지 이야기했고 2부 서문에서 신에게서 필연적으로 따라 나와야 하는 것을 설명하겠다, ’모두가 아니라 인간 정신 및 지복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들, 이라고 에티카에서 논의할 대상을 한정했다. 한정 -> ”인간에 관한 것 -> 그래서 정리1과 정리2에서 딱 (인간이 지각 가능한) 연장과 사유에 대해서만 말한다.

- 스피노자는 속성개념을 아주 제한적으로 쓴다. 속성이랑 구별해서 쓰는 것이 특성. 스피노자에게 속성이란, 신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 , 본질. / 특성이란 본질에서 따라 나오는 그 사물의 고유한 성질을 말한다. 신의 본질로서의 속성에는 사유와 연장, 신의 본질로서의 특성에는 자기원인, 무한성, 유일성 등이 있다.

- 스피노자가 속성, 특성 이외에 또 이야기한 다른 한 가지: 상상적인 성질

* 2부 정리3의 주석에 상상적 투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은 자비롭다같은, 인간이 인간의 특성을 신에게 투사하는 것.

 

- 정리1사유는 신의 속성이다“= ”사유는 신의 본질이다같은 뜻이다

정리2의 연장은 신의 속성이다= 연장은 신의 본질이다.

- 1부 정리13 따름정리에서 연장속성/사유속성을 신의 속성으로 일치시키는 것이 매우 대담한 주장이라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었다.

 

* 정리1의 증명:

- 자연 안에 실존하는 모든 것은 그로부터 무언가가 따라 나올 수 있는 원인들을 갖고 있다. ,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갖고 있다. ?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신을 표현하니까.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신을 표현한다 = 신의 역량을 표현한다

- 양태를 양태로서 존재하게 성립하게 해주는 것= 속성.

양태가 다른 것 안에있다에서 다른 것“= 속성

- ”무한하게 많은 것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 존재자는 그 사유역량에 의해 필연적으로 무한하다“ => 어떤 사유든지 바로 이 사유라는 속성에 의해 가능하다.

 

- 1부 정리14의 따름정리2에서 연장되는 실재와 사고하는 실재신의 속성들이든가 아니면 (공리1에 의해) 신의 속성들의 변용들이라고 말함으로써 변용이 아닌 속성으로서의 연장되는 실재와 사유하는 실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 바 있지만, 신의 속성은 2부 정리1과 정리2에서 처음으로 제시된다.

- 정리1의 증명은 후험적 증명, 주석은 선험적 증명

 

* 선험적 a priori 아프리오리. (priori 앞서서)

- 선험적 인식: 굳이 경험을 통해 직접 체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지식. 칸트는 이 특징이 보편성이고 필연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수학적 진리, 논리학적 법칙들, 이런 것들이 선험적 인식에 해당한다고 본다.

- 선험적 증명: 원인이나 근거에서 출발하여 경험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

 

* 후험적 a posteriori 아포스테리오리. (posterior 나중에)

- 후험적 증명: 경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이런저런 개별적인 사물, 개별적인 생각)에서 출발하여 그것들의 원인이나 근거가 되는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 1부 정리11 다른 식의 증명. 유한한 존재자들= 나 자신. 증명을 여기서 시작한다. 내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실존하는데 무한한 존재자가 왜 실존을 못하는가? 유한-> 무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경험적으로 지각하기 쉬운 데에서 시작하니까 이해하기 쉽다

 

- 주의할 점: 칸트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transzendental 개념이다. 이 개념이 종종 선험적이라고 번역되기 때문에 a priori와 혼동을 빚는 일이 벌어진다. 전자를 선험적으로 번역할 경우에 후자는 선천적이라고 번역된다. 역시 혼란스러운 번역이다. 다행히 최근에는 주로 초월적이라는 번역어나 초월론적이라는 번역어로 옮겨지는데 이 번역이 원래의 뜻에 더 가깝고 혼동을 피할 수 있어 더 낫다고 생각한다.

- 이게 다 칸트 연구자들 때문이다. 칸트 연구자들은 대체 왜 저렇게 원래의 뜻과 맞지 않는 선험적이라는 번역을 하는 것일까? 우리나라 칸트 연구는 대부분 그대로 일본에서 다 가져왔기 때문이다. 일본식 용어를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 더구나 칸트는 이 두 단어를 자주 같이 쓴다. 그래서 더욱 혼란이 빚어진다. transzendental 철학 자체가 a priori한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분석하기 위한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헷갈린다.

 

* 초월론적/ 초월범주

 

- 스피노자도 이 transzendental이라는 말을 쓴다. 에티카에 딱 한 번 나온다. 2부 정리40의 주석1. 하지만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을 누락하지 않기 위해 나는 존재자, 실재, 어떤 것과 같이 초월적이라고 불리는 용어들 termini transcendentales dicti“

- 초월적 언어란 중세철학에서 매우 자주 쓰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이라는 책 이래로 서양철학에서 제일 중요한 파트 중에 하나인 범주론. 범주론은, 기본적인 개념, 우리가 사고하고 대화할 때 기본이 되는 개념을 말한다. 그러니까 범주를 다른 말로 하면 근간이 되는 개념/ 기초적인 개념.

- 그런데 이 중세철학이나 신학에서 쓰이는 초월적 언어는 기본적인 개념으로서의 범주보다 더 일반적이고 더 기본적인 용어들을 말한다. 범주를 초월하는. 이를테면 존재자, 실재, 어떤 것, 일자, . 이 얼마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단어들인가. 존재자만 해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것이니까.

- 즉 초월범주란 범주를 넘어서 범주보다 더 일반적인 것. 일반적인 범주를 초월해서 더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것. (굉장히 아이러니하기도 한 재밌는 작명이다ㅋㅋ 일반적인 걸 초월해서 독특해지는 게 아니라 일반적인 걸 일반적인 degree를 초월해서 더더 일반적인 것이 되다니...)

- 스피노자는 이 초월범주에 대해 매우 신랄하게 비판했다. 초월범주라는 것은 사실 아주 부적합하고 혼동된 용어라고.

 

* 칸트 철학에서 tranzendental은 두 가지 기본적 의미를 가진다

 

1) 가능성의 조건

 

- 가장 일반적인 뜻. 칸트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다른 철학자들도 transcendental을 쓸 때는 가능성의 조건/근거라는 의미로 가장 많이 쓴다. 이를테면 데리다의 초월론적 기의 transcendental signified‘. 데리다가 초월론적 기의라고 말하는 것은 신이라든가 기원이라든가 옛날의 형이상학에서 만물의 근원이 된다, 토대가 된다라고 생각했던 것들이다(초월적인 기의 transcendental signified가 존재하지 않으며, 의미화의 영역과 유희는 끝이 없다고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기의라는 단어 자체의 개념조차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칸트 이전의 다른 철학자들, 특히 중세철학에서 우주의 근거는 신이었다. 스피노자가 정리1에서 사유가 신의 속성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증명에서 이러저러한 개별적인 생각들은 양태이며, 양태들이 가능하기 위한 근거는 속성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속성은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 이게 바로 가능성의 근거라는 말의 전통적인 용법이다.

- 그런데 칸트는 다르게 말한다. ’칸트가 철학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했다고 말하는 이유이자 칸트 철학이 특별한 이유다. 그는 우리 인식과 진리의 근거가 우리 주관 바깥의 객관적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우리의 인식이 주관 바깥에 있는 객관 세계의 근거를 이룬다고 말한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예전에는 우리의 인식이나 진리의 근거가 우리 바깥의 객관적인 실체 안에 있다고 봤는데, 칸트는 이것을 부정한 것이다. 우리의 인식이나 객관세계의 근거는 우리의 주관 안에 있다고. 그러니까 우리의 주관이야말로 외부 세계나 우리 인식의 근거를 이룬다는 것이 칸트 철학의 핵심이다.

- 칸트가 transzendental이라고 말했을 때, 그 가능성의 조건을 칸트는 우리의 주관, 우리 주관 안에 내재해있는 선험적인 인식의 틀, 경험적인 틀에서 찾았던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도 역시 객관적이고 자연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을 인식하는 감성의 형식이라고 말한다. 앞에서 범주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가 사물을 사유하고 추론하고 인식하기 위한 제일 기본적인 개념들도 우리의 주관에 내재해있는 인식의 틀이라는 이야기다. 이게 칸트의 transzendental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다.

- , 사유 인식의 존재의 근거를 우리 주관 외부에서 찾지 않고 우리 주관 내부에 내재해있다고 보고, 인식의 근거,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우리 내부에서 찾자고 하는 것이 바로 칸트의 transzendental 철학. 초월론적 철학.

- transzendent 철학은 외부에서 객관적인 세계에서 근거를 찾는 것(가령 신이라거나) transzendental 철학은 내부에서 찾는 것. 가능성을 내부에서 찾는 것.

- <순수이성비판>에서 초월()이라는 말은, 우리의 인식(경험)의 조건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간 같은 감성의 형식 및 우리의 사유 범주들과 같은 지성의 형식, 그리고 초월()적 주체가 바로 우리의 인식(경험)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2)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탐구: 이러한 인식(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대한 탐구를 칸트는 초월()적 철학이라고 부른다.

 

*** 강의와 연관해서의 결론: 그러니까 transzendentala priori는 상당히 다른 의미라는 것을 꼭 염두에 두자

 

* 그럼 칸트와 스피노자를 비교한다면?

- 1부 정의4를 보면서 속성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A. 주관적 해석론

헤겔에서 유래한 이 관점. 정의4에서 지성이 지각하는이라는 구절을 주목. 이 구절이 속성이 실체의 객관적 본질이 아니라 인간지성이 실체를 파악하는 하나의 관점이라는 점을 말해준다고 간주한다. 20세기 전반까지 이 관점에 대한 상당수의 지지자들이 존재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스피노자가 속성과 특성, 상상적 성질 등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이유를 해명하지 못함. 이 관점에 따를 경우 속성자체가 이미 주관적인 성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는 스피노자가 속성들을 실체의 객관적 본질로 제시하는 다른 구절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1부 정리 19/ 두 번째, 네 번째 편지 등)

->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의 해석이 오늘날 속성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론의 시발점. 많이들 받아들였다.

 

- Harry Wolfson 울프슨의 주장: 스피노자 속성개념은 매우 주관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이건 중세유대사상에서 매우 유명하게 퍼져있던 개념이다. 이런 식이다. “이라는 절대자의 통일성을 생각해봤을 때. “속성은 실체의 본질, 즉 신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속성은 무한하게 많이 있다라고 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겠는가. 속성이 실체의 본질인데, 이 본질이 이렇게 무한하게 많다면 이게 어떻게 (유일자로서의) 신일 수가 있는가. , 신의 유일성 문제에 부딪히는 것이다. 울프슨의 주장은, 중세 유대신학에서는, “신은 초월적이라 신의 속성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초월자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파악하겠는가. 이미 인간의 능력치 바깥에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단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신이 이런 본질을 가졌을 거라고 단지 지각만 할 수 있다. , 객관적이지 않다. ”주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을 뿐이다. (중세유대신학과 스피노자철학을 비교하면서, 스피노자 철학이 중세유대신학에서 뻗어나왔다는 것을 전제로 한 주장)

 

- 20세기 전반까지 해서 헤겔 + 울프슨의 주관적 해석론을 학계에서 대세로 수용.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러한 주관적 해석론은 거의 사라지고 객관적 해석론이 대세가 되었다. 왜냐면 스피노자 텍스트를 고려해보면 그가 실제로 속성과 실체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는 것이 여러 텍스트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속성이 객관적으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254p에도 나와 있다.

 

B. 객관적 해석론

20세기 후반 이후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속성을 실체의 객관적 본질로 파악하고 있음. 마샬 게루/ 질 들뢰즈/ 피에르 마슈레/ 에드윈 컬리 등 <- 스피노자 연구의 대가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왜 속성에 대한 정의에 지성이 지각하는이라는 규정이 나와있는지 더 설명해주어야 한다. (지성이 지각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냐? <- 이에 대한 답은 2부 정리 7 주석)

더 나아가 속성이 실체의 객관적 본질을 구성하고 속성들이 하나가 아니라 다수, 더 나아가 무한하게 많이 존재한다면, 무한하게 많은 본질을 가지는 실체가 어떻게 유일한지, 어떻게 통일성을 가지는지 설명해주어야 함. <- 그래서 최근 2-3년간 다시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주관적 해석론>을 복원하려는 움직임. (아래 객관적해석론을 펼치는 주장을 보고 정리해본다면, 그 무한하게 많은 본질이 -> 하나의 유일한 실체로 수렴되고(그러니 그 무한한 본질 자체가 이미 유일함으로 수렴), 이 실체가 때로는 이 속성으로 때로는 저 속성으로 때로는 무한한 속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라는 이야기인 듯. 비유를 하자면 무한까지는 아니지만 무수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라는 하나의 인간이 때로는 이 상황에서는 이 속성으로 저 상황에서는 저 속성으로 다채롭게 표현되지만 결국은 는 유일하다는 그런 것과 비슷한 것)

 

*** 마샬 게루(20세기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1부 정의 4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 2부 정리7의 주석 곧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사유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연장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 스피노자가 말한 지성은 인간 지성이 아니라 신의 지성이다. , 객관적 지성이다. 그러므로 객관적 해석론이 옳다. 저 구절이 객관적 해석론자들이 많이 근거 삼는 지점

 

C. 칸트의 경우

 

칸트: “속성이란 물자체다. 하지만 우리는 물 자체를 알 수 없다. 현상만 알 수 있다를 참고하면, 우리는 속성을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인간 지성이 지각하는 대로만 이해할 수 있다. , 속성이란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지성이 주관적으로 투사하는 것 <- 속성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론.

 

하지만 스피노자의 속성을 객관주의적 해석론으로 받아들이면, 칸트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칸트는 물 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고 했고, 현상만 인식할 수 있다고 했지만, 스피노자는 NO! 물 자체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생각했는데 20세기 와서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속성을 객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 근데 최근에는 여기에 대한 반론이 나와서, 주관주의적 해석론을 복원시키자는 움직이기 일어서 다시 논쟁 중)

 

- 속성의 주관적 해석론을 따르는 사람은 칸트적 해석을 따라는 것이다.

- , 우리의 지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하는 것.

- 속성이라는 것을 지성이 세계를 지각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틀이라고 본다면, 칸트식으로 이야기하면 이것은 범주가 될 수도 있고 시공간과 같은 감성의 형식이 될 수도 있다. 이런점에서 보면 스피노자 철학은 칸트와 아주 대조적이다. 실제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보면 칸트는 스피노자를 대표적인 교조주의적인 철학자로 본다.

- 하지만 스피노자가 속성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성이 그렇다고 지각하는 것이라고 보게 되면, 이건 칸트식의 범주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와 칸트는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객관적해석론과 주관적해석론에 따른 입장이 칸트와 스피노자를 대조적으로 보느냐 비슷하게 보느냐를 좌우)

 

* 칸트용법 중 감성의 형식에서의 감성직관과 같은 것으로 보면 된다. , 범주는 지성, 지적인 추론, 인식의 틀이고, 직관은 감성의 틀인. 칸트는 우리가 하는 감각적인 경험, 감각하는 자료들을 직관이라고 본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직관과는 상당히 다르다.

 

* 다시 2부 정리1의 주석으로 돌아가면-

 

- 스피노자가 2부 정리1의 증명에서는 독특한 사유, 이러저러한 생각에서 출발해서 사유속성으로 진행을 해간다면, 정리1의 주석에서는 아프리오리의 방식으로 증명을 시도하고 있다.

- ”무한한 사유하는 존재자“- 증명의 마지막에 나온 문장인데, 주석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

- 이 정리는 또한 우리가 무한한 사유하는 존재자를 인식할 수 있다는 점으로부터 명백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정확히 말해 논증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인 자명함을 제시하는 명제.

 

- 이 명제 다음에 나오는 논증은 이러한 자명성을 부여하는 논증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우리가 무한한 사유하는 존재자를 인식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1부 정리9에서 다루었던 명제다. 각각의 실재가 더 많은 실재성이나 존재를 지닐수록 그 실재에는 더 많은 속성들이 귀속된다이러한 명제 자체에는 숨은 공리가 있다. 그것은 무는 특성들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서부터 가장 완전한 존재자또는 절대적인 존재자에 이르기까지 실재성이나 완전성의 정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 2부 정의6도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어떤 사유하는 존재자가 더 많은 것을 사유할 수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그 사유하는 존재자가 더 많은 실재성 또는 완전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다.

- 그렇다면 무한한 사유하는 존재자무한하게 많은 것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 존재자그 사유 역량(virtue)에 의해 필연적으로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 여기서 역량을 포텐시아라고 하지 않고 vitrue, virtus 비르투스라고 한 것이 흥미롭다.

- 영어 virtue에는 라틴어 virtus에 들어있는 중요한 뜻이 빠져있다. 라틴어 vir라는 어근은 vis에서 나온 말인데 이 vis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비르투스에는 이미 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어에는 vir라는 어근이 담고 있는 이라는 의미가 탈락하고 도덕이라는 뜻만 남게 됐다.

- 마키아벨리 <군주론>에 대비되는 두 가지 개념이 나온다. virtu하고 fortuna.

- virtu 비르투라는 말은 비르투스의 이탈리아어. 포르투나는 우연, 운이라는 의미고 우연히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여건을 말한다. 마키아벨리는 이 두 가지를 정치, 역사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힘이라고 말한다.

- 한국에 대입시켜본다면 비르투는 촛불, 태극기ㅋㅋ 같은 것이고 포르투나는 러시아나 일본, 중국 같은 외부 세력.

- 마키아벨리의 비르투를 우리말로 역량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 스피노자가 여기서 쓴 비르투스는 이라기보다는 사유가 자신의 본성으로 인해 갖게 되는 힘, 역량을 표현하는 말이다.

- 4부 정의8. ”나는 덕(virtus)과 역량을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서는 virtus이라고 번역했다. 4부가 주로 윤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1차적인 뜻으로 했는데, 이 말이 딱 맞는 말이다. 비르투스는 포텐시아다. 그런데 이것을 역량이라고 번역하면 역량은 역량이다라는 동어반복이 되는데, 어쨌든 뜻은 그렇다. 비르투스와 포텐시아는 같은 말이라는 이야기.

 

* 2부 정리1,2가 속성(신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라면

2부 정리3,4는 직접적 무한양태에 대한 이야기다.

- 사유속성의 직접적 무한양태: 무한지성

연장속성의 직접적 무한양태: 운동과 정지

연장속성의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 전체의 모습

- 1부 정리16무한지성이 최초로 등장한다. 신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무한하게 많은 것들(곧 무한 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와야 한다.“

- 1부 정리30 현행적인 유한 지성이든 현행적인 무한 지성이든 간에, 지성은 신의 속성들 및 신의 변용들을 파악해야 하며,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파악하지 않는다.“

- 1부 정리17에서 정리33까지 이야기하면서 신과 관련한 스피노자의 독특한 점은 무한 지성과 의지를 신의 본질로 간주하지 않고 무한양태로 간주한 점이다.

 

정리3 ”신 안에는 필연적으로 신의 본질 및 그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에 대한 관념이 존재한다

 

* 정리3의 증명.

- 자신의 본질 및 그것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에 대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다 <- 신학으로 말하자면, 전제한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정도의 의미.

신의 권능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 = 신의 능력을 갖고 있는 모든 것

 

* 정리3의 주석

 

우중들은 신의 포테스타스를 포텐시아라고 오해한다.

- 곧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신이 자기 자신을 이해한다는 점이 따라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이 자기 자신을 이해한다 understand himself 또는 인식한다는 것은 논리적 필연성을 지칭한다. 곧 어떤 사물의 정의에서 그 정의가 논리적으로 포함하는 특성들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듯이(스피노자에게 definition이란 어떤 사물의 본질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은 그 본성에 의해 규정된 바에 따라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행위한다는 것을 의미.

- 스피노자는 1부 정리16의 증명에서 어떤 실재의 정의가 주어져 있을 때 지성은 그로부터 다수의 특성들을 도출해내는데, 그것들은 사실 그로부터(곧 실재의 본질 자체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며, 실재의 정의가 더 많은 실재성을 표현할수록, 곧 실재의 본질이 더 많은 실재성을 함축할수록 더 많은 특성들이 따라 나온다.“

 

- ”1부 정리34에서 우리는 신의 역량은 신의 활동적 본질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었으며 따라서 우리에게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식하는 것만큼이나 신이 행위하지 않는다고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부 정리34 신의 역량은 신의 본질 자체다“.

- 저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활동적 본질이라는 표현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본질은 잠재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 활동으로 필연적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행위하는 본질또는 행위로 표현되는 본질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 ”현행적 지성 intellectus actu / actual intellect) 이라는 표현: 스피노자는 정리31의 주석에서 자신이 현행적 지성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현행적 지성이라고 쓴 것은 잠재적 지성이라는 것의 존재를 인정해서가 아니다. 스피노자의 생각은 그와 정 반대다. 그는 오히려 잠재적 지성’, 실행되지 않고 있는 지적인 능력 faculty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실행되고 있는 지성의 활동으로서 현행적 지성이야말로 바로 지성활동그 자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 현행적 지성과 잠재적 지성

- 스콜라 철학에서는 현행적 지성의 반대말로 잠재적 지성을 말한다. ‘현행적 지성이라는 말은 원래 뜻대로 하면 지금 실행되고 있는 지성이고, 잠재적 지성은 지금 실행되고 있지는 않지만 지성의 본성을 갖는 것을 말한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대그리스 학파와의 논쟁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들이 일을 하지 않는 목수가 왜 목수인가. 지금 목수일을 하지 않는데? 집이라도 짓고 일을 해야 목수지.“라는 재미있는 의문을 제기하는데, 여기에 답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로 이걸 구분한다. 잠재태와 현행태. 잠재적인 것과 현행적인 것. 지금 비 오고 있는데 무슨 집을 져. 쉬어야지. 근데 쉰다고 해서 목수가 아닌가. 아니다, 목수다. 지금 발휘되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은 쉬고 있지만 잠재적인 능력은 계속 존재하는 것. 잠재태. 가능태. 이걸 사람의 인식과 관련해서 보는 보면-

 

*** faculty 라틴어로 하면 facultas 파쿨타스.

 

- 우리말로 보통 능력이라고 하기도 하고 직능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

- 서양의 인식론은 보통 faculty와 관련된 faculty psychology 라는 개념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플라톤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에서 사람의 정신이라는 것이 몇 개의 faculty로 나누어져 있다고 보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의 정신 중에는 욕망을 담당하는 faculty가 있고, 이성적 능력 지적인 능력만 담당하는 faculty가 있고, 어떤 부분은 의지라는 정신의 활동을 전담하는 faculty가 있다는. 이성의 파쿨타스, 감각 또는 상상의 파쿨타스, 의지의 파쿨타스. 이런 개념.

- 플라톤의 <대화>를 보면 그것을 마차와 말의 관계로 표현한다. 말이 있는데 하나는 말을 잘 듣고 하나는 자기 멋대로 날뛰고, 후자의 말이 욕망이고.

 

- 스피노자는 이 파쿨타스라는 개념을 굉장히 싫어한다. 2부에서 보게 되겠지만 우리의 정신이 몇 개의 파쿨타스로 구별되어 있다는 이 개념을 부정한다. 정신은 이런 게 아니다. 스피노자가 주석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내가 현행적 지성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어떤 잠재적 지성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작용하고 있지 않지만 지성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잠재된 게 있다고 생각해서 현행적 지성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다. 내가 볼 때 지성이라고 하는 것은 실행되고 있는 지적인 활동, 그게 바로 지성이다. 실행되지 않고 있는 지성 이런 것은 없다. 실행되지 않고 나중에 작용하려고 지금은 쉬고 있는 지성, 이런 것은 없다. 지성이라는 것은 항상 작용 중에 있고 작용 중에 있는 것이 바로 진짜 지성이다. 현행적 지성이야말로 지성 그 자체다.

 

- 존재하는 것은 항상 현실태로만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목수가 목수로 존재하려면 365일 내내 집만 져야 한다, 자고 있는게 무슨 목수냐. ”앉아있는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가 아니다“. 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이 비가 와서 쉴 때도 있지만 가지고 있는 잠재태. 가능태. potential potentia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않은 잠재적인 능력. , 능력이 때로는 actualize되지만 포텐셜 상태로 있을 때도 있다는 이야기다.

- 그러나 신의 본질 자체는 신의 포텐셜리티가 실현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게 아니라 신의 포텐셜리티는 필연적으로 actualize된다는 것이다.

- 신에게는 발휘되지 않은 여운의 능력이란 없다. 잔여를 남기지 않고 모두가 actualize. 가능태 현실태 구별을 할 수가 없는 것.

 

- 그러니까 저 앞의 활동적 본질은 풀어서 말하면, 행위로 다 표현되는 본질을 말한다.

- 저들처럼 신의 역량을 자유의지에 따라 행사되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은, 인간적인 이해방식일 뿐만 아니라, 신의 역량을 무기력 impotentia’로 이해하는 것이다.

- 신은 자신의 역량, 곧 자신의 본질을 필연적으로 행사하며 이것이 신의 본질 자체이지만, 인간의 경우는 자신의 역량을 온전히 필연적으로 행사하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의 유한성과 수동성의 존재론적 뿌리다. 따라서 신의 역량을 자유의지에 입각하여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모델에 기초하여 신을 이해하는 것(신인동형론)일 뿐만 아니라, 신이 자신의 본질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무기력한 존재자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 우리가 보통 능력이라는 말을 쓸 때 그 능력은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이해된 능력이다. 완전히 actualized 되지 않는, 무언가 잠재된 여분이 남아있는 것으로서의 능력.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역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1부 정리35 우리가 신의 권능potestas 안에 존재한다고[신의 권능에 달려 있다고] 인식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때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능력이라는 의미로 이해를 한다면, 스피노자가 여기서 이 능력이라는 말의 의미를 뒤집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능력이라는 말은 실현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고, 좀 더 잘 할 수도 있고 좀 덜 잘 할 수도 있는 것인데, 1부 정리35에서 스피노자는 (신의) 포테스타스는 그렇게 실현되고 말고 덜 되고의 여지가 없이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라며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능력, 즉 역량으로 그 뜻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이해하면 그건 필연적인 역량으로서 포텐시아라는 말과도 다르지 않다.

- 그러니까 원래 있던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스피노자가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게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능력이라고, 포텐시아라고 의미를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 스피노자 철학 자체에서 보면 포테스타스라는 말과 포텐시아라는 말은 같은 의미다. 그런데 어떤 신학자들이나 불구스들 같은 경우에는 자유의지에 따르는 능력하고 이것으로 이해를 한다는 것. 스피노자는 자유의지에 따라 실행되고 실행되지 않는 능력의 여지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포테스타스와 포텐시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유의지에 따른 능력, 무엇을 할 수 있는 권능,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둘 다 필연적인 능력으로서의 포텐시아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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