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의 비판과 많은 나라들의 분노와 자제 요청에도 불구하고 계속 팔레스타인을 공격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 이스라엘은 전쟁에 있어서 어떤 도덕적 명분도, 휴머니즘적 고려도, 국제 관계에서의 고립이나 그로인한 경제적 불이익 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전적으로 슈미트가 말했던 적과 동지 구분이라는 정치적인 논리를 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시 정권조차도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명분을, 허위로 조작해서라도, 내세웠어야 했던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이슬라엘은 오늘날 어떤 나라보다도 충실하게  슈미트의 정치 이론을 현실 정치 속에서 대변하고 있는 하다.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이 나찌의 철학자였던 슈미트의 정치사상을 실천하고 있다고 하는 일견 모순적으로만 느껴지는 가설의 근거를 우리는 그러나, 유대인 철학자로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과 베를린 자유대학의 교수이기도 했던 야콥 타우베스 Jacob Taubes 전해주는 이야기에서 발견할 있다.


야콥 타우베스에 의하면 슈미트의 정치사상은 1941/1942 뉴욕의 유대인 신학 세미나 Jewish Theological Seminar 주최한 컨퍼런스에서도, 특히 Albert Salomon 등을 통해서 미국의 보수적 유대인 학자들과 유대주의에 결정적인 흔적을 남기게 되었을 뿐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건국되던 시기 이스라엘의 헌법과 법률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야콥 타우베스는 이를 그가 1949 바부르크 장학금을 받고 히브리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겪었던 일화를 통해 전하고 있다. 개념에 관한 역사적, 철학적 논의들을 강의하기 위해 당시 그에 대해 유일하게 다루고 있었던 슈미트의 헌법론 Verfassungslehre’ 도서관에서 대출하려던 타우베스는, 당시 이스라엘 헌법 초안 작업을 하던 법무장관 Pinchas Rosen 책을 빌려보고 있었다는 알게된다. 이스라엘 국가의 헌법은 슈미트의 <헌법론> 기초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Jacob Taubes : Ad Carl Schmitt. Gegenstrebige Fügung, 1987 Berlin, S.19, Jacob Taubes : Die politische Theologie des Paulus, 1993 München, S.134.)

 

슈미트의 <헌법론>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이스라엘 헌법에 반영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이 자신의 정치적 들을 대하는 태도와 정책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지는 당연하게도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과제다. 하지만 오늘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이 어떤 식으로든 정말 슈미트의 주권자 정치적인 논리를 따르고 있다면, 거기에 대한 우리의, 대부분 휴머니즘적, 윤리적 관점에서의 비판은 실질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정치를 도덕적 요구들로부터 자율화시키고, 주권자적 결정과 의지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독립시키려는 것은 슈미트 정치 사상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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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의한 식민지와 외재적이고 강제적인 근대화의 과정을 통해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자신이 살던 집들은 정체불명의 양철지붕으로 대체되어야 했으며, 어린 시절을 뛰놀던 거리와 마을은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도로로, 공장부지로 사라져버리는 운명을 맞았다. 장터는 시장으로 바뀌고, 학교 건물은 일시에 일본 식의 조잡한 군대식 건물로 변해버리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시켜 줄 기억의 물질적 대상들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현재 한국의 오십, 육십 대 세대들이 체험해야 했던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이후 한국 사회의 특징적 문화를 낳는 원인이 되었다. 그 중 하나가 혈연과 지연을 강조하는 지역주의이다.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물질적 대상들로 인해 그에대한 기억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제 그를 기억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신의 기억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보장해 줄 물질적 대상들을 상실한 사람들은, 이제 그 물질적 환경에 대한 기억을 갖고있는 사람들과 스스로를 결속시킴으로써 상실의 위기에 처한, 혼란에 빠진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원하고자 했다. 근대화의 1세대인 우리 아버지 세대가 겪은 정체성의 혼란은 그들로 하여금 공통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그룹들, 곧 학연, 지연, 지역적 공동체 주의와의 결속을 강화시켰다. 그들은 같은 학교를 다녔거나, 같은 동네나 지역 출신이라는 명목으로, 곧 지금은 변해버리고 사라졌지만 공동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인해, 개인들의 혼란스런 정체성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대안으로 나서게 되었다.  

한 사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집합적 기억은 다른한편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한국의 집합적 기억은 오랜 동안의 반공주의와 정치적 억압에 의해 심각하게 영향을 받았다.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곧 다른 한편 기억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망각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 사회의 집합적 기억은 이러한 선별적 기억과 그를통한 의도적 망각의 과정을 동시에 포함한다.

한국 현대사에 등장했던 정치권력들은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의 집합적 기억에(그와 동시에 망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개입을 추구해왔고, 이를통해 한국 근대사의 많은 과거들은 정치적, 의도적으로 망각되었다. 여기엔 반공적 정권하에서 망각을 강요받은 기억들 - 그를 기억하려는 사람은 투옥되거나 사형당했다 - 과 정치적 억압 속에서 망각되어버린 기억들. 일제 식민지 지배와 관련되었던 친일파들에 대한 망각된 기억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으로 형성된 집합적 기억 속에는 북한 '공산 괴뢰정권'에 의해 자행된 전쟁의 참혹상과 경쾌한 근대화의 박동, 우호적인 미국의 협조와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 이를 위협하는 빨갱이 등의 그림이 깊게 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처럼 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만들어지고 폭력적으로 관리, 유지되어온 한국 사회의 집합적 기억이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시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도 이후였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듣고, 교육받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소위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저 집합적 기억이 얼마나 많은 다른 역사의 흐름들에 대한 망각과 억압, 또한 의제적인 이데올로기와 찬양과 미화로 얼룩져있었던가를 깨닫게 되었다. 이 시기로부터 이제 한국사회엔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할 '집합적 기억'을 둘러싼 싸움과 투쟁이 시작되게 된다.

집합적 기억을 둘러싼 투쟁은 우선 서로 현재와 접합점을 찾기를 원하는 과거를 재기억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의도적으로 망각 또는 간과되었던 친일파들의 행적, 한국전 당시 미군과 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 광주항쟁, 삼청교육대, 북파 공작원 등의 역사적 사실들이 재 발굴되어 우리의 집합적 기억 속에 복원되기를 요구한다. 이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예를들어 '박정희 시대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며, 이 기억을 우리의 집합적 정체성의 한 요소로 수용하려고 한다. 집합적 기억을 둘러싼 이러한 투쟁은 지금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의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를 소재로 삼은 영화, 회고록, 역사답사, 친일청산 법률안 등등)   

그리고, 종종 이 집합적 기억을 둘러싼 싸움은 그 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하는 집합적 기억이 이처럼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지배되어왔다는 사실이 의식되고 나서 사람들은 이제 사회가 제시하는 모든 종류의 집합적 기억에 대해 혐의와 의심, 비판의 눈길을 보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이데올로기화된 집합적 기억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새롭게 형성시켜 나가야 할 우리의 정체성은 그러나, 특정한 과거에 대한 복원이나 발굴 등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현재의 문제들과 끊임없이 대결하는 가운데 서서히 만들어진다. 오늘날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미국은? 한국 사회 민주화 운동과 일제 친일파 문제는? 일본에 대한 관계는? 통일은? 이전의 권력에 의해 강요되었던 집합적 기억과 정체성 속에선 명백한 해답이 제시되어 있던 이 질문들에 새롭게 해답을 찾아가고, 토론되며, 투쟁하는 가운데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은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때문에 이는 혼란스럽고 지리한 오랜 동안의 모색을 필요로하는 힘들고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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