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유년기

 

 

일곱 살의 나는 이혼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하고 있어서

아빠와 엄마 누구와 함께 살고 싶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도

딱히 동요하지 않고 답을 낼 수 있었다.

 

아빠는 그 분야에서 이름 높은 학자였고, 엄마는 자산가 집안의 딸이었다.

어느 쪽을 따라가더라도 금전적인 불편함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마음이 가는 대로 결정하면 되었기에

최종적으로 나는 엄마를 따라가기로 했다.

다만, 이것은 내가 아빠보다 엄마를 좋아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빠를 따라가면 연구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이혼의 원인은 아빠와 엄마의 대화가 엇갈려서인 모양이었다.

아빠는 연구소에 묵는 일이 허다했고,

가끔 집에 돌아올 때면 엄마에게 연구 내용을 이야기했지만

엄마는 늘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빠는 자신이 이해하는 것은 상대도 이해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대화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엄마와는 일상 대화의 템포도 맞지 않아서

혼자 고민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그런 아빠였기에 나도 분명 곁에 없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니, 역시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분명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재밌게도 아빠와 엄마의 관계는 이혼한 후가 더 양호했다.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을 정도로 서로에게 애정은 확실히 있었던 모양인지

내가 어릴 적에는 최소한 한 달에 한 번,

나를 통해 부모는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분명 그 정도 거리감이 두 사람에게는 딱 적당했던 걸 테다.

나는 평온한 모습의 부모를 보며 기뻐했고,

두 분이 바라지 않았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어릴 적 기억 중에 특히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부모님이 이혼한 뒤 외가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하고

몇 개월 후에 아빠가 에어건을 사줬을 때의 일이다.

 

어느 휴일, 나는 엄마와 함께 공원에 갔다가 아빠를 만났다.

매일 함께하다가 한 달에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하게 되면

외롭지 않을까 싶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빠가 하는 일은

근무 시간도 휴일도 불규칙해서 원래부터도 그렇게

자주 얼굴을 마주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한 달에 한 번 가족끼리 외출하게 되었다고 생각해보면

반대로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을지도 몰랐다.

 

코요미.”

 

한 달 만에 아빠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함께 살고 있을 적에는 어느 정도의 빈도로 이름을 불러줬을까?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관계도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싶었다.

 

갖고 싶은 거 없니?”

 

바로 얼마 전 나는 생일을 맞이해서 여덟 살이 되었다.

그 선물을 말하는 걸 테다.

이혼 전에는 나에게 뭔가를 사주는 건 늘 엄마의 역할이었기에

아빠가 선물을 사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기뻤다.

게다가 그때 나는 때마침 갖고 싶은 물건이 있었다.

 

에어건이 갖고 싶어!”

에어건?”

. 지금 학교에서 유행하고 있어.”

. 어디에 팔고 있으려나.”

 

어느 백화점 장난감 매장에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에어건을 가지고 있는 같은 반 친구가 그곳에서 샀다고

실컷 자랑을 했기 때문이다.

그길로 백화점 장난감 매장으로 부모님을 데리고 갔고,

매장 한쪽 구석에 조금 쌓여 있던 에어건을 발견했다.

총 종류에 대해선 전혀 몰랐지만,

어쨌거나 다들 가지고 있는 물건이 갖고 싶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하나를 빼서 아빠에게 내밀었다.

 

이게 좋아!”

의외로 저렴하네, 2천 엔도 안 하는 걸 보니. 좋았어, 그럼.”

 

그러다 아빠가 말을 멈추었다.

무슨 일인가 해서 얼굴을 쳐다보자 아빠가 상자로 시선을 물끄러미

떨어뜨리고 있었다.

 

대상 연령, 10세 이상인가.”

 

맙소사.

당시의 나는 이제 막 여덟 살이 된 참이었다.

물론 에어건을 자랑한 같은 반 친구도

다들 여덟 살이거나 일곱 살이었지만,

세세한 것은 따지지 않는 부모가 꽤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아빠가 어떤 타입의 부모인지 잘 몰랐다.

참고로 엄마는 세세하게 신경을 쓰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빠가 사주는 선물이니 엄마는 관계가 없지 않을까――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마는 게 아이다운 발상이다.

 

만약 아빠가 대상 연령을 이유로 안 된다고 한다면

같은 반 친구들은 다들 가지고 있다는 것,

여덟 살이든 열 살이든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절대로 위험하게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 등……

다양한 말로 아빠를 설득시킬 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기우였다.

 

뭐어, 여덟 살도 열 살이랑 크게 다를 건 없지.”

속으로 승리 포즈를 취했다.

아빠는 자잘한 것은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었나 보다.

아빠의 말을 듣고 역시 엄마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아마도 막 이혼한 참이라서

마음 한구석으로 나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결국 대상 연령에 대해서 잔소리를 듣지 않고

약간 고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에어건을 감쪽같이 손에 넣었다.

다시 공원으로 되돌아가서 에어건으로 얼른 잠시 놀았다.

이윽고 배가 고파서 식사를 함께 하고

다시 한 달 후에 만날 약속을 한 다음 아빠와 헤어져

엄마와 둘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 커다란 골든 리트리버가 장난을 걸었다.

 

다녀왔어, 유노.”

꼬리를 흔드는 유노의 귀 뒤편을 쓰다듬어줬다.

유노는 그렇게 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유노는 내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가 기르기 시작한 개로

가끔 외가에 올 때면 늘 함께 놀았다.

그게 지금은 매일 함께였다.

외할아버지 댁에 살게 되고 나서 기뻤던 일들 중의 하나가 이거였다.

 

이거 선물 받았어. 부럽지?”

유노에게 에어건을 보여주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노.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봤던 빵 하면 죽은 척하는 재주를

유노도 부릴 수 있을까?

 

유노한테 쏘면 안 돼.”

내 생각이 전해졌는지 뒤에서 조금 날카로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에, 하고 얌전하게 대답했다.

사람한테 쏘면 안 된다는 소리를 돌아오는 길에 실컷 들은 후였다.

잔소리 참 많네, 다 안다고요.

유노를 한참 쓰다듬어주고 나서 손을 씻고 집에 들어와

거실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에게 씩씩하게 인사를 했다.

 

다녀왔습니다, 할아버지!”

오오, 다녀왔니? 코요미, 재밌었니?”

 

할아버지가 온화한 웃음으로 나를 맞이해주었다.

말수는 적지만 늘 달콤한 사탕을 주는 자상한 할아버지다.

 

. 할아버지, 사탕 줘.”

오늘은 이미 먹었잖아. 하루에 한 개씩이야.”

 

다만 사탕을 하루에 하나밖에 절대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치사하다.

나는 그 사탕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많이 먹고 싶은데,

할아버지는 내 손이 닿지 않는 옷장 가장 위 서랍에 넣어 놓고

마음대로 꺼내 먹지 못하도록 했다.

사탕 하나라 해도 많이 먹는 건 좋지 않으니까라며 하루에

하나밖에 주지 않는다.

그 엄격함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는

아빠가 사준 에어건을 아무 생각 없이 할아버지에게 자랑하고 말았다.

 

됐어. 그것보다 할아버지, 이것 봐!”

오오, 에어건이구나. 사내아이라면 역시 갖고 싶은 법이지.

할아버지도 어릴 적에…….”

 

온화하게 미소 짓던 할아버지의 눈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코요미, 그거 잠시 보여주렴.”

? …….”

 

심상치 않은 할아버지의 분위기에 에어건을 얌전히 상자째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든 할아버지는 박스 일부를 가리키며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령 대상이 10세 이상이라고 돼 있잖니. 너한텐 아직 일러.”

 

그렇게 말하고 할아버지는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그길로 내 에어건은 돌아오지 않았다. 버렸다고 나는 생각했다.

큰 소리로 울고서 그날부터 할아버지를 제일 미워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도 나를 싫어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만큼 날 위로해준 자상한 할머니를 따르게 되었고,

할아버지와는 그다지 말을 섞지 않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할아버지 나름대로 날 좋아해줬다고 깨달은 건,

그로부터 2년 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이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한 가지 수수께끼를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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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에는 공교롭게도 아침부터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에게는 그 사실을 숨기고 약과 지갑만 챙겨서 집을 나섰다.

 

잠시 나갔다 올게.”

. 조심해서 다녀와.”

 

역시 오랜 세월을 함께한 만큼 아내에게는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왔기 때문인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보내주었다.

817, 오전 9시 반. 쇼와 거리 교차로로 향했다.

더 이상 걷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에 늘 신세를 지는 전동 휠체어에 앉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시속 10킬로미터 이상 속도도 거뜬히 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새삼스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옛날에는 자신의 다리로 활보했던 거리를 바라보며

시속 4킬로미터로 천천히 나아갔다.

 

어째서인지 묘하게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옛날에는 저런 건물이 없었지, 그 오브제는 언제 철거된 걸까,

이 가게는 어째서 망하지 않는 걸까…….

동네 한 군데 한 군데에 추억을 되새기며 그 광경을 눈에 각인시켰다.

분명 더 이상 이렇게 외출할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너무 꾸물댔나 보다.

10분 전에는 도착할 생각이었는데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가 되어 있었다.

 

쇼와 거리 교차로.

이 지방 도시의 중심지를 사등분하는 가장 큰 교차로다.

당연히 교통량도 많아서 신호는 보행자 차량 분리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옛날에는 모든 도로에 걸쳐져 있던 거대한 육교가 있었다고 하는데,

다리 기둥 때문에 시야가 가리는 탓에 위험하여 철거했다고 한다.

나는 오랜 사진에서 본 그 육교를 너무 좋아해서 자주 멈춰서는

위를 올려다보고 육교를 건너는 자신을 상상하곤 했다.

그런 추억이 담긴 교차로였지만.

도착해서도 역시 약속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오늘 오전 10.

쇼와 거리 교차로.

어느새 자신의 단말기에 입력되어 있던 의문의 스케줄.

어쩌면 자신이 입력하고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실제로 그때가 되면 떠오르지 않을까 하고

얕은 기대감을 안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나 보다.

 

교차로 남서쪽 모퉁이 옆,

공원이라고 부를 만큼 그리 넓지 않은 일대에 아담한 나무가 심겨져 있고,

그곳에 레오타드 소녀가 있다.

수줍어하듯이 손으로 가슴을 가린 육감적인 소녀의 동상으로

내가 태어났을 적부터 쭉 있었던 것이다.

익숙하긴 하지만 모델이 누구인지,

어떤 의미가 있어서 이곳에 세워져 있는지 등은 전혀 모른다.

약속 장소는 이곳일 테지만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 말고

나를 기다리는 듯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휠체어를 멈추고 멍하니 그 동상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왠지 주변의 이목이 신경 쓰여서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보행자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들도 이제 그곳에 없었다.

대신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지방 도시다보니 텔레비전에서 보는 도회지의 교차로에 비하면 훨씬 작다.

아무 생각 없이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의 대부분이 다 건넜는데도 신호는 아직 깜박이지 않았다.

보행자 신호로 더디게 바뀌는 만큼 보행자가 길을 건너는 시간이 긴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단 한 사람, 횡단보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여자가 있었다.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이쪽으로 다 건널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도,

이쪽으로 오지도 않고 저쪽으로 달려가지도 않은 채 단지 그 자리에 서 있다.

아무리 보행자가 건너는 시간이 길다고는 해도 그런 곳에 계속 서 있으면 위험하다.

휠체어를 움직인 나는 횡단보도로 다가가 그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그런 곳에서 뭐 하니? 위험하단다.”

 

내 말에 여자아이가 돌아보았다.

중학생쯤 되었을까?

하얀 원피스를 입은, 길게 뻗은 생머리가 아름다운 예쁘장한 아이였다.

아이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고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리러 와준 거야?”

 

데리러 왔다는 말은 조금 과장스러웠지만, 행위로서는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 신호가 깜박이기 시작했기에 아이에게 맞춰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데리러 왔단다. 그러니 이리 오렴, 같이 가자.”

 

그렇게 말하고 손을 뻗자 소녀는 기쁜 듯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손을 뻗은 채 나는 굳어졌다.

이윽고 신호가 바뀌고 차가 눈앞을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선 휠체어를 뒤로 돌려서 동상 앞까지 돌아왔다.

다시 횡단보도를 쳐다봤지만 역시나 어디에도 소녀의 모습은 없었다.

눈앞에 있던 소녀가 갑자기 사라졌다.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은 있지만,

오랜만이다 보니 역시 한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말았다.

요컨대 나는 지금 패러렐 시프트한 평행세계로 건너간 게 아닐까.

패러렐 시프트란 같은 시간 어딘가의 평행세계에 있는 자신과

의식만 교체되는 현상이다.

장소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이 세계의 나도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비교적 가까운 세계일 테지만,

소녀가 두세 번째 정도 옆 세계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마도 열 번 정도는 시프트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건너간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렇다면 최악의 가능성으로 제로 세계에서는

소녀가 그대로 차에 치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직 IP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말은 아침에 일어났을 시점에 이미 나는 어딘가의 다른 세계에 있었고,

지금 제로 세계로 돌아왔을 가능성도 있다.

IP를 확인하기 위해서 손목에 찬 단말기에서

음성조작으로 IEPP 화면을 불러내 여섯 자리의 디지털 숫자를 켰다.

이 수치가 0이라면 이곳은 제로 세계지만.

하지만 그 화면에는 숫자가 아니라 [ERROR]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망가졌나……?”

 

무슨 일이지. 이래서는 자신이 지금 어느 세계에 있는지 알 수 없지 않은가.

만약 자신이 지금 제로 세계에 있고 횡단보도에 소녀가 있었던 것이

어딘가의 평행세계라고 한다면 그건 이미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만약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이 평행세계고

횡단보도에 소녀가 있던 곳이 제로 세계라면…… 몹시 걱정이 되었다.

제로 세계에 간 이 세계의 나는 그 아이를 제대로 구했으려나?

어떻게든 지금 바로 이곳이 어느 세계인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을까.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려고 하다가 타인의 IP를 보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관공서에 가면 대체 단말기를 구할 수 있지만,

몇 가지 심사가 필요해서 바로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뭔가…… 하고 생각하던 중에.

문득 생각났다. 자신이 지금 어느 세계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그게 당연하지 않았던가.

어느 한 과학자에 의해 평행세계의 존재가 증명되어

사실 인간은 아무 자각 없이 일상적으로 평행세계를 이동하고 있다고

판명된 지 수십 년이 지났다.

지금은 초등학교에서도 가르칠 만큼 일반 상식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평행세계라는 개념은 픽션 속에서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무렵으로 돌아간 것뿐이지 않은가.

그때. 평행세계라는 것은 너무나도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다.

내가 처음으로 평행세계를 의식한 것은 때마침 10살이 되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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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아이는 오늘 같은 반 남학생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던 것이다.

초등학생에게는 아직 조금 이른 감도 있지만,

물론 그 눈물을 무시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귀여운 손녀가 눈물을 흘린 이유가

그런 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백…… 안 할 걸 그랬어……!”

 

내가 보기엔 귀여운 이유라도,

본인은 지금 세상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슬퍼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그 슬픔을 위로해줘야겠다 싶어서

아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아이, IP를 보여주렴.”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손목에 감긴 웨어러블 단말기를 가리켰다.

아이는 새빨갛게 부은 눈으로 의아한 듯이 나를 쳐다보고 단말기를 조작했다.

홀로그램으로 확대 표시된 모니터 안에는

IEPP라는 글자 아래에 여섯 자리의 디지털 숫자가 표시되어 있다.

정수가 세 자리, 점을 사이에 두고 소수가 세 자리.

소수 세 자리는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속도로 어지럽게 변해갔지만,

정수 세 자리는 또렷한 숫자를 표시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 숫자가 [000]이었다.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이다.

그렇다면 기본적인 것은 이미 배웠을 터이다.

 

아이. 아이는 조금 전에 고백 안 할 걸 그랬다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이가 용기를 내 고백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

평행세계에 대해선 학교에서 이미 배웠지?”

.”

아이는 말이지, 고백을 함으로써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낳았단다.

 제로 세계의 아이는 차였지만, 다른 세계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랑

분명 맺어졌을 거야.”

……다른 세계의 내가 맺어졌더라도 이 세계의 내가 차이면

아무 소용도 없잖아.”

그렇지 않아. 어떤 세계의 아이도 같은 아이야.

아이는 23의 세계로 이동한 적 있지?”

몇 번인가 있어.”

그 세계에 있던 할아버지는 미웠어?”

안 그랬어!”

고마워. 할아버지도 다른 세계에서 온 아이도 마찬가지로 좋아한단다.”

…….”

평행세계는 이 세계에서는 실현되지 못한 가능성의 세계야.

 그러니 아이의 용기는 반드시 어딘가의 세계에서 보답받고 있을 거야.

다른 세계에서 맺어진 아이도 같은 아이야.

그건 즉, 아이의 고백이 쓸모없는 게 아니라는 뜻이지.”

……이해 못 하겠어.”

 

역시 아직 초등학교 5학년에게는 일렀던 걸까.

그렇지 않아도 평행세계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도 젊었을 적에는 그 화제로 무척이나 고민한 적이 있다.

다만, 잘 모르겠다며 입술을 뾰로통하니 내민 귀여운 손녀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슬픔을 달래다니,

정말이지 어른들이나 쓸 법한 고지식한 수단이지만 말이다.

 

그럼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볼까.

아이는 차였지만, 그 덕분에 다음엔 온 세상의

누구와도 맺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손에 넣었단다.

아이는 분명 더 멋진 남자아이를 만날 거야.

그렇게 해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거지.”

더라니, 어느 정도?”

글쎄…… 할아버지 정도?”

안 돼! 더 젊은 사람이 좋아.”

 

손녀에게 차였다. 은근히 충격이었다.

하지만 우선 기운은 차린 것 같다.

이 빠른 회복력도 젊기 때문일까,

아니면 혼자 남게 되면 다시 울기 시작하려나.

방을 나가는 아이의 등을 배웅하고 다시 침대에 몸을 파묻고 불을 껐다.

그리고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어쩌면 앞으로 아이가 아침에 눈을 떴더니

오늘의 고백이 이루어진 평행세계로 이동해서

한때의 행복에 얼떨떨해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역시 맺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 제로 세계의 아이를 대신해서

그 세계에서 찾아온 아이에게 물어보자.

그쪽 세계의 나는 고백에 성공한 너를 어떤 말로 축복했느냐고.

분명 그것은 지금 내가 상상하는 말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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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혹은 종장

 

 

재택 임종이라는 말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암에 걸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가 병원의 치료나

호스피스의 돌봄을 거부하고 익숙한 자신의 집에서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

그 선택지가 같이 살던 아들 내외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나는 행복했다.

아들 부부나 손녀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참기 힘들었지만,

그 이상으로 모두가 나와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지내고 싶어 한다고,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항암제는 사용하지 않을 것, 연명치료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두 가지 조건하에 나는 재택 임종을 선택했다.

 

일흔셋. 어쩌면 죽기에는 아직 조금 이를지도 모르지만,

신기하게도 공포심이나 불만은 없었다.

큼직한 집에서 사랑하는 아내, 믿음직한 아들, 상냥한 며느리,

귀여운 손녀에게 둘러싸여 보내는 노후.

설령 내일, 괴로움 속에서 이 심장이 고동을 멈춘다 하더라도 곁에

가족이 있어준다면 웃으며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한 인생이었다.

다만 나는 지금부터 사흘 동안만큼은 절대로 죽을 수가 없다.

 

왼쪽 손목에 감긴 웨어러블 단말기에 사흘 후 날짜를 음성으로 입력하자

캘린더 기능에 기록된 ‘817, 오전 10, 쇼와 거리 교차로, 레오타드 소녀

라는 스케줄이 불려나왔다.

 

쇼와 거리 교차로라고 하면 우리 집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이 동네에서 제일 큰 교차로다.

레오타드 소녀라는 것은 그 옆에 세워진 동상 이름이었다.

사흘 후 오전 10시 쇼와 거리 교차로, 레오타드 소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스케줄에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내가 사용하는 단말기는 월말이 되면 다음 달에 입력된 스케줄을

자동적으로 통지해준다. 그 기능으로 이 스케줄을 알게 되었지만,

과연 이건 누구와 한 약속일까? 나는 언제 이 약속을 입력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한테 그 기억은 없었다.

그렇다면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내 단말기에 몰래 스케줄을 입력한 걸까?

단말기는 성문 인증을 하기 때문에 타인은 조작할 수 없을 테지만,

무슨 일에든 숨겨진 테크닉이라는 게 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물어봤지만, 역시 아무도 짚이는 구석이 없다고 했다.

손녀는 할아버지가 입력해놓고 잊어버린 거 아니야?”라고 얄미운 소리를 했다.

역시 그렇게까지 늙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이 나한테 이런 거짓말을 할 이유 또한 생각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아니, 어쩌면 정말로 내가 입력해놓고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뭐어, 누가 입력했든 상관없다.

사흘 후 오전 10. 쇼와 거리 교차로에 가보면 알게 되겠지.

그곳에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 그게 지금 내가 제일 기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사흘간은 절대로 죽을 수가 없다.

 

머리맡의 불을 끄고 슬슬 자려고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잠에서 깨면 앞으로 남은 시간은 이틀.

다행히도 요즘 들어 몸 상태가 상당히 양호해서

이틀 후에 잠시 외출하는 것 정도라면 아무 문제도 없으리라고 낙관하고 있다.

교차로까지 나들이를 나가는 것은 오랜만이다.

나이답지 않게 들떠 좋은 꿈을 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노크 소리에 바로 눈을 떴다.

 

들어오렴. 문 열려 있어.”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전등만 켜서 방문자를 들였다.

머뭇거리며 얼굴을 내민 것은 초등학교 5학년인 손녀, 아이[]였다.

 

할아버지, 자고 있었어?”

슬슬 잘까 싶었지. 괜찮아.”

몸은 어때?”

나쁘진 않아.”

이야기 잠시 할 수 있어?”

물론이지. 들어오렴.”

 

뒷짐을 지고 문을 조용히 닫은 아이는 뭘 그리 망설이는지

좀처럼 용건을 꺼내지 못했다. 아무래도 수상쩍다.

아이는 평소 이렇게 얌전한 성격이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이라면 똑 부러지게 하는 타입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그러니? 뭐든지 말해보렴.”

 

몸을 일으켜서 되도록 자상하게 말을 걸었다.

설령 가족일지라도 아무래도 동성에게는 엄격하고

이성에게는 부드러워지기 마련인지,

손녀는 엄격한 할머니보다도 자상한 할아버지 쪽을 따른다.

물론 할머니도 아이를 몹시 사랑하고 있지만

때론 엄하게 매를 들어주기에 나는 마음 놓고 사탕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가까이 다가와서

내 품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평소엔 하교하면 제일 먼저 내 방에 와서

다녀왔다고 말해주던 아이가 오늘은 오지 않았다.

학교에서 무슨 말썽이라도 있었던 걸까?

하지만 억지로 물으려 하지 않고 아이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잠시 울고 있던 아이가 훌쩍이면서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띄엄띄엄 나온 그 말을 주워 연결해보니,

아무래도 그 정도 걱정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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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래비 2017-11-19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잼있다 키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