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고대 - 아시아연대총서 5
이성시 지음, 박경희 옮김 / 삼인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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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상의 공동체, 상상의 고대사

저자의 주장은 머리말과 1부의 첫 논문 <고대사에 나타난 국민국가 이야기>에 함축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동아시아 고대사인식은 근대 국민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욕망의 투사물이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동아시아의 근대 국민국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고대사를 바라보고 서술해왔다고 할 수 있다.

에릭 홉스봄이 <만들어진 전통(The Invention of Tradition)>에서 지적하듯이 옛부터 내려져온 것이라고 믿고 있던 전통과 의식들은 사실 근대 국민국가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창조된 것에 불과하다. 이 같은 논의를 따른다면 고대사 역시 근대 국민국가의 욕망이 투영되었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실제로 古代史라는 개념 자체가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로 나누는 근대적 역사관에서 나온 것이다.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그들이 극복해야 할 어제의 미신과 악습을 중세 봉건시대의 것으로 대상화 시켰으며, 새로이 구축해야 할 세계의 모습으로 중세 이전의 시대, 즉 고대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중세의 마지막 시기, 즉 르네상스(Renaissance)가 ‘부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맑스가 공화주의자들의 습속에서 발견했듯이 “루터는 사도 바울로 분장하였으며, 프랑스 혁명은 로마 공화국과 제국의 장식을 번갈아가며 몸에 걸쳤다(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그리고 그들에게 소환된 바울과 로마는 실제 그 당시의 모습과는 상관없는 근대의 시선으로 재해석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고대‘사’는 누가 어떻게 왜 만들어 냈을까. 저자인 이성시는 <만들어진 고대>를 통해 그 질문에 차분하게 답하고 있다. 저자의 답을 따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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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베네딕트 엔더슨의 저작 "상상의 공동체"표지)

일 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20세기 초까지의 현실(청일전쟁, 러일전쟁)과 욕망(정한론, 제국주의)에 동아시아의 고대사를 투영시키며 하나의 거대 서사를 만들어갔다. 그에 비해 한국의 고대사 서술은 그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성립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즉 한국의 역사 연구는 일본을 의식하고 전재로 하며 형성되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고대사 연구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흥미롭게도 일본 연구의 청중은 서양인들이었다. 일본사, 일본연구는 우선 서양을 모델로 자신들을 가공하여 그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결국 일본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과의 관계에서 고려되고 실체화된 것이다(p.8). 문제는 이렇게 가공된 고대사는 결국 서로에 대한 상호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저자는 고대사에 투영된 국민국가의 욕망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이를 해체시켜 놓는다. <고대사에 나타난 국민국가 이야기>가 원론에 해당된다면 그 이후의 논문들은 같은 문제의식으로 파해쳐본 동아시아 고대사의 모습을 다룬 각론이다. 트릭은 모두 파악되었다. 국민국가의 거푸집 속에서 창출된 상상의 공동체인 내셔널 히스토리의 정체가 드러났다. 이제 범죄의 재구성만이 남았을 뿐이다.


2. 광개토왕비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1 부에 실린 <표상으로서의 광개토왕비문>은 대단히 흥미로우며 논쟁적이다. 1000년이 넘도록 발견되지 못하고 방치되어온 광개토왕비문은 발견되자마자 근대로 소환되었다. 고구려의 텍스트가 근대적으로 전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성시는 오늘날 광개토대왕비라는 텍스트가 어떻게 전유되고 있는지를 밝히고 1000년전 광개토대왕비가 어떤 형태로 만들어진 텍스트였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좀 더 살펴보자. 실제로 광개토대왕비는 역사적 기록을 위해 만들어진 비석이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광개토 대왕비는 고구려의 지배귀족들이 수묘인(왕릉 주변에 살면서 관리 일을 하는 사람들)들을 함부로 데려가 매매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비는 지금 비석 주위에 살고 있는 수묘인들이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를 밝히기 위해 광개토대왕의 관련된 무훈을 중심으로 서술된 것이다. 즉 특정 지역의 노예들을 어디서 데려온 것인지 설명하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광개토대왕의 무훈은 얼마든지 극적 효과를 위해 과장될 수 있으며, 민족의식 같은 것은 생기지도 않았으므로 신라를 東夷라 낮추고 왜를 동이(신라)의 속민을 괴롭히는 트릭스터(trickster)로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개토대왕비가 원래 어떤 의도로 만들어진 텍스트였는지는 내셔널 히스토리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광개토대왕비가 가지는 풍부하고 다채로운 모습들은 거세되고 오로지 이것이 현존하는 동아시아의 정치질서에맞추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즉 광개토대왕비를 둘러싼 무수한 논란과 연구는 1775 글자 중에 32자에 맞추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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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이성시의 대답은 광개토대왕비로 우리가 궁금해 하는 당시의 동아시아 질서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소 허무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기실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지배층 내부를 향한 텍스트였기에 우리가 이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임나일본부의 실제가 아닌 귀족연합정권이었던 고구려 지배층의 복잡한 속내일 것이다.

이 같은 저자의 시각은 기존의 광개토대왕비를 둘러싼 논쟁은 물론, 여타의 동아시아 고대사논쟁을 획기적으로 전환시키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주류 사학계에서는 이성시의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쉽게도 나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한 주류 국사학계의 내실 있는 비판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는 이성시 뿐만 아니라 2000년대 이후 민족주의와 관련한 논쟁에서 반복되는 패턴이다. 민족주의의 허구를 지적하며 제기된 비판에 민족주의자들의 비판은 민족의 실제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민족은 실천적으로 유효한 가치, 라는 소극적 자기변명에 그칠 뿐이다.


3. 발해는 누구의 나라인가

뒤이어 2부에서는 발해사를 중심으로 근대 국민국가의 열망이 어떻게 역사연구에 투영되어있는지를 예리하게 보여주고 있다. 러일전쟁이후 만주에 일본은 만주에 주목하게 된다. 일본의 관심은 만주국을 건설하면서 이 지역의 독립국가였던 발해에 눈을 돌려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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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해에 대한 관심은 순수하게 학문적인 것이 아니었다. 발해를 둘러싼 국민국가들은 저마다의 국사에 발해를 끼워맞추기 시작했다. 일본은 만주국으로, 구소련은 스탈린주의 민족론에, 중국은 자신들의 지방정권으로, 한국은 신라와 동족의식을 가진 북조로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발해라는 고대국가의 독자적 성격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저자는 당시 발해의 민족성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즉 근대적 개념인 민족을 고대로 투여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발해는 고구려 귀족들로 이루어진 지배층와 말갈인 피지배층으로 이루어진 이원화된 사회가 아니라 만주-연해주 지역에서 다양한 부족들이 서로 연합한 국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발해를 남북국으로 묶어서 이야기 하기 위해 굳이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를 단순한 지배 피지배의 관계로 서술하는 종래의 내셔널 히스토리의 서사에는 근원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4. 일본사의 확장 : 동아시아 세계론

3 부 이하의 글들은 모두 일본의 고대사 서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그중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에서는 일본의 사학자인 니시지마 사다오가 제창한 동아시아 문화권을 해부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일본사학계는 한자를 매개로 중국으로부터 유교, 율령, 漢譯佛敎를 수용한 지역을 동아시아 문화권이라고 불러왔다. 중국을 포함한 한반도, 일본열도, 인도차이나 반도의 베트남 지역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동아시아 문화권을 검토하면서 각 지역이 중국의 한자와 그에 기반한 율령, 불교등이 어떻게 수용되어갔는지를 추적하여 이를 비판한다. 우선 한자는 중국의 것 그대로 수용된 것이 아니었다. 요컨대 신라의 경우 고구려와의 관계를 통해 한자를 수용했다. 즉 중국과의 정치적 관계에 따른 것이 아니었으며 실제로 중국과 교류하게 되는 것도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매우 늦었다. 한자의 용법도 일본처럼 훈독(訓讀)등을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한반도에서는 고려시대까지 훈독법이 사용되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중국의 동북지방인 거란과 여진에서도 훈독을 했음이 밝혀졌다고 한다. 동아시아의 각나라들에게 한자는 ‘그다지 연속성이 없었던 중국과의 외교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변나라들과의 끊임없는 중층적 교류’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거란이나 티벳등에서한자의 전면수용을 포기하고 독자적인 문자를 개발한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중국문화의 수용은 상당히 유동적인 것이었다.

또한 니시지마의 동아시아 세계론에서는 한자, 유교, 불교, 율령등 중국문화가 주변국으로 파급되는데에 중국의 조공-책봉체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파악한다. 그러나 실제로 고대국가들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에 편입되었다기 보다는 각 지역의 소체계를 중심으로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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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일본의 불교와 율령체제를 확립시켰다고 여겨지는 쇼토쿠 태자)

동 아시아 세계론은 일본사 연구 속에서 동아시아를 세계사속의 일관된 흐름으로 파악하고 일본사를 그 안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즉 이는 근대 국가인 일본의 역사적 형성을 추적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지 동아시아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탐구과정은 아니었다. 일본을 제외한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서 동아시아 세계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이는 대동아공영권의 의심이 묻어나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연장으로 읽히는 것이다.


5. 누구를 위한 고대사인가

고대사에 대한 저자의 관점은 내셔널 히스토리에 대한 일관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와 그로 인한 역사인식의 왜곡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에 실린 저자의 논문 <조선왕조의 상징공간과 박물관>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다시 정리하자면 근대 국가라는 프리즘을 통해 왜곡된 역사인식을 걷어내고 그 다채로운 결들을 새로이 주목하자는 것이다. 물론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9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제기 되어왔다. 그러나 이성시의 작업을 주목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의 주된 작업이 고대사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게의 민족주의 비판은 근대 형성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이성시는 고대사에 대한 비판적 서술을 통해 비판적 역사인식의 확장을 가능케 하고 있다.

이성시의 비판적 고대사 읽기는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키스 젠킨스(Keith Jenkins)의 도발적 문제제기를 떠오르게 한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누군가에 필요에 의해 구성된 역사담론에 불과하다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 할 수 있다. 난 여기서 역사적 사실의 존재 유무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역사담론 비판에 치중한 나머지 대안적 역사서술에 대한 가능성마저 차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따르면 이성시의 고대사 연구 또한 대안적 고대사 서술이 아닌 이성시의 내면독백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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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영국의 포스트모던 역사학자 키스 젠킨스)

근 대의 산물인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 근대에 대한 전면 부정으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실제로 이성시의 역사서술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근대적’, '합리적' 정합성에 기초하고 있다. 역사에 문학적 상상력을 강조했던 것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었다. 나는 이 점에서 포스트모던 역사학이 민족주의라는 프리즘을 걷어 낼 수 있는지에 대해 의심스럽다. 몇 해전 크게 논란이 되었던 일본 ‘새역모’의 교과서가 극우 민족주의의 틀은 유지한 채 포스트모더니즘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것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새역모의 교과서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비판해온 민족주의에 기반해 있으므로 그들이 만든 교과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다, 라는 선언적 수사로 그칠 문제가 아니다. 역사학이 객관적 사실을 거부하는 순간 상상과 선동의 나래로 빠져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이 정치적 아지테이션으로 전락하는 것을 우려한다면 그것이 내셔널 히스토리든, 포스트 모더니즘이든 경계할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와 그것이 만들어낸 내셔널 히스토리를 비판하는 작업이 굳이 포스트 모더니즘을 전면적으로 수용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담담하면서도 예리한 문체, 풍부한 논거를 제시하는 이성시의 연구를 주목할 수 밖에 없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P.S:  이 책은 원래 일본어로 쓰여진 저자의 논문을 모은 것이다. 역자의 번역은 대단히 깔끔하고 매끄럽다. 역자에 대한 표기가 없었다면 번역본이라는 것을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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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을 위한 변론
리처드 에번스 지음, 이영석 옮김 / 소나무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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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에 출처가 불확실한(?) 돈을 받고 그 돈으로 몽창 역사학 관련 책들로 써버린 적이 있다. 덕분에 <치즈와 구더기>와 같은 명작들을 읽으며 그 해 가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들중에 아직도 읽겠다고 작심만 하고 다 읽기 못한 책들이 산적해 있는데. 에반스의 책이 그중 하나였다.(아직 <고양이 대학살>도 다 못보고 있단 말이지...)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제목이 잘 나타내주듯 일군의 포스트모던 역사학에 대한 저자의 반론이라고 할수 있다. 에반스는 엘튼과 에드워드 카로 대표되는 기존의 역사이론과 포스트모더니즘 양측을 공략하고 있지만 역자의 지적대로 그 무게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무게가 쏠리고 있다.

학부 1학년 때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마치 종교경전을 읽은 것처럼 하나의 답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면, 그 뒤 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를 읽을 때는 머릿속이 어지러워 미칠 것 만 같았다.(이 두 책은 역사학 전공자라면 반드시 정돗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에반스의 책은... 지금은 더 혼란 스럽다.

재밌게도 이 세 사람은 모두 영국 사람이고 이 책들은 모두 영국 사학계를 배경으로 삼곡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첨엔 누가 누군지 모르는 인간들도, 계속 읽으니 아는 양반들도 나와서 해매는 게 좀 덜하니 좋긴 하다. 이젠 국내 저작도 좀 봐야 하는건데... 쩝.

여하간 이 두 책을 읽고 고민을 해본 사람이라면 에반스의 책은 열독할 가치가 있다. 다만 위 두 책을 먼저 읽지 않았다면, 먼저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래도 누군가의 학설에 대한 비판의 논조가 강한 책일수록 상대측의 논지를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공격은 신랄하고 통쾌하지만 아쉬운 부분이 많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을 비판하는 기존 사학계의 논지가 자꾸 역사학에 대한 변명조로 흐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역사학의 해체를 외치는 것은 근대성이 가져다 주는 사회적 페혜에 대한 지적이라면, 이들의 반발은 역사학이라는 분과학문의 수호의 경향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솔직히 이는 밥그릇싸움이 아닐까 하는 인상이 짙다. 그러고 보면 위 책에서 예를 든 대부분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대학에서 역사학 전공 교수가 아닌 것도 흥미롭다.(이해는 충분히 되는데, 역사학이 해체되면 이들은 뭐 먹고 살것인가! 뭐 나야 상관 없지만~)

포스트모더니즘, 그것도 포스트모던 역사학에 대한 체계적인 반론은 찾기 힘들다. 때문에 이 책이 더욱 그 값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사학전공자들은  의외로 역사이론에 대해서 무지한 감이 있다. 17세기 도자기제작 양식을 연구하는 것도 좋은데, 연구의 방법론과 스스로의 작업에 대한 철학적 고민은 반드시 숙지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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