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족사회는 유동적 사회에 존재한 중요한 측면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억압해도 회귀합니다. 그것은 국가사회나 자본주의사회 안에서도 회귀합니다. 사람들이 잊으려고 하고, 또 실제로 잊어도 그것은 인간의 의지에 반(反)하여 되돌아옵니다. (76)
미소의 냉전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 노마돌로지는 이 냉전구조를 해체하는 탈영역적 탈구축적인 원리로 주목을 끌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이 붕괴되고 자본주의의 글로벌리제이션이 이루어진 1990년대 이후 그것은 ‘자본의 제국‘ 또는 신자유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변화되었습니다. 그것은 국경을 넘고 네이션을 넘어 모든 곳에 침투하는 침입하는 자본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실제 그 결과로 새로운 타입의 유동민이 출현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트세터...라 불리는 비즈니스맨, 그리고 그것과 평행해서 등장한 홈리스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유동성으로는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82)
다시 말하자면, 정주 이후에 생겨난 유동성, 즉 유목민, 산지민 또는 표박민의 유동성은 정주 이전에 존재한 유동성을 진정으로 회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으로 그것은 국가와 자본의 지배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는 실마리는 역시 유동성에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수렵채집민적 유동성입니다. (82)
동시에 그리스문명은 아시아...제국의 주변에 있었다는 것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즉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들인 점이 컸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 그리스문명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변부는 중심에 종속되었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처럼 선택적 태도가 가능한 주변부를 ‘아주변‘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세계=경제는 세계=제국의 ‘아주변‘에서 성립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10)
즉 몽골은 ‘질주하는 초원의 정복자‘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목축과 농업을 통합했을 뿐만 아니라, 대륙과 바다를 통합한 것이었습니다. 원에 의해 비로소 중국이 처음 중심이 되었습니다. 중국왕조에서 대륙과 바다의 파워 양쪽을 통합한 것은 원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67)
기존에 몽골 치하에 있던 중화본토에서는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이라는 네 계급의 신분제도가 엄격히 지켜졌다고 큰 소리로 이야기되어 왔다. 하지만 실은 도중에서 부활한 매우 사소한 과거...에 있어 수험제약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전전... 일본의 어느 학자가 당시의 중국사회 전체에 적용된 것처럼 ‘일부러‘ 말하고 그쪽이 몽골의 ‘야만적인 이미지‘에 어울린다고 하자 다른 내외의 학자들도 환영했다. (170)
왜 그랬을가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시아와의 교역에 참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교통이 곤란했기 때문이 아니라 애당초 그들에게는 아시아에 가서 팔 산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럽인은 아메리카대륙에서 은산...을 얻었습니다. 선주민을 정복하고 가혹한 노동을 강제하여 얻은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 은을 가지고 비로소 아시아와 교역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185)
세계=경제가 세계=제국을 능가한 데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령 ‘동양‘의 우위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세계=경제를 넘어서는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당양이 세계=경제의 ‘중심‘이 된다는 것, 즉 그처럼 헤게모니국가가 이동한다는 것이 세계=경제의 특징인 것입니다. 동양이 다시 우위에 선다고 해도 그것이 세계=제국의 회귀는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세계=경제의 압도적 우위를 의미할 뿐입니다. 이 점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서양중심주의를 비판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190)
반복하자면, 세계제국은 세계=경제에서 생겨난 세계자본주의에 의해 안팎으로 파괴되어 쇠퇴해 갔습니다. 그리고 ‘민족자결‘ 즉 국민국가로의 분해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제국은 마지막까지 다양한 형태로 저항했습니다. 이와 같은 저항은 단순히 제국을 존속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근대 서양의 자본주의와 국민국가라는 관념을 의심하고 그것들을 넘어서려는 지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198)
오스만제국의 붕괴가 보여주는 것은 제국은 근대세계시스템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폐기되어야 할 유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근대세계시스템에 결여된 중요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따라서 근대의 국민국가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원리는 제국을 어떤 형태로인가 회복하는 것이 됩니다. 물론 그것은 낡은 무언가를 회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오래된 사회 관습과 관련이 있는 제국, 또는 제국주의와 관계하는 제국을 부정하지 않으면, 제국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즉 제국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제국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국을 부정하고 그것을 회복하는 것, 즉 제국을 ‘지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04)
16세기 이후 제국으로부터 떨어진 지역의 민족은 서양열강에 의해 간단히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실제 유럽인이 ‘식민‘했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주변은 제국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화되지 않았습니다. 제국의 주변부가 식민지화된 것은 19세기 이후입니다. 그리고 제국의 중심에는 서양열강도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붕괴하고 있었지만 20세기까지 제국은 존속했습니다. 서양열강이 제국을 해체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민족자결‘이라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이것은 본래 유럽 내부의 룰로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럽인이 식민지화하고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원리를 오스만이나 청과 같은 제국에 적용시키려고 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제국을 해체하고 그렇게 해서 개별적으로 나뉘게 되는 민족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210)
물론 주권국가는 유럽에서 성립한 것입니다. 그것은 제국이 있었던 다른 지역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것이 세계 각지에 파급되었던 것일까요. ...... 첫째로 주권국가라는 관념은 주권국가로서 인정되지 않은 나라라면 침략을 받아도 된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세계 침략 식민지지배를 뒷받침한 것은 이런 사고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국가들은 스스로를 주권국가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서양열강에게 실력으로 승인받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민족의 해방 독립이란 바로 주권국가의 확립이었습니다. (232)
둘째로 서양열강은 오스만, 청조, 무굴이라는 거대한 세계제국에는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에 그 제국들의 통치형태를 야만이라고 비난하고 마치 제국에 종속되어 있는 민족들을 해방시키고 주권...을 부여하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구세계제국은 다수의 민족국가로 분해되었습니다. 그리고 각각 주권국가로서 독립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이처럼 유럽에서 시작되는 주권국가의 관념이 필연적으로 세계에 주권국가를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233)
내셔널리즘을 거부하고 세계시민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조국애가 나오는 것일까요. 그가 여기서 말하는 조국애(patriotism)는 근대국가의 내셔널리즘이 아니라 향토애와 같은 것입니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은 내셔널리즘과 배반되지만 향토애와는 양립합니다. 코스모폴리스는 수많은 향토가 존재하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제국‘입니다. 제국은 다수의 향토, 언어, 종교를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제국‘에서 유래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49)
여기서 칸트는 강력한 나라가 중심적인 되는 것을 부정하지 않기는커녕 오히려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헤겔이 말하는 것 같은 ‘세계사적 이념‘을 담당하는 헤게모니국가가 아닙니다. ‘강력‘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힘인지가 문제입니다. 그것은 무력인가, 금력인가. 세계=경제에서는 이 두 가지 힘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국가 이전의 사회에는 그것들과는 이질적이고 압도적인 힘이 존재했습니다. 증여의 힘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교환양식A를 뒷받침합니다. 이것은 교환양식D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힌트가 될 것입니다. 교환양식D는 교환양식A의 고차원적인 회복이기 때문에 거기서 작동하는 힘도 일종의 증여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종교에서는 그것을 ‘사랑의 힘‘이라고 부르겠지만 말입니다). (270)
한편 증여는 말하자면 승자 쪽이 무장방기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증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증여의 힘을 가집니다. 그것은 어떤 무력보다도 강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국제 여론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증여로 답례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증여의 연쇄적 확대에 의해 창설되는 평화상태가 세계공화국입니다. (271)
바꿔 말해, 일본에서 일어난 일의 특성은 단순히 제국의 ‘중심‘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주변‘과 비교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일본의 역사가 사상가에게 결여된 것이 그와 같은 시점입니다. 그들은 통상 일본의 제도나 사상을 중국과 비교해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인이 중국의 문화, 제도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고찰합니다. 그리고 메이지 이후의 일본에서는 ‘중국‘ 대신 ‘서양‘과 일본을 비교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코리아와 같은 주변국가와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코리아를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279)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해, 일본문학의 특징은 세이 쇼나곤의 계열에 있습니다. 그것은 미적, 직관적, 단편적입니다. 사회적인 현실성이 없고 보편적 이념성이 없습니다. 아니 그것을 배척합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아주변성‘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심‘에서는 견고한 골격이 되는 이념성이 필요합니다. 또 ‘주변‘에서도 그것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아주변‘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념적 도덕적인 태도를 싫어하고 수작업과 같은 것이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런 점에서 자유롭고 플렉시블...합니다. 하지만 한계도 사실 거기에 있습니다. 이론적 도덕적인 것을 경멸하는 태도가 보편적으로 세계에 통하는 것일 수 없는 법입니다. (309)
노부나가의 지위를 계승한 히데요시는 역으로 황실에 접근하여 관백...이 되었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명을 정복하여 황제가 되려고 했습니다. 실제 그러기 위해 조선반도를 침공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근거 없는 과대망상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의 시도의 배후에는 전국시대를 통해 강화되어온 군사력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광역통상권이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명조는 원과 달리 안에 틀어박히려고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명을 대신하여 그것을 재패하려고 한 것은 특별히 이상한 생각이 아닙니다. 이 시기 일본은 이미 ‘대항해시대‘의 세계-경제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히데요시의 잘못은 해양국가를 노리는 대신에 육지의 제국을 노린 데에 있습니다. 그 때문에 간단히 좌절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일본국가가 메이지 이후에 하려고 한 것을 히데요시가 보다 일찍 실행하고 보다 빨리 좌절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21)
하지만 역으로 바로 여기에 일본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아주변에 있는 자들은 ‘제국‘과 그 주변의 존재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6세기에 명을 정복하여 제국을 세우려고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또 메이지 이후의 ‘일본제국‘도 제국의 존재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국주의밖에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전후의 일본인은 그때까지의 제국주의를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제국‘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시아 인접국가와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결국 안에 틀어박히거나 그렇지 않으면 공격적으로 외부로 향합니다. 즉 내폐적 고립과 공격적 팽창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됩니다. 일본이 앞으로 ‘아시아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은 아마 무리일 것입니다.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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