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의 최우방국들까지 감시하고 정보를 수집했다고 폭로했다. 이를 두고 영국과 독일의 반응이 달랐는데, 이는 감시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강력한지 분명히 보여준 사례였다. 영국의 공식 반응은 통상적인 수준의 적개심과 경멸이었으나, 독일은 `공공의 이름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공공에 역행하는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대중에게 알리고 싶았다`는 스노든의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엄청난 지지를 보냈다. 예를 들어 라인지방의 마인츠 시에서는 ... 축제를 벌이는데, 2014년 축제에서 차를 타고 시가행진을 한 영웅이 스노든 인형이었다. 독일이 분명하게 소리 높여 스노든을 찬양했던 것이다. 그리고 2014년 1월 29일 메르켈 총리는 연방 하원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 미국의 감시 행위에 대해 이처럼 신념에 가득 찬 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독일의 정치 지도자나 동독에서 자란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76)
그렇다고 볼프가 궁지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볼프는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망각이라고 주장했다. 어떻게 그런 기억을 억눌러서 까맣게 잊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 쉽게 정부의 주장에 속아 넘어가 무조건 따를 수 있을까? 볼프는 나치 치하에서 유년을 보낸 자신이 모든 방법으로 국가를 지원하려는 욕망과 복종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고 결론지었다. 그 세대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자신도 집단 순응에 적응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볼프는 부끄러운 기억을 억누르는 정신의 능력을 인정했을 뿐, 해명할 수는 없었다. (78)
그 이후 나폴레옹 전쟁을 겪으면서 유럽의 다른 국가들처럼 보헤미아에 민족주의적 열망이 소용돌이칠 때까지 200년간 프라하에서 독일인의 영향력은 변함없이 확고했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이 붕괴하며 상황이 매우 빠르게 변했다. 체코의 민족주의 정서가 계속 커졌고, 500년간 공동생활을 하며 혼인 관계를 맺어온 프라하와 보헤미아 주민들이 단호히 독일어권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1848년에서 1880년 사이 프라하는 대다수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도시에서 체코어를 사용하는 도시로 변했다. 1882년 새로운 프라하 시장이 취임식에서 "100개의 첨탑이 있고, 전성기를 맞은 소중한 `슬라브인`의 프라하"라고 연설했을 때, 최후까지 남아 있던 독일인 시의원들이 이에 항의하며 시의회를 탈퇴했다. 그리고 다음 해 카프카가 태어났다. (93)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카프카를 규정하는 것은 독일어권 프라하의 특별한 환경이다. 1883년에 태어난 카프카가 자라면서 성격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도시 프라하는 독일인이 철수할 뿐만 아니라 종말적으로 감소하던 도시였다. ... 카프카는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해묵은 독일의 정체성을 지우기로 결정한 도시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카프카의 소설 몇 작품에 삽화를 그린 한스 프로니우스...의 카프카 초상화를 보면 불안하고, 경계심 가득하며, 소심한 한 남자가 보인다. 카프카는 1890년대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젊은이 대부분이 그렇듯 이중으로 이방인이었다. 카프카가 다닌 독일 중등학교 김나지움의 학생 대부분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었다. 300년간 가톨릭을 독실하게 믿은 국가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고 독일 유산을 버리고 있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독일어 사용자였으니, 카프카는 태어나면서부터 현대 정치 구조의 억압과 소외를 경험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95)
"18세기 초 유럽의 많은 나라가 이런 식으로 신성로마제국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영국, 덴마크, 프로이센. 스웨덴,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등 제국 외부에서 왕관을 쓴 통치자는 모두 기능적으로 밀접하게 제국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의 지배 가문도 독일 가문이었습니다. 결국 제국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정치 집합체가 형성된 것이죠. 제국의 안보가 유럽 전체의 안보와 불가분의 관계였습니다. 이런 방식이 아주 중요한 이유는 ... 동시에 나머지 유럽이 독일에 일정한 질서 유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 유럽 안보 체계의 핵심 독일. 놀랄 만큼 현대적인 견해로 보인다. 지역별 차이가 두드러지고 중앙 집권을 꺼리는 하나의 독일이 현재 유럽 안보 체계의 핵심인 것과 같다. 요아킴 웨일리는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관습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121)
루터의 대화와 편지를 보면 그가 언어를 만들면서 작센의 관공서에서 사용하던 언어를 모델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작센은 독일 중동부에 위치해 방언이 그리 심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주경계선이 있었는데, 고지독일어와 저지독일어를 나누는 언어 경계와 같습니다. 어린 시절 루터는 부모를 따라 이 경계선을 넘나들며 두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고지독일어와 저지독일어에 모두 능통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실제 저지독일어와 고지독일어로 청중에게 연설을 하고 둘 사이의 균형점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독일어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뜻밖의 행운입니다. (137)
마지막으로 중요한 요인은 읽고 쓰는 능력이었다. 유럽의 많은 나라 중에서 독일은 문맹률이 낮았다. 독일은 아무리 작은 국가라도 교육을 담당하는 관료가 있었다. 복합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한 시장과 박람회 덕분에 수백 개가 넘는 거래소에서 글을 읽고 쓰는 상인 계급이 활동했고, 이들이 한 권에 1굴덴씩 하는 루터 성경을 부담 없이 구입했다. 1굴덴은 학교 교사의 두 달치 월급이었고, 시장에 나온 송아지 한 마리 가격이었다. 다섯 집 중 한 집이 루터 성경을 구입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 집에 있는 유일한 책이 루터 성경인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 "재단사, 제화공은 물론 독일어를 조금 배워 겨우 읽을 정도인 평민과 여자들까지도 진리가 솟는 샘이나 되는 양 열심히 루터의 성경을 읽는다. 책을 가슴에 품고 외우는 사람도 있다." (142)
하지만 독일인은 늘 그리스인과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독일인은 자신들이 프랑스인이나 로마인보다 군사력은 약할지 모르지만, 그리스인처럼 그들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하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독일인은 그리스의 다원성도 동일시했습니다. 그리스 도시국가가 다양하게 많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 국가도 다양하게 많았으니까요. 독일인은 그리스인이 자유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믿었고, 자유에 대한 애정 또한 특별히 독일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발할라의 건축 양식으로 그리스 양식을 선택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미심장한 선택이었습니다. (197)
옆에서 지켜보는 영국인에게 독일은 놀랄 정도로 다양한 나라이다. 지역 특산물이 수세기에 걸쳐 지역문화를 대변한다. 서로 다른 맥주와 지역 소시지는 모두 500년 전부터 광범위한 규제에 따라 관리되었다. 드골 장군이 치즈 종류만 246가지인 프랑스를 통제하기 어렵다고 불평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드골 장군은 소시지 종류가 더 많은 독일을 통제하지 않아서 다행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에서 흔히 그렇듯 이렇게 서로 다른 맥주와 소시지들도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국가 구조 안에 포함된다. 어떻게 보면 맥주와 소시지는 5장에 소개한 동전과 유사하며, 엄청난 지역 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천 년 동안이나 독일 대부분과 중앙 유럽을 하나로 결합한 신성로마제국의 완벽한 정치적 기능과 유사하다. (214)
바로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입니다. 이로써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루터파라는 두 가지 기독교 신앙고백은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동등하게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 뒤로도 내용을 다듬어 마침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칼뱅파를 세 번째 신앙고백으로 추가 인정했습니다. 이는 제후들의 권리를 인정한 합의일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세 가지 신앙고백 안에서 국민 개개인이 자유롭게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합의였습니다.
농민전쟁과 30년 전쟁은 끔찍한 싸움이었지만, 그 결과는 일부 역사학자의 평가대로 신성로마제국의 궁극적 성취로 이어졌다. 종교의 차이를 공식적으로 수용하는 정치 단위가 탄생한 것이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비교가 되지 않는 종교적 관용이었다. (247)
두 판화가 유명한 이유는 뛰어난 제작기법 때문만이 아니다. 독일의 정반대돠는 면을 표현한 쌍둥이 자화상이란 의미를 얻으며 유명해졌다. 단호한 행동을 상징하는 기사와 내면을 들여다보며 명상에 잠긴 멜랑콜리아. 이처럼 미묘하고 복잡한 그림에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민족은 유럽에서 다시 찾아보기 어렵다. (323)
비틀은 절대 명품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독일 제품이 누려온 명성 하나는 공유했습니다. 바로 품질입니다. 50년대에는 생산 수량이 판매 수량을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비틀이 잘 팔렸지만, 회사는 변함없이 품질관리에 매달렸습니다. 50년대 중반 회사 대표가 기술검사보고서를 검토하고 직원에게 아무개가 모처에서 발견한 잡음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 만전을 기하라는 메모를 계속 날릴 정도였습니다. 회사의 입장은 간단했습니다. 아주 높은 품질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다. 우리에게 결점이란 있을 수 없다. 독일인이 이렇게 높은 품질에 성공의 희망을 거는 데에는 심리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20세기 초반 두 번의 패전으로 거의 전부를 잃은 경험과 일부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두 차례의 패배에 대한 보상심리입니다. (355)
남편에게 몇 차례 도움을 받으며 자연스레 알게 된 여자들이 있다. 나는 노동자들의 운명과 삶의 방식에 관련된 모든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 하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가 처음 그들의 삶을 대변하는 일에 마음이 끌렸을 때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 동정과 위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냥 그들의 삶이 아름답다는 것이 주된 동기였다. (395)
집단에 가해진 범죄를 다룰 때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다. 끝없이 쌓이고 되풀이되어 집단이 되었을 뿐, 그 안에는 언제나 각별한 개인들의 고통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446)
놀라운 것은 `페허부인들`이 독일을 다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든 속도이다. 영국에서는 1960년대까지도 사람이 살지 않는 피폭지들을 곳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1970년대에도 그런 곳에서 TV연속극을 촬영할 정도였다. 독일은 서베를린의 빌헬름 황제 기념 교회...처럼 반파된 몇몇 건물을 일부러 복고하지 않고 기념비로 삼았는데, 제3제국의 범죄와 건물보다 더 큰 대가를 치근 국민의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곳을 제외한 독일, 특히 서독의 많은 부분은 1950년대 후반에 이미 복구가 끝나 있었다. 독일인들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지 않으려면 부단한 노동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하다. (488)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모든 동독인에게 서독을 방문할 `환영금...`으로 100마르크씩 지급되었다. 환영금으로만 거의 40억 마르크가 지출되었다. 하지만 이는 헬무트 슐레징어의 지적처럼 두 나라의 통화를 통합하는 데 필요한 비용에 비하면 하찮은 금액이었다. 은행과 경제학자들은 2대 1의 비율로 오스트마르크와 독일 마르크를 교환하라고 제안했다. 두 나라의 경제력 차이에 비해 아주 후하게 책정한 비율이었다. 하지만 헬무트 콜 총리의 생각은 달랐다. 콜 총리는 오스트마르크를 실제보다 훨씬 높은 가치로 환전하기로 결정했다. 경제가 아닌 정치적 결정이었다. 그 어떤 것도 동독 주민의 재정을 파탄내고, 재통일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콜 총리가 임금과 이자, 임차료를 1대 1의 비율로 교환하라고 발표한 것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495)
유대인은 대체로 보호받는 주민이었고, 유용한 사람들도 인정받았습니다. 유대인과의 인종 통합은 없었지만, 프랑크푸르트 지구 같은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곤 유대인들이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거주지구에서 살지 않는다는 면에서 공간 통합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독일의 반유대주의가 15세기 유대인 추방이나 1540년대 루터의 반유대적인 비판에서 출발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19세기 근대 독일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 비극의 역사적 선례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홀로코스트가 독일 역사의 중세 후반에 뿌리를 둔 것은 절대 아닙니다. (506)
우리가 일련의 사건들을 인지하는 동안, 천사는 쉼 없이 잔해를 쌓아올려 그의 발 앞으로 내던지는 단 하나의 파국을 파라본다. 천사는 머물러, 죽은 자들을 깨워 일으키고 부서진 것들을 다시 온전하게 복구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천국에서 폭풍이 몰려오고 있다. 그 폭풍이 천사의 두 날개를 너무 거세게 밀어붙여 천사는 더는 날개를 접을 수 없다. 폭풍은 천사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로 천사를 꼼짝 못하게 떠밀고, 천사 앞의 잔해 더미는 하늘로 치솟는다. 이 폭풍을 우리는 진보라고 부른다. (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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