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앞에서 (반양장) - 한 사학자의 6.25 일기, 개정판
김성칠 지음, 정병준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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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중의 김씨도 좌익과 연락을 갖는 것 같고, 이렇듯 모든 정직한 동무들이 지향하는 그 길은 과연 오늘날의 조선을 바로잡는 최선의 길일까. 일반 민심의 동향과 아울러 생각할 때 동포들끼리 서로 분열 항쟁함에나 이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부에서는 일부러 그러기를 바라는 소아병의 무리가 많음으로 보아 더욱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22)

이번 차에 꼭 타지 않으면 무슨 큰 낭패라도 있을 듯한, 모두 그러한 표정들이다. 타고 내릴 때 붐비고 떠다밀고 하는 것보다도 전차가 가까이 갔을 때 창문을 향하여 오는 그 표정들이 너무 심각하여 거의 필사적이라고 해야 할 지경이다. 오래 굶주리던 동물이 먹이를 바라볼 때 이러할 것이거니 하고 상상하면 마음이 사뭇 괴롭다. 사소한 일에 심각한 표정을 갖는 민족은 지극히 불행한 환경 속에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고, 또 그러한 마음가짐 자체가 불행한 현재의 표상이며, 또 앞으로 불행을 빚어내는 기틀이 될 것이다. (44)

그야 가장 가까운 사람과 말다툼이나 하고 천애고독의 안타까운 심경에 놓일 때 그 뒤끓는 가슴속을 문자로 표현함으로 해서 다소 후련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때 가슴이 후련해질 수 있다고 우리들의 생활을 파멸에로 이끌언허는 어리석음을 감행하지 않으리라. 나는 아무리 살아가는 것이 괴롭더라도 술에 도취하지 않고 아편에 마비되지 않으련다. 나는 아무리 괴로운 순간에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이그러진 얼굴을 사진박지 않으리라. (59)

지명연구회에서 쓰려고 내어다 둔 5만분지 1지도는 많인 수세미로 도어 있고 연구회에서 애써 조사해놓은 귀중한 많은 자료들은 휴지로 쓰이었다. 지난 한해 동안 이를 위하여 가진 애를 쓰고 다니던 일을 생각하니 떡심이 풀린다. 전쟁이란 이런 것인가? 이민족도 아닌 동족끼리,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이다지도 몰라주는 것일까. 카드가 없어진 일과 아울러 생각하니 그 자리에 펄썩 주저앉아서 엉엉 울고 싶다. (127)

이것이 바로 인민공화국의 장기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 생명을 유지하려면 당의 장단에 맞추어 춤추지 않을 수 없고...... 누구나 얼마쯤의 공포증에 사로잡혀 정부의 하는 일에 무조건 백지위임장을 써 바치지 아니할 수 없는......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 정치기술로서 만점일는지도 모른다. (179)

"선생님은 이 전쟁을 어떻게 보십니까?" 하기에 "첫째는 동족상잔함이 슬프고, 둘째는 미군과 조선 사람이 겨루어 방금 피를 흘리고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미군에 마음을 붙이고 있는 사람이 많게끔 되었으니 이 사실이 더욱 슬프다" 하였다. (202)

인민공화국의 일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한글전용이다. 그러나 이상스러운 건 한글을 전용함녀서도 한문에서 나온 문자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도리어 새 문자들을 만들어서까지 쓴다. `독보회`라는 건 늘 들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그밖에 "창발성을 제고하여서"라든가 "견결히 반대한다"라든가 "경각성을 높여서"라든가 "청소한 우리 인민공화국"이라든가 하는 말들을 잘 쓴다. 모두 귀에 생소한 말들이다.
......
"이것은 필시 모스끄바에 토박이로 있는 조선 사람들의 손으로 번역되었을 것이고, 그들은 현대 조선어의 세련미와는 오랫동안 절연되다시피 해 있으니 자연히 한두 세대씩 묵은 조선어를 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평양은 모스끄바의 문화를 직수입하고 또 이를 신성시하여 아무런 비판도 개선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할 수 없을는지? (219-220)

이리하여 자꾸만 없어지는 문화인과 기술자들. 몇십년을 길러야 하는 이들을 하루아침에 다 떠나보내고 앞으로 대한민국은 어떻게 살림을 꾸려나가려는 것인지?
글줄이나 쓰고 그림폭이나 그리던 사람들, 심지어 음악가 영화인에 이르기까지 쓸 만한 사람이 많이 북으로 가버렸다. 학계로 말하여도 신진발랄한 사람들이 많이 가고 우리같이 무기력한 축들이 지천으로 남아 있다. 간 그들이 모두 다 볼셰비끼였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던 사람들 또는 양심적인 이상주의자들이 죄다 가버렸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깊이 반성하는 바 있어야 할 것이다. (246)

하여튼 이번 경험을 통해서 내가 절실히 느껴지는 점은, 난리가 났을 때 교묘히 숨느니보다도 평소에 마을 사람들과 좋게 지내고 또 세상에 아무와도 원수를 맺지 않는 것이 어떠한 경우에라도 살아남는 제일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281)

1950년 11월 7일
차에서 보니 길가의 마을은 집들이 모두 파괴되고 불살렸으나 길에서 얼마쯤 들어가 있는 마을과 집들은 비교적 안전하다.
우리나라는 이를 비유하면 세계의 길갓집이 아닐까. (290)

오늘날 이 세상에선 `3만지`라야만 살 수 있단느 것이다. 무슨 소린고 했더니 (1) 밖에서 보아 있는지 만지 한 마을에 (2) 집인지 만지 한 집을 지니고 (3) 사람인지 만지 할 정도로 처신하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자비한 좌우의 항쟁이 남긴 시골 사람에의 교훈이다. (307)

삼우러 삼짇날.
거센 항구의 바람 속에서 꽃은 피고지고.
피란꾼이 고달픈 살림살이 속에서 봄을 맞이하였다.
아내와 더불어 앞으로 할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힘써 아이들에 관한 책을 읽고 번역하고 그러는 중에 우리도 붓을 들어서 적어도 아미치스의 <사랑의 학교>에 비길 만한 하나는 후세에 남겨두자고. (333)

위에 쓴 넋두리는 말은 분명히 못했지만 자유와 평화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슬픈 마음을 노래 흉내라도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사람이란 참 묘한 존재라고 생각되었다. 가장 비참한 지경에서 감상적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고통을 씻어주는 위로가 된다는 것.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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