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탄생 - 문자라는 기적
노마 히데키 지음, 김진아.김기연.박수진 옮김 / 돌베개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외국어`라는 개념도 위험한 개념이다.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 제일 한국인 제일 조선인과 같이 일본에 있는 `외국인` 국적의 사람들에게는 한국어가 `외국어`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일본어가 `외국어`가 된다. 일반적으로 모어가 아닌 언어, 비모어를 외국어라고 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는 피하는 것이 좋다. 실제로는 비모어 교육, 비모어 학습인데, 이를 외국어 교육, 또는 외국어 학습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성의 측면에서나 이념적인 측면에서나 문제가 된다. 일본어 모어화자를 대상으로 한 한국어 교육이 `외국어 교육`으로 불리는 순간, 학습자 중에서 제일 한국인이 배제되는 구도가 된다. 제일 한국인에게 한국어는 외국어가 아니다. 조국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설사 그 언어로 전혀 말할 줄 모르고 조국의 땅을 한 번도 밟은 적이 없다 하더라도, `외국어 교육`이라는 말은 거기서 배제되는 사람들의 슬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44) ...... 오히려 이 세 가지[언어, 민족, 국가를 말함]가 대응되지 않는 것이 보다 깊은 곳에 존재하는 원리이며, 디폴트 즉 초기 상태이다. 언어는 개인에 속한다. 부모와 자식 간에조차 언어는 다를 수 있는 것이다. (45)

<전주>의 자세한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한자 조자법의 이러한 원리는 15세기 조선 왕조의 지식인들도 알고 있는 바였고 문자를 만드는 데 있어서 제일 먼저 검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훈민정음> 창제자들은 한국에서도 천여 년에 걸쳐 소중히 간직해 왔던, <상형>을 핵심으로 한 이 <육서의 원리>와 <형음의> 통일체라는 시스템에 결별을 고하였다. (89)

드디어 문자를 만들게 된다. 전체적인 전략은 이미 정해졌다. <음>에서 출발할 것. 한자처럼 대상을 <상형>하여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음>에 형태를 부여할 것. 그리고 그 <음>, 즉 흘러서 사라져 가는 <언어음>을 구분해 단위를 만들고, 각 단위에 형태를 부여하는 <단음문자>로 할 것. 자음과 모음을 추출해 <자음자모>뿐 아니라 <모음자모>에도 게슈탈트(형태)를 줄 것. (137)

<정음>에는 모든 소리, 모든 자모, 모든 자형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이론적인 설명이 치밀하게 마련되어 있다. <정음>의 창제자들에게는 한 점, 한 획이 결코 자의적인 것이어서는 안 되었으며, 이치가 관철되어 있지 않아서도 안 되었다. 그것은 천지 귀신과도 통하는 이치이다. 신이여, 세부에 깃드시라--모든 세부가 정연한 음양의 이치로 짜여, 왜 그러한 <형태>여야 하는가가 하나하나 언어화된다. 이 언어화도 `지혜의 운용`이나 `힘으로써 찾은 것`이 아니라 소리 그 자체로부터 얻어진 것, 천지자연의 이치인 것이다. (170)

임금은 최고 권력자이니 <혁명>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걸까? 아니다. 세종 임금이 <정음 에크리튀르 혁명>으로 투쟁한 상대는 왕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막강한 상대였다. 그것은 역사가 쓰여지기 시작한 이래로 오늘날까지를 꿰뚫는 <한자한문 에크리튀르>였다. 투쟁의 상대는 바로 역사이며 세계였다. <지>의 모든 것이었다. 역사서, 즉 쓰여진 역사를 펴 보면 알 수 있듯이 거대한 에크리튀르의 역사 앞에서 임금은 시호로 불리고 쓰여지는 몇 글자의 고유명사에 지나지 않는다. (227)

<정음>의 사상을 <용음합자>라는 간결한 구절로 파악하고 있는 최만리의 안목은 정확한 것이다. 최만리와 사대부들은 단순히 사대주의 사상 때문에 <정음>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름 아닌 <용음합자>라는 사고방식 그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의 형태뿐만 아니라 문자를 만들어 내는 시스템 자체를 향한 이의이다. (241)

바람 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의 울음소리, 개가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써서 나타낼 수 있다. (251)

"바라건대 <정음>을 보는 자가 스승 없이 스스로 깨우치게 되기를. 그 연원과, 정밀하고 싶은 뜻의 묘미는 소신들이 감히 말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 그리고 정인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인다. "<정음>은 깊다." (265)

붓 종이 벼루 먹 등 문방사우로 상징되는, 문자를 문자로서 성립되게 만드는 <쓰기>의 수련 과정이나 기볍은 `어리석은 백성`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그 수련 과정과 기법이라는 신체성을 거부한다는 것은 거기에 담겨 있는 정신성까지도 거부하는 일이다. 정음은 붓을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뭇가지로 땅에 끄적이기에 결코 부적합한 문자가 아니었다.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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